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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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쏟아지는 자기계발서들을 보며 무척이나 궁금했던 것 하나가 있었다. 책에 담긴 내용대로 행동하고 노력한다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을까? 저자들은 하나같이 독자의 ‘미래의 나태’를 예상하며, 책대로만 열심히 노력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가능할까?

 

대한민국은 주지하다시피 자살 공화국이다. 나이 어린 초등학생부터 연로한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연령의 제한 없이 스스로 생명을 버린다. 그 원인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겠지만, 솔직히 말하자. 너무나 살기 힘든 곳이 바로 대한민국이기 때문 아닌가.

 

하지만 이런 ‘팍팍한 삶’이 비단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자본주의, 거기에다 무지막지한 경쟁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시대를 살고 있는 지구상의 모든 ‘우리’들은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스스로를 가혹하게 착취하며 살아가고 있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짧은 에세이는 독일에서 커다한 반향을 일으키며,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아시아 출신 철학자의 책이 2주 만에 매진되는 결코 흔하지 않은 일이 서양 근대 철학과 인문학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독일에서 일어난 것이다.

 

저자는 책을 통해 자신의 개념을 과감히 제시하고, 또한 그 개념을 통해 거장 철학자, 사상가들의 논리를 비판하며 바로 이 시대의 본질을 통찰하고 있다. 그들은 프로이트, 푸코, 아감벤, 한나 아렌트 등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어찌보면 간단하다. 과거 규율사회, 복종적 주체에서 성과사회, 성과주체로 바뀐 지금, 사람들이 기대했던 유토피아 대신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자아의 새로운 위기가 오고 있다는 진단이다. 즉 개인은 스스로를 극도로 착취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성과사회, 성과주체의 이상은 오늘의 세계에서 전일적 지배를 확립한 자본주의의 요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더욱 생산적이 될 것’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근본적 요구라며, 이 요구가 관철되는 방식이 후기 자본주의에 이르러 지배와 강제에 의한 타자 착취에서 성공적 인간이 되기 위한 자기 착취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지적이다. 저자는 이를 착취의 진화로 파악한다.

 

언제부터인가, 기업은 그리고 사회는 창의적인 인재를 강조한다. 창의적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누가 굳이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고 혁신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듣기엔 좋은 말이다. 하지만 강제가 아닌 스스로 ‘성공’이라는 주문에 사로잡혀 자신을 소진하고 착취하는 것이 진정 진보된 인간상, 사회상이라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결국 어떻게 하든 그 성공이라는 목표는 극히 소수만이 차지할 수 있다면 말이다.

 

저자가 말하는 자기 착취는 타자 착취에 의한 생산성의 향상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더욱 효율적인 방법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성공학 개론서들이 ‘당신은 바로 당신 자신의 경영자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을 저자는 ‘당신은 당신 자신의 자본가이며 착취자입니다’라고 읽는 것이다.

 

성공적 인간이라는 이상에 유혹당한 사람들의 열망과 실천이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의 확대 재생산에 기여하고 있는 현실. 그 과정에서 정작 인간은 소진되고 마모되는 모습.

 

저자는 시스템이 이상적인 자아가 되고자 하는 개인들의 욕망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개개인이 그러한 욕망의 허구성에 대해 각성하는 데서 비로소 시스템의 변화도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다.

 

여기에서 그가 주목하는 것이 바로 우울증이다. 그는 우울증을 이 시대의 핵심적 질병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 배경에 성과사회의 압력이 있음을 주장한다. 타자의 강제가 인간을 옥죄고 있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그런 타자에 대한 폭력적 저항을 통해 자유로워질 수 있다. 기실 지난 과거는 이러한 타자의 압력에 대한 저항의 역사였다. 그리고 그것이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마르크스주의의 모델이다.

 

하지만 우울증의 배후에 놓인 성과사회의 압력은 단순한 외적 강제가 아니라 유혹의 형태이며, 오직 인간 자신의 욕망을 매개로 해서만 관철된다. 때문에 성과사회의 압력은 끝없는 성공을 향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을 통해서만 물리칠 수 있다.

