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소설 읽는 노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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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들어 처음 읽었던 책이다. 왜 이 책을 선택했는지는 모르겠다. 당장 읽지도 못하면서 책의 유혹에 넘어가 일단 무참히 지르고 마는, 아주 몹쓸 버릇을 가지고 있으니, 이 책 역시 언젠가 강렬한 유혹에 넘어가 구입한 후 고이 모셔두고 있었으리라.

 

지금 돌이켜보면 2013년 1월은 절망과 한숨으로 시작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절망한 많은 이들이 스스로 생을 접는 기가 막힌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지 않았나. 그럼에도 이른 바 주류 언론을 비롯한 권력에 눈이 먼 모리배들은 그 누군가를 찬양하기에만 급급했다. 구역질이 나 티브이나 신문을 거의 보지도 읽지도 않았다.

 

그런 암담한 순간에 왜 이 책을 집었을까. 이 책에서 과연 어떤 희망을 찾고자 했을까.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재앙으로 자연이 무참히 파괴되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으로 나는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작품은 간결하다. 하지만 이 작은 책이 전해주는 울림은 그 어떤 두꺼운 책들보다 강렬하다. 인간이 자연을 외면하고 착취하기만 한다면 결국 공멸을 면치 못한다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여전히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이 책은 때문에 두고두고 고전의 대열에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저자의 언어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혹자는 그의 언어를 “예술적으로 정직한 언어”라 표현하기도 한다.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묘사하는 능력과 여기에 뛰어난 감수성까지 더해져 소설을 읽는 진정한 ‘기쁨’을 전해주고 있다.

 

아마존 밀림의 어느 마을 엘 이딜리오. 이곳은 개발의 붐이 밀고 들어와 원주민과 동물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고 만든 정착촌이다.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들어온 노다지꾼들과 중무장을 하고 들어와 닥치는 대로 사냥을 일삼는 밀렵꾼들이 설치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살고 있는 노인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그 역시 젊은 시절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아내와 함께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하지만 정부의 선전과 다르게 마을은 척박한 황무지와 밀림뿐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결국 병으로 아내를 잃고 삶의 의미마저 잃게 된다. 그러던 중 아마존의 원주민인 수아르족과 함께 생활하며 차츰 그들의 삶과 동화되기 시작한다.

 

그들이 살아가는 방법은 지극히 단순했다.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고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은 때론 무자비하다가도 결국 인간을 보듬어주곤 했다. 그것이 그들의 삶이었고, 호세 역시 이를 따르게 된다.

 

어느 덧 나이가 들어 삶의 마지막 여정을 밟고 있던 그는 나날이 파괴되어 가는 마을을 안타까워하며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1년에 두 번 찾아오는 치과의사가 전해주는 연애 소설을 읽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으며 말이다.

 

하지만 어리석고 잔인한 인간은 자연을 더욱 파괴하고 결국 스스로 비극을 부르고 만다. 밀렵꾼인 양키에게 새끼와 수놈을 잃은 암살쾡이가 인간 사냥에 나선 것이다. 시체는 점점 늘어만 가고, 결국 호세 노인은 그 슬픈 복수를 막기 위해 밀림으로 향한다.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는 싸움을 위해서.

 

최근 어느 방송에서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동물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아나콘다, 식인 물고기, 백상아리 등이 소개되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하지만 정작 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하고도 잔인한 동물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분명하다. 바로 우리들이다.

 

개발은 언제나 아름다운 수식어로 포장된다. 그리고 그 개발로 인해 우리가 얻게 될 찬란한 보상들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로 인해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는 자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지난 MB정권은 국민들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분명히 느끼지 못하는 와중에 온 나라의 강들을 파괴해버렸다. 대운하에서 4대강 정비로 이름만 바꾼 채 말이다. 그 후과가 어떻게 이어질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아니,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재앙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저자의 작품은 선악의 구분이 명확하다. 자칫 현학적인 언어로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악에 대해 강렬한 분노를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악은 당연히 ‘양키’이다. 암살쾡이를 쫓던 호세 노인은 양키에게 총을 맞아 죽어가는 수놈 살쾡이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의 고통을 끝내주며 말한다. “친구, 미안하군. 그 빌어먹을 양키 놈이 우리 모두의 삶을 망쳐 놓고 만 거야.”

