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소설 읽는 노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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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들어 처음 읽었던 책이다. 왜 이 책을 선택했는지는 모르겠다. 당장 읽지도 못하면서 책의 유혹에 넘어가 일단 무참히 지르고 마는, 아주 몹쓸 버릇을 가지고 있으니, 이 책 역시 언젠가 강렬한 유혹에 넘어가 구입한 후 고이 모셔두고 있었으리라.

 

지금 돌이켜보면 2013년 1월은 절망과 한숨으로 시작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절망한 많은 이들이 스스로 생을 접는 기가 막힌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지 않았나. 그럼에도 이른 바 주류 언론을 비롯한 권력에 눈이 먼 모리배들은 그 누군가를 찬양하기에만 급급했다. 구역질이 나 티브이나 신문을 거의 보지도 읽지도 않았다.

 

그런 암담한 순간에 왜 이 책을 집었을까. 이 책에서 과연 어떤 희망을 찾고자 했을까.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재앙으로 자연이 무참히 파괴되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으로 나는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작품은 간결하다. 하지만 이 작은 책이 전해주는 울림은 그 어떤 두꺼운 책들보다 강렬하다. 인간이 자연을 외면하고 착취하기만 한다면 결국 공멸을 면치 못한다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여전히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이 책은 때문에 두고두고 고전의 대열에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저자의 언어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혹자는 그의 언어를 “예술적으로 정직한 언어”라 표현하기도 한다.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묘사하는 능력과 여기에 뛰어난 감수성까지 더해져 소설을 읽는 진정한 ‘기쁨’을 전해주고 있다.

 

아마존 밀림의 어느 마을 엘 이딜리오. 이곳은 개발의 붐이 밀고 들어와 원주민과 동물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고 만든 정착촌이다.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들어온 노다지꾼들과 중무장을 하고 들어와 닥치는 대로 사냥을 일삼는 밀렵꾼들이 설치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살고 있는 노인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그 역시 젊은 시절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아내와 함께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하지만 정부의 선전과 다르게 마을은 척박한 황무지와 밀림뿐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결국 병으로 아내를 잃고 삶의 의미마저 잃게 된다. 그러던 중 아마존의 원주민인 수아르족과 함께 생활하며 차츰 그들의 삶과 동화되기 시작한다.

 

그들이 살아가는 방법은 지극히 단순했다.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고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은 때론 무자비하다가도 결국 인간을 보듬어주곤 했다. 그것이 그들의 삶이었고, 호세 역시 이를 따르게 된다.

 

어느 덧 나이가 들어 삶의 마지막 여정을 밟고 있던 그는 나날이 파괴되어 가는 마을을 안타까워하며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1년에 두 번 찾아오는 치과의사가 전해주는 연애 소설을 읽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으며 말이다.

 

하지만 어리석고 잔인한 인간은 자연을 더욱 파괴하고 결국 스스로 비극을 부르고 만다. 밀렵꾼인 양키에게 새끼와 수놈을 잃은 암살쾡이가 인간 사냥에 나선 것이다. 시체는 점점 늘어만 가고, 결국 호세 노인은 그 슬픈 복수를 막기 위해 밀림으로 향한다.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는 싸움을 위해서.

 

최근 어느 방송에서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동물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아나콘다, 식인 물고기, 백상아리 등이 소개되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하지만 정작 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하고도 잔인한 동물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분명하다. 바로 우리들이다.

 

개발은 언제나 아름다운 수식어로 포장된다. 그리고 그 개발로 인해 우리가 얻게 될 찬란한 보상들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로 인해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는 자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지난 MB정권은 국민들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분명히 느끼지 못하는 와중에 온 나라의 강들을 파괴해버렸다. 대운하에서 4대강 정비로 이름만 바꾼 채 말이다. 그 후과가 어떻게 이어질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아니,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재앙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저자의 작품은 선악의 구분이 명확하다. 자칫 현학적인 언어로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악에 대해 강렬한 분노를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악은 당연히 ‘양키’이다. 암살쾡이를 쫓던 호세 노인은 양키에게 총을 맞아 죽어가는 수놈 살쾡이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의 고통을 끝내주며 말한다. “친구, 미안하군. 그 빌어먹을 양키 놈이 우리 모두의 삶을 망쳐 놓고 만 거야.”

 

지금 이 순간 하나 뿐인 지구를, 아름다운 자연을,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수많은 생명들의 삶을 무참히 짓밟고 있는 이들은 누구일까.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진보라는 허명으로, 발전이라는 오만으로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얻으려 하고 있을까. 착취 이외엔 도무지 다른 것을 생각해낼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미개한 종족일까.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들 대신, 오직 아름답고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읽고 또 읽으며 그렇게 삶을 마무리해 가고 있던 호세 노인이 자신의 새끼와 짝을 잃은 암살쾡이와 만났을 때, 과연 어떤 생각을 떠올렸을까. 과연 암살쾡이의 죽음이 누구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작품은 비장하고도 가슴 아프게 마무리된다. 그리고 노인은 다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는 오두막집으로 돌아간다. 그는 자신이 승자라고, 암살쾡이가 패자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더럽고 추악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탐욕과 돈이라는 괴물에게 영원한 저주를 내릴 뿐이다.

 

문명의 발전을 통해 인간은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편안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만큼 인류가 진보했다는, 인류의 삶이 행복해졌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우리가 과거를 살았던 이들보다 더 행복하다는 확신을 누구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지금의 우리는 행복할까?

 

제2의 새마을 운동을 외치며 당선된 지금의 대통령은 마치 아빠가 했던 것처럼만 하면 우리나라 경제가 70년대 발전 속도로 휙휙 살아날 것이라고 느끼는 것 같다. 물론 지금은 자신이 ‘묻지마’ 식으로 뽑은 주위 인물들이나 다시 한 번 잘 살펴야 할 처지지만. 아무튼 그가 만약 ‘아버지의 길’을 따르려 한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나 대통령에게나 그리고 이 강산에도 재앙이 될 것이 빤하다.

 

스테판 에셀이 외쳤던 것처럼 이제 더 이상 ‘지속가능한 성장’을 주문처럼 외쳐선 안 된다. 대신 ‘지탱가능한 성장’을 생각해야 한다. 그게 더 양심적이고, 또 우리의 생존을 보장할 것이다. 결국 이 땅과 강과 바다가 사라진다면 우리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의 속이 빤히 보이는 역겨운 자연보호 캠페인보다는 세풀베다의 감수성과 분노가 그대로 느껴지는 이 작품을 한 번 읽는 것이 백배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지금도 공멸로 가는 기차를 타고 무섭게 절벽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아, 내가 2013년 새해 벽두에 이 책을 읽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방금 떠올랐다. 저자는 칠레의 피노체트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민주화 투사였다. 그리고 나는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그 때, 그러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이 책을 읽어 내려갔다. 아름다운 코미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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