 

성공과 부, 이 뿌리칠 수 없는 유혹으로 이 시대 많은 이들이 자신을 몰아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자살은 속출하고, 또한 우울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린다. 자기 착취는 누군가에 의한 강제가 아니기에, 자유롭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라는 착각 속에 자신이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게 된다. 그 끝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어느 새 스스로를 강제하고 착취하는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로 살아가고 있다. 과거 부정성의 변증법이 아닌 긍정성의 과잉에서 나타나는 병리적 상태. 우리는 스스로 그것을 느끼고 있는가.

 

저자는 긍정성의 폭력이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이라 말한다. 스스로 가슴이 철렁해짐을 느끼게 된다. 나는 진정 스스로를 경영하는 기업가일까. 아니면 그러한 착각 속에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가해자일까.

 

정답은 물론 우리 스스로가 알 것이다.

 

짧지만 매우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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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한 세상 엉뚱한 이야기 - 소설가 임상모의 시사산책
임상모 지음 / 화남출판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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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란 국가가 만들어질 당시, 옳지 못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정의로운 이들이 핍박받는 억울한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이들은 가려지고, 온갖 더러운 변절과 민족 배반을 일삼았던 이들은 바로 그 간교함으로 다시 한 번 살아남아 이 사회의 주류로 행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잘못된 시작은 그 이후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어지럽게 만든 가장 큰 요인이 되었습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과 노태우로 이어지는 독재정권들을 만들었고, 또한 올바른 역사의식, 정의로운 가치가 존중받는 사회 풍토를 만드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지금 새누리당을 비롯한 보수 세력이 판을 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독재와 결탁하고, 권력에 굴종하며 구차하게 삶을 연명했던 이들, 그리고 그 후예들이 여전히 사회의 중심에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힘없는 서민들을 억누르고 있는 형편입니다.

 

거기에 친일 보수 언론들은 평범한 백성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온갖 더러운 가치관을 주입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더러운 종이 매체들은 여전히 커다란 권력을 갖고, 심지어 방송마저 장악한 채 제 입맛에 맞는 더러운 방송을 전파에 담아 쏘아댑니다. 대한민국의 현실이 여전히 어두운 이유입니다.

 

임상모 선생은 문학인이자, 언론인입니다. 전두환 신군부의 악행으로 다니던 신문사에서 해직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선생은 바른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고야 마는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면모를 풍기고 있습니다. 아울러 단정한 문체에서 드러나는 성품은 그가 이 시대 몇 안 남은 선비임을 보여줍니다.

 

책은 그동안 선생이 인터넷을 통해 기고했던 글들을 모았습니다. 노무현 정부의 탄생 이전부터 현 이명박 정권 시기까지 선생이 느낀 많은 생각들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문장 하나하나에 힘과 기백이 넘칩니다. 글만 보면 누구도 선생을 칠순을 넘긴 노인으로 생각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세상엔 추구해야 할 가치랄까, 목표가 참으로 다양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현재는 그런 다양한 가치보다는 오직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겠다는 꿈이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부자되세요!’라는 천박한 광고 문구가 버젓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시대입니다.

 

그렇기에 정의는, 올바른 역사의식은, 최소한의 인간된 도리는 점차 설 곳을 잃어갑니다. 불의를 불의라 말하지 않고, 다만 숨죽여 자신에게까지 그 불의의 파편이 튀지 않기만을 바랍니다. 오히려 불의와 함께 하는 더러운 권력과 부귀의 찌꺼기라도 얻어먹기를 바랄 뿐입니다.

 

불의를 말하고, 정의를 외치면 순식간에 빨갱이로 몰리는 후안무치의 세상, 사람들은 실체도 모르는 빨갱이의 공포 속에 숨 죽여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온전한 자유일까요. 우리는 과연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일까요.

