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소녀들
안드레아스 빙켈만 지음, 서유리 옮김 / 뿔(웅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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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더위에는 역시 공포영화나 서늘한 스릴러 소설이 제격이다. 정말 상투적인 표현이다만 ‘손에 땀을 쥐는(실제 책을 읽으며 쥐어 본 적은 거의 없다)’ 스토리 전개는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만든다. 뭐, 그렇다.

 

이 작품 이후 《백설공주에 죽음을》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넬레 노이하우스의 〈타우누스〉시리즈를 읽게 된다. 독일 작가의 스릴러 작품은 좀처럼 접한 적이 없었는데, 《사라진 소녀들》이 어떤 계기를 만들어 준 것만은 틀림없는 듯.

 

이 작품을 시작으로 몇 권의 독일 스릴러물을 읽은 느낌은, 일단 현실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미국 작가들의 작품들은 아무리 소설이라 해도 조금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스토리 전개나 배경 등에서 허황된 것이 많았는데, 독일 작품들은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이야기들을 가지고 사건을 만들어낸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폭발적인 재미랄까, 혹은 스케일의 면에서의 재미는 조금 덜 한 것이 사실이다. 조금은 아기자기하다. 하지만 나만 그런지는 몰라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허황된 ‘구라’에는 좀처럼 감정이입이 힘들다. 에혀, 늙었나.

 

이 작품 역시 소녀의 유괴라는 비교적 평범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물론 눈이 보이지 않는 장애 소녀라는 점이 조금 독특하긴 하지만. 10년 전 여동생 ‘지나’가 실종된 이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살아온 오빠 막스 웅게마흐는 세계적인 복싱 선수로 성공했지만, 여전히 여동생의 부재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그리고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받았던 무관심과 학대 역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10년 전 지나의 실종사건과 흡사한 형태로 다시 어린 소녀가 사라진다. 그 소녀 역시 눈이 보이지 않는 장애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뚝심과 열정을 함께 가지고 있는 여형사 프란체스카는 유사 범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막스를 만나 지나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막스 또한 소녀의 유괴 사건에 관여하게 된다. 마치 이 범인을 잡게 되면 10년 전 실종된 여동생을 찾을 수 있을 것처럼.

 

어린 여자아이에게서 성욕을 느끼는 변태 자식들은 스릴러물이나 수사물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캐릭터다. 이런 놈들 중에는 실제 성행위를 하지 않더라도 단지 피해자를 감금하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욕망을 채울 수 있는 놈들이 있다. 역겹기는 매 한 가지다.

 

아무리 범인들의 추악한 범죄가, 개인의 불우한 성장과정이나 혹은 갑작스런 충격 등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가정해도,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겐 그것이 별로 중요치 않을 것이다. 그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과 공포는 이미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범인을 잡으려는 여형사와, 사라진 여동생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으로 독자적인 방법으로 범인을 찾아나서는 오빠 막스의 각기 다르지만 같은 노력은 결국 범인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서게 되고, 끝내 밝혀지는 범인의 실체 또한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세상에 가장 약한 것이 인간이고, 가장 강한 것이 또한 인간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장면이다.

 

가끔씩 잊을 만하면 어린 아이의 유괴사건이 뉴스를 장식한다. 그리고 대부분 끔찍하고 안타까운 결말로 이어진다. 그럴 때마다 정부와 언론들은 사형제도의 부활을 부르짖고, 여기에 여론도 휩쓸려 한바탕 광기의 축제가 벌어진다. 물론 그 어떤 축제도 이미 숨진 아이들을 되살리지는 못한다.

 

유아 유괴는 끔찍한 범죄다. 물론 모든 유괴 행위가 범죄임에는 틀림없지만, 보호를 받아야 할 어린 아이들이 도리어 범죄의 희생자가 되는 것은 특히 더 치명적인 상처를 우리들에게 안겨준다. 그리고 그 상처와 아픔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2007년 우리 곁을 떠난 혜진이와 예슬이를 기억한다. 그리고 기억해야만 한다.