 

지금 이 순간 하나 뿐인 지구를, 아름다운 자연을,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수많은 생명들의 삶을 무참히 짓밟고 있는 이들은 누구일까.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진보라는 허명으로, 발전이라는 오만으로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얻으려 하고 있을까. 착취 이외엔 도무지 다른 것을 생각해낼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미개한 종족일까.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들 대신, 오직 아름답고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읽고 또 읽으며 그렇게 삶을 마무리해 가고 있던 호세 노인이 자신의 새끼와 짝을 잃은 암살쾡이와 만났을 때, 과연 어떤 생각을 떠올렸을까. 과연 암살쾡이의 죽음이 누구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작품은 비장하고도 가슴 아프게 마무리된다. 그리고 노인은 다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는 오두막집으로 돌아간다. 그는 자신이 승자라고, 암살쾡이가 패자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더럽고 추악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탐욕과 돈이라는 괴물에게 영원한 저주를 내릴 뿐이다.

 

문명의 발전을 통해 인간은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편안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만큼 인류가 진보했다는, 인류의 삶이 행복해졌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우리가 과거를 살았던 이들보다 더 행복하다는 확신을 누구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지금의 우리는 행복할까?

 

제2의 새마을 운동을 외치며 당선된 지금의 대통령은 마치 아빠가 했던 것처럼만 하면 우리나라 경제가 70년대 발전 속도로 휙휙 살아날 것이라고 느끼는 것 같다. 물론 지금은 자신이 ‘묻지마’ 식으로 뽑은 주위 인물들이나 다시 한 번 잘 살펴야 할 처지지만. 아무튼 그가 만약 ‘아버지의 길’을 따르려 한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나 대통령에게나 그리고 이 강산에도 재앙이 될 것이 빤하다.

 

스테판 에셀이 외쳤던 것처럼 이제 더 이상 ‘지속가능한 성장’을 주문처럼 외쳐선 안 된다. 대신 ‘지탱가능한 성장’을 생각해야 한다. 그게 더 양심적이고, 또 우리의 생존을 보장할 것이다. 결국 이 땅과 강과 바다가 사라진다면 우리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의 속이 빤히 보이는 역겨운 자연보호 캠페인보다는 세풀베다의 감수성과 분노가 그대로 느껴지는 이 작품을 한 번 읽는 것이 백배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지금도 공멸로 가는 기차를 타고 무섭게 절벽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아, 내가 2013년 새해 벽두에 이 책을 읽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방금 떠올랐다. 저자는 칠레의 피노체트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민주화 투사였다. 그리고 나는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그 때, 그러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이 책을 읽어 내려갔다. 아름다운 코미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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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한 사람들에게 - 공감하라! 행동하라! 세상을 바꿔라!
스테판 에셀 지음, 유영미 옮김 / 뜨인돌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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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지구민들은 자신의 행동을 책임져야 합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택이 미래를 좌우하는 투표에서 말입니다.… 한국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힘을 얻기 바랍니다.’

 

이 책이 국내에서 출간된 2012년 10월, 스테판 에셀이 한국 독자들에게 전한 메시지다. ‘지구민’이라는 표현이 유난히 가슴을 때린다. 우리 모두가 지구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과연 지구상에서 학살과 전쟁이 지금처럼 끊임없이 일어날 수 있을까. 모두가 가족, 모두가 ‘우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처럼 세상이 척박하고 정글처럼 두려울까.