 

이명박 정권의 말년이 추악합니다. 예상은 했지만, 언제나 그 예상을 뛰어넘는 악행을 저질러 온 정권입니다. 일일이 거론하기조차 두렵고 더럽고 추악한 집단입니다. 그들이 과연 국가와 민족, 국민을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가관인 것은 새누리당이란 이름으로 변신한 한나라당입니다. 그리고 박근혜 씨입니다. 여전히 국민들을 볼모로 자신들의 추악한 과거를 숨기고, 권력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씁니다. 국민들의 삶을 어두운 구렁텅이에 몰아넣고, 그것도 모자라 다시 한 번 자신들에게 권력을 달라고 구걸합니다. 천하에 이런 몰염치한 족속들도 없습니다.

 

또한 자신의 아버지, 박정희의 온갖 죄악에 대해 단 한 번도 사과하지 않고, 국민들의 재산을 빼앗아 부귀를 누리며 살아가던 딸은 다시 한 번 아버지의 국가를 쟁취하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손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전국을 누빕니다. 그리고 선량한, 하지만 진실을 보지 못하는 시민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임상모 선생의 글은 비록 그 분량을 길지 않지만, 긴 여운으로 다가옵니다. 진정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진정 이 땅을 살아가는 양심이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그러한 따끔한 죽비가 우리에겐 참으로 다행스럽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조현오 경찰청장이 사퇴한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진작 물러나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진정 자신의 악행에 반성을 할지는 기대할 수 없겠으나 검찰과 경찰이 국민들에게 진정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다시는 조현오와 같은 인물이 경찰청장이 되는 비극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비루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악행에 대한, 죄악에 대한, 불의에 대한 공범이 될 수 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함이라는 구차함보다는 최소한 자식에게, 부모에게, 후손들에게 떳떳할 수 있는 ‘시대의 인간’으로 남고 싶습니다.

 

우리는 그 시작을 4월 11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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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미래
앤서니 기든스 지음, 신광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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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4·11총선의 본격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됐다. 여기저기 현수막이 나부끼고 저마다 자신이 국회에 입성할 자격이 있다고 떠든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당명이 혼란스럽고, 처음 들어보는 이름들이 어지럽다.

 

앤서니 기든스와 토니 블레어라는 이름이 조금은 식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수많은 논란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앤서니 기든스는 여전히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학자다. 아울러 토니 블레어 정권 역시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책은 2001년에 집필된, 조금은 오래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른바 ‘제3의 길’을 주창하며 집권한 영국 노동당이 1기를 마친 뒤, 새로운 2기를 맞는 시점에서 ‘신노동당’이 추구했던 정책, 비판받았던 부분에 대한 설명 혹은 반박, 그리고 그가 주장하는 ‘새로운 사회민주주의 노선’이 가야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 이후 영국 노동당의 정책과 노선은 많은 비판과 저항 속에 실패한 것으로 - 특히 진보 진영에게 - 인식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대처로 상징되는 영국 보수정권이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어느 정도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여전히 평가는 저마다 다르다.

 

이 책이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 특히 지금 바로 이 땅에서 -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이제야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기 시작한, 혹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당시 싹을 틔웠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여지없이 역진한 여러 가지 가치 혹은 정책들이 당시 영국에게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에, 영국 노동당 정권의 성공과 실패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전해줄 수 있다. 아울러 한국 사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국민 스스로 하지 않으면, 결국 낙후된 우리 정치의 현실이 바뀌지 않음을 느끼게 해준다.