 

이런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호들갑을 떨고, 마치 자기들이 아이들에게 극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유세를 부리는 것들을 보면 역겨움이 솟구친다. 저소득층 자녀들, 다문화 아이들, 탈북 청소년들을 위해 정부가 지금까지 기울인 노력이 단 한 개라도 있었다면 그것은 온전히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덕분이다. 그 아이들의 피눈물 나는 죽음으로 간신히 얻어낸 것들이라는 소리다. 평소 가난한 아이들에게, 소외받는 아이들에게 우리 사회가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고 사랑했다면, 끔찍한 유괴와 아이들의 가슴 아픈 죽음은 지금보다 훨씬 더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모든 범죄자들이 처음부터 악마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가난하고 아무런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자라나는 수많은 아이들 중에서 또 다른 악마가 만들어지고, 그들이 또 다른 끔찍한 일들을 벌이지 않도록, 우리는 이 잘못되고 비틀어진 세상을 똑바로 세워나가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온전히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이 땅에 태어난 우리의 소중한 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자식들이자, 우리의 보물들이다. 돈이 없다고, 부모가 가난하다고, 또는 부모의 피부색이 다르다고 차별받거나 보호 받지 못하면 안 된다. 그런 사회는 병든 사회이고, 또 다른 유괴범, 또 다른 혜진이와 예슬이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사라진 소녀들》에서 밝혀진 범인 역시 과거 불우한 성장 과정을 통해 삐뚤어진 자아관과 이성관을 갖게 된다. 그리고 결국 부모마저 살해하는 악마가 되고 만다. 우리 사회가 지금 이 순간, 황금에 눈이 어두워, 소중한 아이들을 악마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세심히 살펴야 한다. 이 세상은 악마가 자라날 여지가 너무나 많지 않은가.

 

몇 년 전 설문조사에서 10억을 벌 수 있으면 감옥에 10년 동안 갇혀도 좋다고 응답한 우리 학생들의 비율이 매우 높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런 사회라면 앞으로 더 끔찍한 일들이 멈추지 않고 발생할 수밖에 없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는 어른들이 되어야겠다. 그리고 그런 당당하고도 인간다운 교육을 할 수 있는 어른들이 되어야겠다.

 

《사라진 소녀들》은 가족을 지키지 못한 이의 슬픔과 분노가 잘 표현되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하지만 단지 피를 나누었다고 가족은 아닐 것이다. 이 땅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모두가 가족이다. 우리는 함께 행복하고 함께 웃어야 한다. 모든 아이들이 활짝 웃을 수 있는 세상이 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다. 우리 딸도 포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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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조절구역
츠츠이 야스타카 지음, 장점숙 옮김 / 북스토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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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느 소설가의 글에서 “노인 한 명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문장을 읽은 기억이 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따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지 않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살아온 이들에겐 그 어떤 첨단 기술과 높은 수준의 지식으로도 갈음할 수 없는 지혜와 경험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러한 지혜와 경륜 그리고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존경과 권위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능률과 속도, 눈에 보이는 하찮은 성과만을 중시하는 비인간적 사회 시스템은 노인을 다만 처치 곤란한 ‘밥벌레’ 따위로 간주하려 한다. 무례하고 참을 수 없는 망발임에 분명하지만, 이미 우리 사회는 그러한 망발과 폭언, 무시와 억압을 일상적으로 자행하고 있지 않나.

 

매년 약 1만 5천여 명의 생명이 스스로 삶을 포기한다. 매일 마흔 명이 넘는 이들이 스스로 생을 접는 것이다. 전쟁과도 같은 세상이다. 아니, 사는 것 자체가 전쟁이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하나 둘 생을 포기하지만, 이를 사회적인 문제, 공동체 전체가 고민하고 풀어야 할 문제라고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도 자살을 단지 나약한 멘틀을 가진 소수의 문제로 치부하는 무지하고 간악한 정치인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더 충격인 것은 이러한 자살자 중 65세 이상 노인의 자살률이 무려 25%를 넘는다는 사실이다. 전쟁과 가난, 독재의 폭압을 견디며, 오직 자식새끼들을 먹여 살리느라 평생을 고생한 노인들이 왜 이리 허망하게 삶을 접는 것일까. 물론, 우리들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이 스스로 죽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들을 낭떠러지로 몰고 있다는 것을.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 ‘파프리카’의 원작자인 츠츠이 야스타카가 “나도 나이를 70세 이상 먹은 다음에야 쓸 수 있었다”고 말한 이 작품은, 그야말로 우리사회가 모른 척 외면해온 문제를 정면으로 들이댄다. ‘급속한 노령화 사회’ ‘노령화 문제’라는 단어들을 남발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노인들의 ‘존재 자체’를 죄악시하는 사회. 그렇다면 해답은 무엇인가? 결국 이들이 죽어야 한다는 것일까.