 

책을 통해 스테판 에셀은 민주주의, 참여, 인권, 사회복지를 모든 인류의 공통된 요구라 정의한다. 그리고 그것을 존중하지 않는 자는 분노에 직면할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인간이 타인과 자연에 대한 공감으로 이기심을 초월할 수 있다고 믿은 스테판 에셀. 이미 그의 삶 자체가 그것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책은 《분노하라》이후 스테판 에셀의 신념과 가치에 공감해온 세계의 많은 이들에게 던지는 또 다른 메시지다. ‘단지 분노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가 지금 분노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우리들의 삶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그의 외침은 그가 떠난 지금에도 물론 유효하다.

 

우리 국민들은 결코 어리석지 않다. 아니, 이 세상에서 진정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다만 정당한 분노를 애써 외면하거나 참고 있을 뿐이다. 주로 기업인, 정부 조직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학계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 주문처럼 되풀이하는 말이 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이 그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남들이(정확히 말하면 자신들에게 이득을 안겨주는 이들) 노는 꼴을 못 본다.

 

대체 휴일제를 시행하면 경제적 손실이 몇 조 원이니, 정당한 파업에도 국가 경제 전체에 끼치는 손해가 몇 백억 원이니 떠드는 이유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더 중요한 것은 잊고 있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다. 바로 자신들이 스스로 없다고 외치고 있는 그 ‘공짜 점심’을 가장 크게 원하고 있는 이들이 자신들이란 점을.

 

당최 무언지도 모르겠는 ‘신자유주의’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수입한 이후, 우리 사회는 매우 기형적이고 천박한 사고방식의 주입까지 강요받았다. 즉 돈이 많고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이라면 그들이 당연히 ‘훌륭한’ 사람일 것이라는 전혀 근거 없는 믿음 말이다.

 

삼성의 이건희는 단지 삼성가에서 태어나 회장 자리를 얻었다는 이유로 존경받는 CEO로 숭배 받는다. 그 기세는 조만간 역시 한 것이라고는 ‘태어난 것’ 밖에 없는 이재용에게 ‘승계’될 예정이다.

 

이명박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과 17범의 범죄자는 성공한 CEO라는 전혀 근거 없는 이유만으로 대통령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국민들은 고통 받아야 했고, 이 땅과 강, 바다는 더럽혀졌다. 아울러 독재자의 딸은 덤으로 떠안게 되었고 말이다.

 

이러니 잘 나가는 걸그룹의 어린 여자아이는 ‘민주화’의 뜻을 모른다고 자랑스럽게 떠들고, 대기업의 간부부터 영업사원까지 자신보다 경제적 지위가 아래라 여기는 이들을 ‘버러지’라 생각한다.

 

급기야는 미국에 ‘신고 인사’하러 간 대통령을 수행하는 대변인이 현지에서 성추행을 일삼는 코미디까지 연출한다. 그리고는 사과 없이, 반성 없이 억울하다 떠든다. 대통령이란 작자도 사과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이미 자신은 원하는 자리를 얻었으니 더 이상 국민들에게 아쉬울 것이 없으리라.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치열하게 투쟁하거나 단지 착취의 대상으로만 본다면, 그 사회는 아비규환의 지옥이라 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를 천박한 돈의 노예로 만들고,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간다면? 그 사회는 반드시 썩게 된다. 역사는 항상 이를 증명해왔다.

 

그럼 이렇게 썩을 대로 썩어버린 세상을 살고 있는 ‘힘없어 보이는’ 우리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스테판 에셀은 이미 그 답을 제시한 바 있다.

 

“분노하라!”

 

자유와 존엄의 조건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체제에 분노하기도 전에 우리는 새로운 자본의 질서에 의해 분노를 스스로 거세당해 버린 것이다.(홍세화)

 

과연 우리는 ‘분노의 기억’을 잊어버린 것일까? 어찌 보면 가깝게는 해방 후 지금까지 쉴 새 없이 정당한 분노를 통해 세상을 조금씩 바꿔온 것이 바로 우리 아닌가. 그런데 왜 지금 이토록 무력하고, 무능하고, 무지해 보이기만 할까. 무참해 보이기만 할까.