 

기든스가 책에서 논의하고 있는 것들은 민영화, 복지 개혁, 지방분권, 교육, 환경, 세계화 등이다. 어느 것 하나 지금 우리와 관련해 중요하지 않은 게 없다. 기든스는 우파가 다시 부활시킨, 아니 더욱 강화시킨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는 동시에, 기존 유럽 좌파들이 가지고 있던 이념적, 정책적 경직성에서 탈피해 새로운 정치 담론, 정책 담론을 제시하고 있다. 민영화에 대한 합리적이고도 유연한 접근, 반세계화 운동에 대한 비판 등 기존 좌파적 시각에선 다소 파격적인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기든스의 이론과 정책 제시를 그대로 우리 사회에 적용할 수는 없다. 아직 우리는 인정하긴 싫다 하더라도, 영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정치적 후진국이기 때문이다. 영국과 우리가 처한 정치 상황이 다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기든스는 무조건적인 반대나 비판이 아닌 ‘현실적이면서도 바람직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정책적 상상력이 필요함을 일깨워 준다. 현 정부나 여당은 물론이고, 야당과 시민사회는 여전히 우리 사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체계화된 논의를 충분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구호에 그칠 뿐이다.

 

이번 총선과 대선을 통해 우리 정치는 한 단계 도약하느냐, 다시 주저앉느냐에 기로에 서게 된다. 결과는 온전히 우리 선택에 달렸다. 다양한 가치와 정책들이 경쟁하는 선거가 되었으면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추잡하고 짜증나는 이야기들이 난무한다.

 

하지만 희망을 버릴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동안 우리는 꽤 많은 연습과 시행착오를 겪어 오지 않았나. 그런 경험들이 또 다른 현명한 선택으로 이어지길 바랄 뿐이다.

 

기든스는 세계적인 석학답게 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비판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역시 북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인식을 갖고 있지 못함이 보여 아쉬웠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이다.

 

“우리는 개발도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빈곤으로부터 벗어나는 단 하나의 방법을 알고 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경제 성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 과정은 지구적 경제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나라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미얀마 혹은 북한과 같이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사회들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회에 속한다.”

 

북은 지구적 경제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킨 적이 없다. 김일성 주석부터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염원은 미국과의 수교를 통한 국제 사회의 편입이었다. 이것을 끝까지 막고 군사적·경제적 제재를 지속해 고립시킨 것이 미국과 김대중 정권 이전의 남한이었다는 사실. 숨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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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와 함께 걷다 - 평화의 눈길로 돌아본 한국 현대사
한홍구 지음 / 검둥소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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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공부가 지겨웠던 적이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연도를 외워야 하고,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왕의 이름들과 사건, 지명들을 외워야 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단기간에 외워서 단답식으로 치르는 시험도 역사공부를 싫어하게 된 배경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 난생처음 북의 역사를 공부하며(전공이 북한학과입니다) 역사 공부에 대한 새로운 재미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반도의 반쪽인 남한 역사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전공자들의 수준과는 비교가 안 되겠지만 말이죠.

 

한홍구 교수님은 존경해마지 않는 분입니다. 비록 직접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영광을 누리진 못했지만, 교수님의 책을 읽으며, 또한 대중 강연을 들으며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교수님의 삶 자체가 하나의 역사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책은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는 ‘역사기행’의 길라잡이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는 안내서입니다. 가까운 곳에 얼마든지 우리의 슬픔과 좌절, 환호와 희망이 살아 숨 쉬는 곳들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복잡한 심정까지. 책을 통해 깨달은 사실들을 직접 가서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 시절, 이후 동족 간의 가슴 아픈 전쟁, 또 이어지는 군사독재의 역사. 우리는 정말 많은 이야기들을 안고 살아가는 민족입니다. 아울러 여전히 분단이라는 치욕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기도 합니다. 여전히 남과 북은 서로를 향해 증오와 분노의 몸짓을 서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끊임없이 희망을 만들어냅니다. 광장에서 광장으로 이어지는 환호와 외침. 불의를 향해 던지는 뜨거운 함성은 그 아무리 폭압적인 권력이라 하더라도 이내 끌어내리곤 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울고 웃으며 한반도에서 살아냈습니다.