 

작품은 노령화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근원부터 따라가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노년층 각자의 ‘자력갱생’에 맡기거나, 시간이라는 방패막으로 막으려 하는 국가에 대한 분노를 담고 있다.

 

누구나 늙고 병들고 결국 죽는다. 어느 누구도 예외란 없다. 그렇다면 이들이 최소한 행복하게, 이유 없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국가와 정부의 최소한의 역할이자 책임이다. 그런 것을 하라고 정부를 구성하고 그들에게 국민의 권력을 맡기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급속한 노령화 사회 진입에 있어, 실질적인 해법이나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선거 때마다 노인들을 위한 복지 확충을 약속하지만, 이번 정부에서도 알 수 있듯, 선거가 끝나면 공약도, 노인들의 삶도 폐기처분된다. 그들은 다만 거수기 역할만 하면 족한 것이다.

 

작품의 배경은 당연히 일본이다. 고령화 시대로 극심한 경제적 위기에 몰린 일본 정부는, 중앙인구조절기구라는 기관을 만들고, 노인 인구의 증가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려 한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무시무시하게도 실버 배틀, 즉 노인 상호처형제도의 실행이다.

 

70세 이상의 노인들에 한해 지정된 지구 내의 노인들은 인구에 상관없이 오직 한 사람만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여야 한다. 정부가 정한 기한 내에 두 명 이상의 노인이 생존한다면, 중앙인구조절기구에서 파견된 공무집행자에 의해 모두 처형된다. 해외 도피나 이사는 물론 허용되지 않으며, 노인 외의 사람은 살해할 수 없다. 이제 어제까지 친구이자 동료였던 노인들은 살기 위해 서로를 죽이고 또 죽는 지옥에 뛰어들어야 한다.

 

블랙코미디라는 표현이 이렇게 강하게 다가오는 작품도 드물지 않을까. 서로가 치밀한 작전 하에 때론 협력하고 때론 혼자서, 같은 연배의 노인들을 하나 둘 살해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참혹함 그 자체다. 때로는 이 지옥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때로는 도망치려 하지만, 결론은 오직 죽음뿐이다. 내가 살려면 무조건 죽여야 한다.

 

과연 인간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을까? 그리고 어디까지 오만해 질 수 있을까? 인류의 역사를 대충이라도 돌아보면 인간이란 동물의 잔악성과 오만은 그 끝을 알 수 없어 보인다. 자연에 대한 경시와 착취는 그대로 지구상에 함께 살고 있는 동물과 식물에게 이어지고, 결국 같은 종인 인간에게 향한다. 우리는 행복과 자존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또한 가치도 없는 이익과, 역시 풍요라는 이름으로 덧칠해진 과잉생산과 과소비에 물들어 서로를 죽이고, 스스로 죽어간다. 이 지옥의 끝은 어디일까.

 

지금의 노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원금 몇 푼을 올리거나 의료혜택을 확대하는 것 따위로는 부족하다. 노인은 늘어나고 아이들은 줄어드는 현실. 결혼은 줄어들고 이혼은 급증하는 현실의 근본적인 원인을 살펴야 한다. 그것은 결국 인간이 최소한의 자존감을 느끼며, 최소한의 생존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 복지의 확대와 안정화는 그 시작일 뿐이다.

 

노인들이 스스로를 잉여인간이라 느끼게 만들고, 결국 생을 끝내게 만드는 것은 사회적 손실이라는 비정한 표현에 앞서, 엄연한 살인이자 학대다. 노인을 학대하고 아이들을 학대하고 착취하는 세상은 오직 멸망만이 기다릴 뿐이다.