 

스테판 에셀은 “인간은 나비로 변신할 수 있는 애벌레와 비슷하다. 분노하지 않는 한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라는 에드가 모랭의 비유를 인용하며 말한다. 단지 분노하지만 말고 그러한 모든 부조리와 자신의 삶을 결부시키라고. 그렇지 않으면 진정 나비가 될 수 없다고.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이제 더 이상 우리와 함께 호흡할 수는 없지만, 이미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숨결을 남기고 떠난 스테판 에셀. 내 삶과 이웃의 삶, 나아가 모든 지구민의 행복을 옥죄는 부당한 모든 것에 대해 마땅히 분노하고 저항하고 창조하는 것.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살기 위한 호흡과도 같은 것임을 그의 생애를 통해 다시 한 번 느낀다.

 

오스카 와일드가 남긴 말. “세계지도에 유토피아라는 나라가 없다면, 세계지도를 들여다볼 가치가 없다”는 그 말. 가슴에 담고 살아야겠다. 우리는 분명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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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되지 못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 -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시대정신
최상명 지음 / 푸른숲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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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기자 생활을 제법 했다. 비록 이름 있는 큰 곳들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뛰어다닌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석기도 했고, 천지분간 하지 못하고 여기 저기 기웃거리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참여정부 시절, 김근태 의원이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재직할 시기였다. 우연히 보건 분야와 관련이 있는 학술회의 취재를 맡게 되었다. 내 전문 분야도 아니었지만 어찌 하다 보니 발길이 세종로 프레스센터로 향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주로 남북관계․통일문제와 관련이 있는 행사에 많이 얼굴을 내밀고 다녔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요즘은 게으름과 여러 가지 사정으로 드물게 얼굴을 들고 다니긴 하지만.

 

그런데 참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었다. 바로 세미나나 심포지엄, 학술회의 등 행사를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와서 한마디씩 주절거리는 인간들의 얼굴을 봐야 하는 것이었다. 나에겐 따분한 주제의 학술회의보다 그 얼굴들을 보는 것이 더 곤혹일 때가 많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행사의 주최를 맡은 단체의 장이기 때문에, 혹은 제 이름으로 행사를 주최했으니 얼굴은 한 번 내밀어야 예의가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인데, 나는 그것이 그렇게도 보기 싫었다. 때문에 일부러 행사의 시간표를 미리 보고 축사와 격려사 따위가 지날 무렵 행사장을 찾기도 했다. 사실 그렇게 많이 했다.

 

그런데 그 날은 아마도 시간을 잘못 알고 갔던 것 같다. 행사장에 들어서니 원형테이블 중 한 곳에 기자석이라는 카드가 보였고, 자리에 앉았지만 아직 행사는 시작하지 않고 있었다. 그 때 김근태 의원이 행사장에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 그때서야 알았다. 오늘 행사가 보건복지부 주최의 행사였다는 것을.

 

김근태 의원, 아니 장관이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군상들이 파리 꼬이듯 달려들어 악수를 청했다. 모두들 주머니에서 자신의 잘난 이름이 담긴 명함을 꺼내들고 김 장관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얼마나 잘나고, 또한 잘나가는 사람인지 알리기에 바빴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김 장관도 아마 수없이 겪었던 일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일일이 악수를 하고 인사를 건네고 명함을 모두 받았다. 그냥 흘깃 쳐다보다 말았는데, 그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피로감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아무래도 오늘 행사도 잘못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리고는 역시 난 기자 노릇으로 밥 빌어먹기는 글렀다는 생각. 그리고 출세하는 것과도 거리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식 웃었다.

 

그리곤 가방에서 오늘 주제와는 전혀 다른 책 한 권을 꺼내들고 읽기 시작했다. 아직 행사는 시작되지 않았고, 눈치를 봐서 대충 사진 몇 컷 찍고 나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역시나 난 좋은 기자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때 누군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안녕하십니까. 김근태입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하고 인사를 했다. 그가 장관이기 때문에, 또는 김근태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보다 연장자가 먼저 인사를 청하는데 건방지게 앉아서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기자석에 앉아있는 나를 당연히(!) 기자로 알았을 것이고, 때문에 테이블을 돌며 인사를 하던 중에 나에게도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크게 특별하지도 크게 이상하지도 않은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나 역시 별 감흥 없이 인사를 받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행사가 시작되었고, 김근태 장관의 축사가 이어졌다.