 

한홍구 교수의 따뜻하면서도 냉철한 시선은 이 땅의 많은 장소들이 곧 역사임을 말해줍니다. 전쟁을 기념하는 세계 유일의 치욕스러운 장소인 전쟁기념관, 일본 정신대 피해자 할머니들의 안식처이자 역사의 장이기도 한 나눔의 집, 근대 국가가 만들어 놓은 강요된 애국심의 현장 국립현충원, 가슴 아픈 역사의 상처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경복궁, 독립공원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이밖에도 강화도, 국립4·19민주묘지, 남산과 명동성당, 광장, 차이나타운과 자유공원 등 많은 사연과 굴곡을 안고 있는 곳들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망각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이자, 혹은 권리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끝내 남겨지고 기억되고, 호명되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네, 아마 있을 것입니다. 그것들을 끝까지 안고 가는 것, 힘들고 지치는 일이지만 결코 포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역사의 변절자는 누구인지, 누가 자신의 탈을 바꿔가며 구차한 삶을 이어갔는지, 어떤 이들이 진정한 역사의 흐름을 거꾸로 돌리려 했는지, 이 모든 것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 역사와 민족을 팔아먹는 이들이 부지런한 만큼, 딱 그만큼 우리도 부지런해야 합니다. 그러한 여정에 한 교수님과 같은 분들이 지름길을 살짝 전해주고 있습니다.

 

책에는 가슴 저리는 이야기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 역사는 이다지도 눈물과 한이 많은 것일까요. 하지만 마냥 울고만 있을 수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또 다시 쓰러지지 않기 위함입니다.

 

책을 통해, 허접스러운 뉴라이트가 아닌 이 땅의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이 어떻게 살았고, 죽어갔는지를, 4·19혁명의 주역이 대학생이 아닌 초등학교, 중학생들이었다는 사실을, 6월 항쟁의 밑거름에는 집을 철거당한 빈민들이 명동성당에서 장기농성을 위해 준비한 쌀밥이 있었다는 사실을, 박정희가 더럽게 못 쓰는 붓글씨로 얼마나 많은 역사 유적과 유적지에 낙서를 해놨는지를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이름 없는 이들이 역사를 이끌어 왔는지, 다시 한 번 느낍니다. 아내와 함께, 언젠간 자식들과 함께 이 책을 들고 꼭 소박한 ‘역사기행’을 하고 싶습니다.

 

아, 책에 실린 김수영 시인의 시가 지금 저에게 가장 와 닿았습니다. 곧 이 시를 부를 날이 올까요. 4·19혁명 이후 시인이 쓴 시입니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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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 : 이승편 상.하 세트 - 전2권 신과 함께 시리즈
주호민 지음 / 애니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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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내가 살던 동네 아래는 판잣집들이 얼기설기 모여 있었다. ‘큰대문집’이라는 대폿집이 있었고, 구두수선을 하는 아저씨의 창고 같은 집도 있었다. 백양메리야스라는 간판의 속옷 가게도 있었는데, 거의 30여년이 지난 지금, 유일하게 그 가게는 ‘BYC’란 이름으로 아직도 남아있다.

 

그게 전부다. 내 유년시절 남아있던 기억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것이. 이제 그곳은 전부 다른 건물들로 가득 차 있다. 수많은 판잣집에서 살아가던 그 수많은 사람들은 지금 다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어느 날 화재로 살아가던 터전을 잃어버린 구두 수선공 아저씨는 지금도 구두 수선을 하고 계실까. 아니면 이미 이 세상 분이 아닌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 집이 있다. 주위에 있던 집들은 모두 3~4층 짜리 단독주택으로 변해버렸지만, 우리 집은 여전히 50년 전 지은 그대로 한옥이다. 측간이 있어 똥을 모을 수 있고, 작지만 마당과 연못도 있다. 부뚜막도 그대로다. 물론 장작을 태워 밥을 짓는 구조는 아니다. 대신 연탄을 때워 밥을 했고, 물을 데웠다. 지금은 너무 낡아 사용할 수 없지만.