 

츠츠이 야스타카가 그려낸 지옥은 물론 소설 속 허구의 세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지옥을 향해 하염없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고 있다. 종로3가 지하철역 안에서 하릴없이 서성이는 수많은 노인들, 파고다 공원에 앉아 하루 종일 삶의 의미를 찾으려 발버둥치는 노인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누명과 오욕과 불명예를 안기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들을 죽어가게 만들고 있는지 깨달아야 한다.

 

노인들은 이 비정상적인 세상 속에서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아온 이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없었다면 당연히 지금의 우리들도 없다. 공경이나 존경은 둘째 치고 일단, 그들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빌어먹을 정치인들이나 국가,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책임과 임무를 방기하지 말라. 더 이상.

 

우울하고 때론 기가 막히는 장면들이 적지 않지만, 한 번쯤 양심에 콕콕 찔려가며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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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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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 생명의 계급이란 것이 존재할까? 누구의 생명은 한없이 소중하고, 또 다른 이들의 생명은 하찮은 것일까? 과연 그러한 기준이 있다면 그딴 것은 어느 잡놈이 만들었고, 또 어떤 정신 나간 놈들이 따르고 있을까. 누군가를 잃은 슬픔에도 등급이 있을까.

 

확실히 독특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이 작품은 2001년 9․11테러로 인해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은 영민한 아이 ‘오스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오스카는 눈물겹게 때론 아이다운 순수함으로 상처를 극복하고 그리움을 이겨내고 또한 타인들의 상처에 다가간다.

 

저자는 9․11테러를 스스로 평가하지 않는다. 미국이 저지른 그 수많은 죄악들로 인해, 애꿎게 숨져간 이들을 거론하지도 않는다. 다만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 앞에 한없이 나약하고 무기력한 ‘우리’들의 상처를 쳐다볼 뿐이다.

 

그러한 저자의 접근에 불만은 없다. 저자는 온전히 인간에 주목하고 있으니까. 미국인이냐, 이라크인이냐, 혹은 한국인이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민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니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와 달리 난 따져야겠다. 왜 우리는 9․11에 그다지도 충격을 받았을까. 왜 전 세계가 9․11에 충격을 받았을까. 그리고 도대체 왜 9․11로 희생된 미국인들보다 이후 몇 십 배, 몇 백배, 몇 천배에 이르는 이들이 아무런 죄 없이 숨져갔다는 사실에는 충격을 받지 않을까. 난 따져야겠다.

 

그 잘난 신자유주의의 광풍으로 더 이상 ‘국경’이 무의미하고, 국적 또한 쉽사리 바꾸며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좋게 말하면 경제, 솔직히 말하면 초대형 다국적 기업들과 ‘전 지구적인’ 착취만 자유로울 뿐,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유’란 애시 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따져 물어야겠다.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슬픔에 등급을 매기고, 생명에 경중을 따지고, 소통과 어울림마저 자기 계산에 맞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오스카는 아버지를 잃은 충격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자물쇠’를 찾기 위해 모험을 감행한다. 깜찍하고 귀여운 아이 오스카는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결국 우리 모두는 무언가를 잃어가며 살아간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아니, 오스카의 여정을 통해 바로 우리들이 그것을 깨닫게 된다. 상실의 아픔, 그리고 치유를 위한 소통과 또 다른 만남.

 

많은 사진과 독특한 타이포그래피를 통해 활자 밖 더 풍부한 체험을 이끌어낸 상상력과 기발함은 독자들의 감탄과 찬사로 저자의 실험이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독자들은 오스카와 오스카의 할아버지가 겪어야 했던 단절과 상실에 아파하고, 할아버지와는 다르게 소통과 공감 그리고 자신 만의 용기로 상처를 극복해가는 오스카를 사랑하게 된다. 결국 매일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우리는 매일 누군가를 만나야 하고 나눠야 한다. 나누어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순하고 무지한 나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죄 없이 죽어간 9․11테러의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만큼 이라크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죽어간 수많은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아파하고 기억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리고 그와 같은 비극을 만들어낸 미국을 비롯한 추악한 자본 권력들에게 먼저 그 죄를 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명과 사랑에는 그 어떤 계급도 존재하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옮긴이는 이 작품이 주는 메시지가 “인간의 나약함을 향한 연민이며 궁극적으로는 무시무시한 운명에 대한 투쟁일 수밖에 없는 인생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운명에 맞서 싸우고 또 싸우다 그렇게 스러져가는 존재일 것이다. 그 투쟁이 타인과의 소통과 공감으로 덜 아프고 덜 힘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점점 대한민국이 무섭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얌전해 보일 정도로, 두려운 세상이다. 더구나 힘없는 이들, 가난한 이들에게 이번 겨울은 또 얼마나 혹독할 것인가. 우리의 운명은 또 얼마나 눈물겨울 것인가. 또 다시 노동자의 죽음이 전해진다. 해고는 살인이라는 말이, 얼마나 지독한 현실인지, 얼마나 잔인한 공식인지, 또 한 명의 노동자가 죽음으로 보여준다.