 

그런데 참 신기하기도 하지. 이상하게 그의 축사가 전혀 짜증나지 않았다. 비록 오랜 전 일이라 내용까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의 말투와 몸짓 그리고 표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단지 김근태답게 이야기했고, 김근태다운 얼굴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싱겁게도 그날 김근태 장관을 만난 것이 내가 그를 가장 가까이 접해본 유일한 경험이었다. 그 후에도 먼발치에서 그의 모습을 접할 수는 있었지만, 대화를 나누거나 인사를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게 다였다.

 

그리고 그는 미안하지만 내 관심사에서 멀어져 갔다. 내가 맡고 있는 분야는 통일․외교․안보였다. 그와는 크게 관계없다고 생각했던(순전히 나 혼자의 생각) 것이다. 나는 바보 같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시간이 흘렀고, 김근태라는 정치인은 훌쩍 우리 곁을 떠났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어?’라고 생각할 정도로, 믿기지 않게 그는 그렇게 떠났다.

 

그는 이 땅덩어리에서 살아가고 있는 정치인 같지 않았다. 권력에 대한 욕망도 강해보이지 않았다. 누군가와 격렬하게 대결을 펼치거나, 누군가를 격렬하게 비난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짓말을 하거나 핑계를 대는 일에 참으로 서툴렀다. 국회의원, 정치인을 하기엔 영 글러먹은 성품이라는 소리다.

 

하지만 그는 정치인이었고, 민주화를 위해 그야말로 온 몸을 바친 사람이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정치의 변화, 개혁을 위해 노력했지만 보기 좋게 실패했고, 취중 방송출연으로 유명해진 뉴라이트에게 패배해 국회에서도 떠나야 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도 했다.

 

그를 무참히 고문한 이가 나중에 자서전을 냈다. 그리고 자신이 오히려 피해자라 항변했다. 김근태 의원이 겪어야 했던 지옥 같은 시간들이 훗날 영화로도 만들어져 많은 이들을 아프게 했다. 하지만 정작 김근태는 이제 없다.

 

그의 평생의 동지였던 부인이 이제 그를 대신해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리고 역시 그를 대신해 민주화와 진정한 복지 사회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여전히 김근태를 그리워하고 또한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를 잘 모른다. 그가 얼마나 느린 사람이었는지, 얼마나 신중한 사람이었는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자신의 고통을 원한으로 되갚지 않기 위해 얼마나 이를 악 물었는지 감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를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그의 삶, 그의 신념, 그의 눈물까지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2012년을 점령하라는 최후의 외침도 기억하려 한다. 비록 우리는 그의 바람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외침이 그대로 끝난 것도 아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김근태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잘 모르는 이에 대해 평가하는 것만큼 무모하고 무참한 일도 없다. 때문에 이 얇은 책 한 권을 읽었다고 그에 대해 주절거리는 것 역시 주제 넘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참여정부는 실패했다고 외치는 사람들, 노무현은 실패했다고 외치는 사람들 그리고 김근태는 시대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이들 모두, 여전히 무언가를 온전히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이렇게 무참하게 흘러가는 세월을 온전히 노무현, 김근태의 탓으로 돌리는 이들의 그 무모한 편리성이 옳지 않은 것처럼, 그들의 실패, 좌절이 이 땅의 모든 진보와 민중의 실패가 아님을 알기에, 나는 그를 단지 조금 더 오래 기억하려 할 뿐이다.

 

책은 김근태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이의 담담한 이야기다. 김근태의 이야기이고, 인재근의 이야기이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진정한 복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책을 읽고 얼마 있다가 김근태의 평전을 구입했다. 제법 두꺼운 책이니 차근차근 읽어나가야 할 것이다. 그 책을 다 읽었다고 해서 역시 김근태를 온전히 알게 되는 것은 아니리라. 하지만 그저 그렇게 그에게 다시 한 번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인사하고 싶은 마음이다.

