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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평점 :
뭇 생명의 계급이란 것이 존재할까? 누구의 생명은 한없이 소중하고, 또 다른 이들의 생명은 하찮은 것일까? 과연 그러한 기준이 있다면 그딴 것은 어느 잡놈이 만들었고, 또 어떤 정신 나간 놈들이 따르고 있을까. 누군가를 잃은 슬픔에도 등급이 있을까.
확실히 독특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이 작품은 2001년 9․11테러로 인해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은 영민한 아이 ‘오스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오스카는 눈물겹게 때론 아이다운 순수함으로 상처를 극복하고 그리움을 이겨내고 또한 타인들의 상처에 다가간다.
저자는 9․11테러를 스스로 평가하지 않는다. 미국이 저지른 그 수많은 죄악들로 인해, 애꿎게 숨져간 이들을 거론하지도 않는다. 다만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 앞에 한없이 나약하고 무기력한 ‘우리’들의 상처를 쳐다볼 뿐이다.
그러한 저자의 접근에 불만은 없다. 저자는 온전히 인간에 주목하고 있으니까. 미국인이냐, 이라크인이냐, 혹은 한국인이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민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니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와 달리 난 따져야겠다. 왜 우리는 9․11에 그다지도 충격을 받았을까. 왜 전 세계가 9․11에 충격을 받았을까. 그리고 도대체 왜 9․11로 희생된 미국인들보다 이후 몇 십 배, 몇 백배, 몇 천배에 이르는 이들이 아무런 죄 없이 숨져갔다는 사실에는 충격을 받지 않을까. 난 따져야겠다.
그 잘난 신자유주의의 광풍으로 더 이상 ‘국경’이 무의미하고, 국적 또한 쉽사리 바꾸며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좋게 말하면 경제, 솔직히 말하면 초대형 다국적 기업들과 ‘전 지구적인’ 착취만 자유로울 뿐,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유’란 애시 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따져 물어야겠다.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슬픔에 등급을 매기고, 생명에 경중을 따지고, 소통과 어울림마저 자기 계산에 맞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오스카는 아버지를 잃은 충격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자물쇠’를 찾기 위해 모험을 감행한다. 깜찍하고 귀여운 아이 오스카는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결국 우리 모두는 무언가를 잃어가며 살아간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아니, 오스카의 여정을 통해 바로 우리들이 그것을 깨닫게 된다. 상실의 아픔, 그리고 치유를 위한 소통과 또 다른 만남.
많은 사진과 독특한 타이포그래피를 통해 활자 밖 더 풍부한 체험을 이끌어낸 상상력과 기발함은 독자들의 감탄과 찬사로 저자의 실험이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독자들은 오스카와 오스카의 할아버지가 겪어야 했던 단절과 상실에 아파하고, 할아버지와는 다르게 소통과 공감 그리고 자신 만의 용기로 상처를 극복해가는 오스카를 사랑하게 된다. 결국 매일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우리는 매일 누군가를 만나야 하고 나눠야 한다. 나누어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순하고 무지한 나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죄 없이 죽어간 9․11테러의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만큼 이라크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죽어간 수많은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아파하고 기억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리고 그와 같은 비극을 만들어낸 미국을 비롯한 추악한 자본 권력들에게 먼저 그 죄를 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명과 사랑에는 그 어떤 계급도 존재하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옮긴이는 이 작품이 주는 메시지가 “인간의 나약함을 향한 연민이며 궁극적으로는 무시무시한 운명에 대한 투쟁일 수밖에 없는 인생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운명에 맞서 싸우고 또 싸우다 그렇게 스러져가는 존재일 것이다. 그 투쟁이 타인과의 소통과 공감으로 덜 아프고 덜 힘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점점 대한민국이 무섭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얌전해 보일 정도로, 두려운 세상이다. 더구나 힘없는 이들, 가난한 이들에게 이번 겨울은 또 얼마나 혹독할 것인가. 우리의 운명은 또 얼마나 눈물겨울 것인가. 또 다시 노동자의 죽음이 전해진다. 해고는 살인이라는 말이, 얼마나 지독한 현실인지, 얼마나 잔인한 공식인지, 또 한 명의 노동자가 죽음으로 보여준다.
이 거지같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인간들, 그 자체가 오염이자 죄악이 아닐까. 아름다운 소설을 읽으면서도 자꾸만 자꾸만 이라크 아이들의 주검이 눈에 밟혔다. 아프간 아이들의 피울음이 밟혔다. 그리고 경제 순위 세계 10위권이라고 자랑하는 이 땅에 잠시 셋방 얻어 들어왔다, 쫓겨나듯 숨져간 이들의 눈물이 밟혔다.
무력함이 넘치면 나중에는 스스로를 갉아먹게 되는 것 아닌가 싶다. 살기 위해서는 더욱 독하게 연대하고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스카의 상처가 아물 때쯤, 지구상 어디에선가, 그리고 대한민국 어디에선가 눈물을 닦고 있을 우리들의 또 다른 오스카들도 부디 덜 아팠으면 좋겠다.
정리해고에 내몰렸던 또 한 명의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너무 추워 이가 덜덜 떨린다. 이가 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