 

이 거지같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인간들, 그 자체가 오염이자 죄악이 아닐까. 아름다운 소설을 읽으면서도 자꾸만 자꾸만 이라크 아이들의 주검이 눈에 밟혔다. 아프간 아이들의 피울음이 밟혔다. 그리고 경제 순위 세계 10위권이라고 자랑하는 이 땅에 잠시 셋방 얻어 들어왔다, 쫓겨나듯 숨져간 이들의 눈물이 밟혔다.

 

무력함이 넘치면 나중에는 스스로를 갉아먹게 되는 것 아닌가 싶다. 살기 위해서는 더욱 독하게 연대하고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스카의 상처가 아물 때쯤, 지구상 어디에선가, 그리고 대한민국 어디에선가 눈물을 닦고 있을 우리들의 또 다른 오스카들도 부디 덜 아팠으면 좋겠다.

 

정리해고에 내몰렸던 또 한 명의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너무 추워 이가 덜덜 떨린다. 이가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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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숫가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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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장르의 문학이라 하더라도, 현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SF가 되었든, 미스터리 스릴러가 되었든 말이다. 아무리 허무맹랑해 보이고, 현실에서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결국 그것들은 현실이라는 밑절미를 가지고 태어날 수밖에 없다. 태초 이래 새로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미스터리 스릴러물이야 더 말할 것도 없겠다. 대부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서 벌어질 법한, 혹은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곤 한다. 물론 때로는 끔찍한 연쇄살인이나 엽기적인 살인 행각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미 우리 삶은 소설보다 100배는 더 엽기적이지 않은가!

 

참 글을 재미있고 실감 있게 쓴다고 생각해 온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 작품 역시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고민 중 하나를 꼬집어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바로 교육이다. 그것도 우리 사회를 파멸의 길로 몰아넣고 있는 입시경쟁.

 

주인공 순스케는 재혼한 부인의 아들, 즉 의붓아들인 쇼타의 합숙과외에 참석하기 위해 한적한 지방의 호숫가로 찾아간다. 그 곳엔 부인인 미나코와 함께 세 가족이 이미 도착해 자녀들의 합숙과외에 동참하고 있었다.

 

이 네 가족들의 아이들은 대입을 앞둔 고교생인 아닌 초등학생들이다. 명문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우리로 치자면 족집게 강사를 초빙해 합숙해가며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다.

 

하지만 뒤늦게 온 순스케를 불륜 관계의 내연녀 에리코가 찾아오고, 상황은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져가기만 하는데….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살인사건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두둥~! ……음.

 

죽을 때까지 경제적 걱정이 없는 1%들에게 자녀의 교육 문제는 단지 조금 귀찮고, 조금 신경 써야 할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다수 99%에게 자녀 교육, 특히 입시 문제는 그야말로 집안을 통째로 흔들리게 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문제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부모들은 오직 돈 만이 생존의 목표가 되어버린 비정한 세상 속에서 자기 자식만큼은 낙오되지 않도록, 그야말로 교육에 올 인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 교육이 그나마 가장 확실한 안전판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일본의 치열한 입시전쟁을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모든 이들이 인정하듯, 그러한 비정상적인 입시전쟁은 더 이상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역시 명문 대학을 가기 위한 과정으로 명문 중고교, 명문 초등학교에서 명문 유치원까지 그 연령대가 내려간 지 오래다.