 

“안녕하십니까, 장관님” 하고.

 

그를 웃으며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이 언제쯤이면 올까. 그의 묘비에는 “나는 정직과 진실이 이르는 길을 국민과 함께 가고 싶다”고 적혀 있다.

 

그 길을 만드는 데 조약돌 하나라도 보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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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을 찾아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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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 그 자체로 누군가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이들은 극히 드물다. 특히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다고 느낄 정도로 천박해진 지금 이 시대에서야 더 말할 것도 없다.

 

국민의 귀한 세금을 낭비해가며 화려하게 치장하고 온갖 호들갑을 다 떨며 그럴 듯하게 팡파르를 울려도, 진실보다는 돈과 권력에 더 민감하게 촉수를 내밀며 달려드는 언론 장사치들의 용비어천가에 둘러싸여 저 혼자 천둥벌거숭이마냥 뽐내도, 철저히 썩어버린 군상들의 더러움을 감출 수 없듯, 아무런 허세나 속임수 없이도, 다만 살아가는 그 모습 자체로 그윽한 향기를 타인에게 전하는 사람.

 

신영복 선생은 나에겐 그런 더 할 나위 없이 큰 스승이자, 삶의 기준을 보여주시는 분이다. 멘토라는 단어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이라고 해야 할까. 때로 지치고 주저앉아 꺼이꺼이 울어버리고 싶을 때마다, 선생의 삶과 글은 나에게 큰 용기가 되어주곤 했으니, 정작 직접 뵌 것은 단 한 번뿐이라 해도, 어찌 내게 스승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런 선생이 이 땅의 변방들을 찾아 그곳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시대의 문장가일뿐 아니라 서예가로써도 이미 일가를 이룬 선생은 쇠귀체라고도 알려진 글씨로도 유명하다. 서민들의 벗이라 할 수 있는 소주에도 담겨있는 선생의 글씨는 이미 우리들에게도 친근하지 않은가.

 

그런 선생의 글씨가 전국 방방곡곡에 가지가지 사연을 담아 자리 잡고 있는데, 우연일까, 운명일까, 선생의 글씨가 자리 잡은 곳들은 대체적으로 중심이 아닌 변방이었다. 굳이 예외를 두자면 서울시청 시장실에 있는 ‘서울’ 글씨를 꼽을 수 있을까. 하지마 변방은 장소적 특성을 뜻하는 것만이 아님을, 책은 조용히 이야기하고 있다.

 

땅끝마을 해남 송지초등학교 서정분교, 강릉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박달재, 벽초 홍명희 문학비와 생가, 오대산 상원사, 전주 이세종 열사 추모비와 김개남 장군 추모비, 서울시청 시장실 그리고 봉하마을 고 노무현 대통령 묘석까지….

 

변방은 무엇일까. 이 시대 변방은 어디일까, 누구일까 그리고 어떤 것일까.

‘변방을 공간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변방에 대한 오해이다. 누구도 변방이 아닌 사람이 없고, 어떤 곳도 변방이 아닌 곳이 없고, 어떤 문명도 변방에서 시작되지 않은 문명이 없다. 어쩌면 인간의 삶 그 자체가 변방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변방은 다름 아닌 자기 성찰이다.’

 

책을 통해 선생과 함께 변방들을 돌아보며, 동시에 이 시대 변방성, 변방의식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느끼고 있는 중심성은 무엇인가. 우리는 과연 누구를, 어디를 중심에 두고 있는가.

 

선생은 변방의식이 세계와 주체에 대한 통찰이며, 때문에 변방의식은 우리가 갇혀있는 틀을 깨뜨리는 탈문맥이며, 새로운 영토를 찾아가는 탈주 그 자체라 말한다. 그리고 변방성이 없이는 성찰이 불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개인, 집단, 지역, 국가, 문명 모두 다르지 않다.