 

《신과 함께》는 오랫동안 집을 지켜온 가택신들. 우리나라의 전통 신들이 주인 할아버지를 데려가려는 저승차사들과 대결을 벌이고, 재개발로 집을 철거하려는 용역업체들과 싸운다. 집의 가장을 수호하는, 주로 대들보에 깃든다고 알려지는 성주신과 부엌과 불씨를 지키는 조왕신, 측간 즉 변소를 지키는 변소각시 측간신 그리고 집터를 인간에게 허락해주고 재복을 내리는 터주신(철융신) 등이 힘을 모아 저승차사, 인간들과 대결을 벌인다.

 

그러는 와중에, 인간들의 탐욕으로 오랫동안 지켜온 집을 부수려는 모습에 분노한 저승차사들이 가택신들과 힘을 모아 집을 지키는 웃지못할 상황이 벌어진다. 원래 이 둘은 서로 다투고 힘을 겨루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책은 이 땅에서 대대로 인간들과 함께 살아온 가택신을 통해 지금 우리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며 살고 있는지 보여준다. 무엇이든 돈으로 환산하고, 가치를 따지는 무참한 시대에 전통은 버려야 할 악습이 되어버리고, 오래된 것은 곧 없애야 할 것이란 등식이 정당화된다. 그리고 함께 살아왔던 모든 것을 바꾸려 한다.

 

무엇이 진정 인간다운 삶일까. 이 시대를 살아가며 매일매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화려함과 풍족함 속에 정작 인간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처절한 극단이 만들어내는 비정함 속에, 우리는 무엇을 지키며 살아가고 무엇을 버리며 살아가고 있을까.

 

책을 읽으며 몇 번이나 코끝이 찡해짐을 느꼈다. 내 유년시절이 생각났고, 나와 함께 유년시절을 보낸 벗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판잣집과 싸구려 불량식품, 떡볶이, 덤블링, 딱지가 떠올랐다. 가난했지만 누구도 차별받지 않았던 그 때가 생각났다. 눈물 나도록 그리운 시절이 스쳐지나갔다.

 

진보와 발전, 변화와 혁신은 분명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겉모습을 바꾸기 위해, 조금 더 편해지기 위해 오랫동안 지켜왔던 소중함마저 함께 묻어버린다면, 그땐 무엇이 보상으로 주어질까.

 

작가는 책을 통해 과연 우리네 삶의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되묻는다. 그리고 아름다운 전통과 소박한 이웃의 정이 사라진 지금, 우린 행복한 것인지 묻는다. 대답하기 차마 어려운 슬픔이다.

 

이제 우리 집을 제외한 주변에 가택신들은 없을 것이다. 오직 우리 집에만 가택신들이 살아가고 있다. 측간에 들어가 똥을 누기 전, ‘에헴’하며 사람이 들어감을 알리고, 부엌에서 국을 끓이며 조왕신의 알뜰살뜰함을 함께 배운다.

 

대들보 위에는 성주신이 우리를 바라보며 가정의 화목함을 빌어주고, 안방엔 삼신 할머니가 인자한 얼굴로 웃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문을 지키는 문왕신, 곳간을 지키는 업왕신 등이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모르겠다. 언젠가는 우리 집도 철거하고 무지막지한 콘크리트와 벽돌로 꽉 막힌 건물이 들어설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택신들도 우리 곁을 떠날 것이다. 더 이상 어른들이 문지방을 밟지 말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고, 장독대를 지키던 철융신도 떠나겠지. 내 아이들은 성주신과 조왕신, 측간신을 알 수 있을까.

 

재개발이란 이름으로 지금도 수많은 집들이 사라지고 있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과 신들이 갈 곳을 몰라 떠돌고 있다. 그런 진보, 그런 발전이라면 더 이상 필요없지 않을까.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어야 귀신들도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은 천안함 좌초 사고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렸다. 그 분들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빈다. 하지만 난 그 분들과 함께 3년 전 용산에서 불에 타 숨져간 5명의 철거민과 1명의 경찰을 기억하려 한다. 개발이라는 이름의 살인으로 희생된 그 분들을 기억해야 난 비로소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테니.

 

많은 울림과 슬픔, 그리움을 전해 준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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