 

도저히 제정신이라고는 할 수 없는 기형적인 현상들이 ‘주류’가 된지 오래라는 소리. 하지만 그런 강압적인 그리고 무의미한 교육 열풍이 낳은 결과는 무얼까. 그것은 매년 약 300명 정도 학생들의 자살이다. 그리고 해마다 5만에서 8만 명이나 되는 학생들의 탈학생화다. 스스로 학교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른 바 사회와 기업이 요구하는 스펙이 없으면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사회. 그런 사회를 과연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조차 회의감이 들지만, 아무튼 우린 이미 그런 미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한일관계가 여기에서만큼은 환상의 콤비가 되는 순간이다. 하긴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어느 나라라고 여기로부터 100%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인간을 인간이 아닌 소모품, 상품으로 등급을 매기는 작태 말이다.

 

이 작품에서는 이러한 교육 문제와 함께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가족 간의 유대와 믿음에 대한 메시지도 담겨있다. 스와핑이라는 다소 파격적인 소재까지 자유자재로 삽입하며, 저자는 이 시대 일본의 자화상을 씁쓸하게 고백한다.

 

물론 작품은 소설이다. 하지만 독자들은 이것이 100% 허구가 아님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도 역시 우리가 도망칠 곳은 없어 보인다. 우리는 시간적 차이만 있을 뿐, 그렇게도 미워하는 일본이 걸어온 길을 차근차근 따라가고 있다. 한심할 뿐.

 

저자는 어찌 보면 스릴러 장르에서 매우 식상할 수도 있는 입시문제, 가족 붕괴, 불륜 등의 주제를 이용해 또 다른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냈다. 결말 부분에서는 예상 밖의 반전과 함께 갑작스런 감동도 전해준다. “앗! 이게 뭐야?”가 절로 튀어나오는. 역시 히가시노!

 

아울러 살인사건 이후 전개되는 네 가족의 심리 묘사와 대화, 행동의 표현이 탁월하다. 덧붙여 결말 부분의 히가시노 다운 여운과 감동까지. 2004년에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하니, 기회가 된다면 한 번 감상해야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교육 문제에 있어, 부모들은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이 이렇게 하니, 어느 수준까지는 따라가야 하는 것 아닌가!” 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수준의 끝은 없을 것이며, 또한 정해진 룰, 어쩔 수 없는 현실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은, 때문에 너무도 슬픈 변명이다.

 

추리소설의 재미를 흠뻑 느끼면서도, 한 편으로는 일본과 우리의 ‘슬픈 동질성’을 확인하는 색다른 경험이기도 했다.

 

하지만 솔직히. 벌써부터 내 딸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다. 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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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인자를 사냥한다 판타스틱 픽션 그레이 Gray 1
배리 리가 지음, 권도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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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좋아라 해서 한동안 열심히 챙겨 보았던 미드(미국 드라마) 중 ‘덱스터’가 있다. 태어나기를 요상하게 태어났는지, 암튼 살인본능이 충만하신 주인공 덱스터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본능을 알아챈 의붓아버지로부터 살인 본능을 발산하면서도 절대 들키지 않는(!) 방법들을 배워가며 성인으로 자란다.

 

아버지가 가르쳐준 방법에는 법칙이 있었다. 반드시 죽어야 할(!) 놈들만 찾아내어 죽이는 것. 참 어찌 보면 신의 영역이거나 아님 법과 제도가 해야 할 일이건만, 우리의 주인공 덱스터는 자신이 알아서 대상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다. 그 자신이 신이거나 법인 셈이다.

 

암튼 독특한 상황 설정과 주인공의 천진난만한(!) 연기로 꽤 재미있게 보았던 드라마다. 지금도 시즌이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난 시즌3부터 멈춰있다. 어여 어여 챙겨 봐야지.

 

반면 이 책은 얼핏 덱스터와 비스무리하면서도 살짝 다른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신선하다. 주인공 재스퍼 덴트는 17살의 평범한 소년이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 윌리엄 코르넬리우스 덴트, 일명 빌리 덴트는 21년 동안 세 자리 숫자의 살인을 저지른 21세기 최악의 연쇄살인마였던 것이다. 오호, 통재라.