 

‘스스로를 조감하고 성찰하는 동안에만, 스스로 새로워지고 있는 동안에만 생명을 잃지 않는다. 변화와 소통이 곧 생명의 모습.’

 

내 안의 오만함, 그리고 콤플렉스를 생각한다. 중심부에 대한 열등의식, 허망한 환상과 콤플렉스는 청산하지 못하는 한, 변방은 중심부보다 더욱 완고하고 교조적인 틀에 갇히게 된다는 선생의 호통이 죽비가 되어 어깨를 후려친다.

 

그동안 난 무엇을 내 안에 중심으로 두고, 중심이라 생각하고 살아왔는가. 타인에게 나는 변방이길 바랐는가. 내가 타인을 변방으로 내몰았는가. 난 지금껏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발버둥 쳤는가.

 

선생의 글은 항상 읽는 이에게 창조적 독서를 요구하곤 한다. 이 두껍지 않은 책 역시 다르지 않다. 모두 다르고 동시에 모두 틀리지 않은 ‘독자의 탄생’. 책은 어떤 이에겐 묵직한 느낌을 전해주는 기행문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겐 역사이야기, 정치이야기,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나에겐 아름답고 서러운 이야기이자, 새로운 성찰과 시작을 위한 격려였다.

 

이제 5월이다. 올 5월의 봉하마을은 또 얼마나 아름답고 서러울지. 선생의 자취를 따라 걸어야겠다.

 

스스로 노예가 되지 못해 안달하는 이들. 편을 가르고 증오하고 살육하지 못해 미치는 이들. 오직 제 것만 보이고 남의 것은 보이지 않는 외눈박이들. 지금도 성조기를 흔들고 일장기에 눈치 보며 북을 악마로 만들기에 혈안이 된 이들이 한 번쯤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허망한 바람이겠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변방이라 느끼고 있을까. 얼마나 많은 환상과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을까.

 

노예는 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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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에셀의 참여하라 - 청년 시민운동가와의 대담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이루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태어난 지 아직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아이가 갑자기 아파 병원엘 다녀왔다.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지만 초보 아빠로서는 여간 놀란 것이 아니었다. 아빠의 급한 성격을 그대로 닮은 녀석은 자신의 소화기관이 아직 ‘신생아 사이즈’라는 것을 잊고 모유를 폭풍 흡입했는데, 결국 그것이 사달의 원인이 된 듯싶다.

 

진료를 마치고 집에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기사님은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었다. 일단 그는 나와 아내, 장모님과 아이 등 적지 않은 인원이 차에 타자 그리 밝은 표정을 짓지 않았다. 게다가 병원에서 집은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늦은 밤 갑자기 구토를 하며 자지러지는 아이에 놀라 119구급대를 불렀으니, 당연히 집에서 가장 인접한 병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휴일을 지나 아침 일찍 다시 병원을 찾은 것이었다.

 

기사님은 가까운 목적지를 이야기하자 다시 한 번 얼굴이 굳어졌다. 짜증난 표정이 역력했다. 그리고는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없이, 다만 간혹 주위의 차들에 경적을 울리며 다소 난폭하게 운전을 하셨다. 곤히 자고 있는 아이가 깰까 나와 아내, 장모님은 안절부절 하며 갈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솔직히 내가 예의범절이 바른(!)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때론 맞아가며(!) 배운 것이 두 가지 있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예의를 지킬 것과 역시 타인을 속이지 말 것이었다.

 

어려운 경제에 택시 기사님들의 고충이 적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리고 내가 기사님의 입장이었다 해도, 신이 날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 상당히 억울한 기분이 들었고, 불쾌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켜야만 했다. 나와 아이는 무임승차를 한 것이 아니었다. 기사님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고, 다만 행선지가 가까운 것뿐이었다.

