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에셀의 참여하라 - 청년 시민운동가와의 대담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이루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태어난 지 아직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아이가 갑자기 아파 병원엘 다녀왔다.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지만 초보 아빠로서는 여간 놀란 것이 아니었다. 아빠의 급한 성격을 그대로 닮은 녀석은 자신의 소화기관이 아직 ‘신생아 사이즈’라는 것을 잊고 모유를 폭풍 흡입했는데, 결국 그것이 사달의 원인이 된 듯싶다.

 

진료를 마치고 집에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기사님은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었다. 일단 그는 나와 아내, 장모님과 아이 등 적지 않은 인원이 차에 타자 그리 밝은 표정을 짓지 않았다. 게다가 병원에서 집은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늦은 밤 갑자기 구토를 하며 자지러지는 아이에 놀라 119구급대를 불렀으니, 당연히 집에서 가장 인접한 병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휴일을 지나 아침 일찍 다시 병원을 찾은 것이었다.

 

기사님은 가까운 목적지를 이야기하자 다시 한 번 얼굴이 굳어졌다. 짜증난 표정이 역력했다. 그리고는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없이, 다만 간혹 주위의 차들에 경적을 울리며 다소 난폭하게 운전을 하셨다. 곤히 자고 있는 아이가 깰까 나와 아내, 장모님은 안절부절 하며 갈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솔직히 내가 예의범절이 바른(!)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때론 맞아가며(!) 배운 것이 두 가지 있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예의를 지킬 것과 역시 타인을 속이지 말 것이었다.

 

어려운 경제에 택시 기사님들의 고충이 적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리고 내가 기사님의 입장이었다 해도, 신이 날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 상당히 억울한 기분이 들었고, 불쾌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켜야만 했다. 나와 아이는 무임승차를 한 것이 아니었다. 기사님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고, 다만 행선지가 가까운 것뿐이었다.

 

자신의 존엄성은 스스로 만든다는 말이 떠올랐다. 자기 직업의 품격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하나, 단지 생물학적 노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해서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마 그 택시기사 역시 자식과 손자․손녀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 열심히 인생을 살아온 사람일 것이다. 나이 지긋한 우리나라의 택시기사님들이 보다 여유를 가지고 일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내 첫 아이가 태어나기 정확히 한 달 전,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분노와 참여, 불의에 대한 저항을 외쳤던, ‘영원한 청년’ 스테판 에셀이 타계했다. 96세라는 나이는 단지 그의 생물학적 노화의 수치였을 뿐, 그는 눈감는 날까지 청년이었고, 레지스탕스였다.

 

아직 살날이 많이 남은 어린 녀석이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며 느낀다. 현명하게, 지혜롭게 늙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자 능력인지를. 스테판 에셀은 나를 비롯한

많은 우생들에게 진정한 ‘어른’이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줬다. 가슴 벅찬 인류애를 평생 실천하고 살아온 노 투사. 인권의 차원을 넘어 자연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그의 호소는 여전히 ‘지속가능한 발전․성장’을 주문처럼 외워대는 우리들에게 매서운 죽비로 다가온다. ‘지탱가능한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어느 누가 반대할 수 있을까? 지구가 존재하지 않는데 무슨 발전과 성장이 가능하단 말인가?

 

일생을 바쳐 신념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잘못된 신념을 고수하며 주변에 해악을 끼치는 것도 문제겠지만 말이다. 젊은 시절 민주주의와 반독재에 나섰던 이들이 수구세력과 결탁해 함께 아름답게 썩어가고, 저항의 시인은 어느새 수구의 들러리가 되었다. 그저 나이를 먹고 과거 어느 정권에서 한 자리 해먹었다는 것을 내세워 시건방을 떨며 사회의 원로 행세를 하기도 한다. 부끄러움과 성찰 따위는 애시당초 뇌 속에 없는 족속들. 자칭 멘토 행세를 하며 젊은이들에게 짐짓 훈계를 늘어놓는 모습을 보면 정말이지 구역질도 아깝다는 생각뿐이다.

 

그럼 우리에겐 온통 이처럼 생물학적 노화차원의 노인 밖에 없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우리 역시 스테판 에셀에 못지않은 ‘괜찮은 노장’들이 많이 계시다. 다만 우리가 무지해 그 분들을 못 볼 뿐이고, 언론 행세하는 장사치, 양아치들이 애써 그 어르신들의 존재를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최근 멘토가 어쩌고, 힐링이 어쩌고 하며 참 많은 이들이 돈을 챙기셨고, 명예를 얻으셨다. 이는 지금까지 한심하게도, 우리 사회에 존경할만한, 배울 만한 이들을 찾기 힘들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언론과 방송에서는 심히 의심스러운 이들이 버젓이 원로를 자처하며 일장 훈계를 하시고, 대통령을 비롯한 그 누구도 절대 본받고 싶지 않은 사람들뿐이다. 진심으로 MB를 존경하는 이가 과연 이 사회에, 아니 지구상에 얼마나 될까? 현 대통령은? 아쉽게도 전직 대통령 중에서도 존경할 만한 이들은 없어 보인다. 있다 하더라도 이미 고인이 되셨거나.

 

난 스테판 에셀을 읽으며 그의 철학과 신념에 공감하면서도, 그의 삶 자체에 더 큰 영감을 받는다. 현명하게, 지혜롭게, 추하지 않게 나이를 먹어가는 것. 그는 나에게 ‘멋지게’ 늙어가는 삶의 롤 모델이다. 그밖에도 하워드 진, 노암 촘스키(살아 계시는 분!), 리영희, 김대중, 노무현, 함세웅 신부(역시 강건하게 활동하시는 분!) 등….

 

아름답고, 지혜롭게, 떳떳하고, 누군가에게 깊은 영감을 주며 살아가다, 그렇게 눈감고 싶다. 많은 이들을 깨우고 떠난 스테판 에셀처럼. 그의 아름다운 삶을 다시 한 번 추모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감사하게 기억할 것이다.

 

잘 가시라! 청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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