 

재스퍼는 이런 매우 희귀한(!) 아버지에게 살인의 기술, 살인자들의 특성, 살인을 할 때 명심해야 할 사항들, 절대 잡히지 않는 방법 등을 그야말로 일대 일 집중 학습을 받으며 자란다. 그런 것들을 가르쳐 주는 아버지라니. 뭐, 물론 소설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만약 그런 부모가 있다면, 음… 암튼 비극이겠다.

 

그런 아버지가 끝내 붙잡혀 32번의 종신형을 선고받고 독방에 갇히게 되고 재스퍼는 정신 상태가 오락가락하는 할머니와 단 둘이 살아간다. 그렇다고 그가 아주 불행한 것은 아니다. 아낌없이 서로를 보살펴 주는 친한 친구와 사랑하는 여자 친구도 있으니. 아버지가 사이코패스라 해서 아들까지 불행하다는 법은 없지 않나.

 

하지만 그나마 평온하게 살아가던 재스퍼에게 어느 날 그의 운명을 바꿀 사건이 벌어진다. 조용하고 평화롭기만 한 마을에서 또 다시 연쇄살인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과연 이 연쇄살인의 범인은 누구일까. 그리고 재스퍼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건은 그렇게 시작된다.

 

미국의 워너브라더스가 TV드라마로 제작할 예정이라니, 이 작품이 상당히 큰 반향을 일으킨 것 같기는 하다. 스토리 자체가 워낙 파격적 이다보니 급기야 ‘좀비’ 정도가 나오시지 않으면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미국 시청자들에게도 ‘먹힐 것’ 같다는 판단을 한 것 같다. 뭐, 결과는 나와 봐야 알겠지만.

 

이 작품은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영화나 드라마처럼 장면 하나하나가 그려질 정도로, 실감나는 묘사가 일품이었다. 그리고 후반부에 반전 아닌 반전으로 이른 바 ‘재스퍼 덴트’ 시리즈가 어떻게 이어질 것인지 자못 궁금하게 만들었다. 이 정도면 시리즈의 시작으로는 나쁘지 않다.

 

약간은 스포일러 같지만, 뭐 어차피 작품의 제목 자체가 이미 말해준 것이나 다름없으니 상관없을 것 같다. 재스퍼는 아버지 빌리 덴트가 전수해 준 다양한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또 다른 연쇄 살인자들을 ‘사냥’하려 한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 아님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작품을 읽으며, 또 다시 몹쓸 버릇이 재발함을 느꼈다. 이 책과는 달리 우리의 상황은 어쩐지 부전자전, 아니 부전녀전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주인공 재스퍼 덴트는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는 것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 반대의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그 ‘어떤’ 분은 아닌 것 같다. 닮은 꼴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MB는 시계를 10년 전으로 돌려버렸다는 비판을 재임 기간 내내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시곗바늘이 마치 30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이런 젠장, 복고 열풍이 너무 오래 간다. 우리나라! 도대체 직진은 언제 할 꺼니!

 

예전 검은 선글라스의 아버지는 정부가 불리할 때마다, 자신이 궁지에 몰릴 때마다, 간첩을 제조해내고, 빨갱이를 생산해 위기를 모면했다. 그런데 지금도 그런 일이 버젓이 벌어진다. 부끄러움도 수치스러움도 모른다. 그냥 똑같다. 붕어빵이다. 창조경제를 한다더니, 도대체가 창의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거기에다 권력에 빌붙어 온갖 추악한 짓거리를 하는 양아치들은 어찌 그리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천박하고 비굴한지.

 

난 믿는다. 악이라는 것은 홀로 만들어지지 않고, 또한 계승되는 것이 아님을. 하지만 그런 믿음을 흔들리게 하는 지금이 아닐 수 없다. 솔직히 믿음이 흔들리려 한다. 치밀하게 국민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게, 손발하나 꼼짝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 시스템, 신자유주의와 오만한 권력들의 놀음에 언제까지 국민들이 당해야만 하는지. 무참하기만 할 뿐이다.

 

주인공 재스퍼 덴트는 살인자를 사냥한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먼저 우리 안의 두려움과 비겁함, 온갖 더러운 욕망부터 사냥해야 하지 않을까.

 

나부터 잘하자.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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