 

자신의 존엄성은 스스로 만든다는 말이 떠올랐다. 자기 직업의 품격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하나, 단지 생물학적 노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해서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마 그 택시기사 역시 자식과 손자․손녀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 열심히 인생을 살아온 사람일 것이다. 나이 지긋한 우리나라의 택시기사님들이 보다 여유를 가지고 일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내 첫 아이가 태어나기 정확히 한 달 전,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분노와 참여, 불의에 대한 저항을 외쳤던, ‘영원한 청년’ 스테판 에셀이 타계했다. 96세라는 나이는 단지 그의 생물학적 노화의 수치였을 뿐, 그는 눈감는 날까지 청년이었고, 레지스탕스였다.

 

아직 살날이 많이 남은 어린 녀석이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며 느낀다. 현명하게, 지혜롭게 늙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자 능력인지를. 스테판 에셀은 나를 비롯한

많은 우생들에게 진정한 ‘어른’이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줬다. 가슴 벅찬 인류애를 평생 실천하고 살아온 노 투사. 인권의 차원을 넘어 자연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그의 호소는 여전히 ‘지속가능한 발전․성장’을 주문처럼 외워대는 우리들에게 매서운 죽비로 다가온다. ‘지탱가능한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어느 누가 반대할 수 있을까? 지구가 존재하지 않는데 무슨 발전과 성장이 가능하단 말인가?

 

일생을 바쳐 신념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잘못된 신념을 고수하며 주변에 해악을 끼치는 것도 문제겠지만 말이다. 젊은 시절 민주주의와 반독재에 나섰던 이들이 수구세력과 결탁해 함께 아름답게 썩어가고, 저항의 시인은 어느새 수구의 들러리가 되었다. 그저 나이를 먹고 과거 어느 정권에서 한 자리 해먹었다는 것을 내세워 시건방을 떨며 사회의 원로 행세를 하기도 한다. 부끄러움과 성찰 따위는 애시당초 뇌 속에 없는 족속들. 자칭 멘토 행세를 하며 젊은이들에게 짐짓 훈계를 늘어놓는 모습을 보면 정말이지 구역질도 아깝다는 생각뿐이다.

 

그럼 우리에겐 온통 이처럼 생물학적 노화차원의 노인 밖에 없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우리 역시 스테판 에셀에 못지않은 ‘괜찮은 노장’들이 많이 계시다. 다만 우리가 무지해 그 분들을 못 볼 뿐이고, 언론 행세하는 장사치, 양아치들이 애써 그 어르신들의 존재를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최근 멘토가 어쩌고, 힐링이 어쩌고 하며 참 많은 이들이 돈을 챙기셨고, 명예를 얻으셨다. 이는 지금까지 한심하게도, 우리 사회에 존경할만한, 배울 만한 이들을 찾기 힘들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언론과 방송에서는 심히 의심스러운 이들이 버젓이 원로를 자처하며 일장 훈계를 하시고, 대통령을 비롯한 그 누구도 절대 본받고 싶지 않은 사람들뿐이다. 진심으로 MB를 존경하는 이가 과연 이 사회에, 아니 지구상에 얼마나 될까? 현 대통령은? 아쉽게도 전직 대통령 중에서도 존경할 만한 이들은 없어 보인다. 있다 하더라도 이미 고인이 되셨거나.

 

난 스테판 에셀을 읽으며 그의 철학과 신념에 공감하면서도, 그의 삶 자체에 더 큰 영감을 받는다. 현명하게, 지혜롭게, 추하지 않게 나이를 먹어가는 것. 그는 나에게 ‘멋지게’ 늙어가는 삶의 롤 모델이다. 그밖에도 하워드 진, 노암 촘스키(살아 계시는 분!), 리영희, 김대중, 노무현, 함세웅 신부(역시 강건하게 활동하시는 분!) 등….

 

아름답고, 지혜롭게, 떳떳하고, 누군가에게 깊은 영감을 주며 살아가다, 그렇게 눈감고 싶다. 많은 이들을 깨우고 떠난 스테판 에셀처럼. 그의 아름다운 삶을 다시 한 번 추모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감사하게 기억할 것이다.

 

잘 가시라! 청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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