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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녀들
안드레아스 빙켈만 지음, 서유리 옮김 / 뿔(웅진)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무더위에는 역시 공포영화나 서늘한 스릴러 소설이 제격이다. 정말 상투적인 표현이다만 ‘손에 땀을 쥐는(실제 책을 읽으며 쥐어 본 적은 거의 없다)’ 스토리 전개는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만든다. 뭐, 그렇다.
이 작품 이후 《백설공주에 죽음을》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넬레 노이하우스의 〈타우누스〉시리즈를 읽게 된다. 독일 작가의 스릴러 작품은 좀처럼 접한 적이 없었는데, 《사라진 소녀들》이 어떤 계기를 만들어 준 것만은 틀림없는 듯.
이 작품을 시작으로 몇 권의 독일 스릴러물을 읽은 느낌은, 일단 현실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미국 작가들의 작품들은 아무리 소설이라 해도 조금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스토리 전개나 배경 등에서 허황된 것이 많았는데, 독일 작품들은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이야기들을 가지고 사건을 만들어낸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폭발적인 재미랄까, 혹은 스케일의 면에서의 재미는 조금 덜 한 것이 사실이다. 조금은 아기자기하다. 하지만 나만 그런지는 몰라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허황된 ‘구라’에는 좀처럼 감정이입이 힘들다. 에혀, 늙었나.
이 작품 역시 소녀의 유괴라는 비교적 평범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물론 눈이 보이지 않는 장애 소녀라는 점이 조금 독특하긴 하지만. 10년 전 여동생 ‘지나’가 실종된 이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살아온 오빠 막스 웅게마흐는 세계적인 복싱 선수로 성공했지만, 여전히 여동생의 부재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그리고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받았던 무관심과 학대 역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10년 전 지나의 실종사건과 흡사한 형태로 다시 어린 소녀가 사라진다. 그 소녀 역시 눈이 보이지 않는 장애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뚝심과 열정을 함께 가지고 있는 여형사 프란체스카는 유사 범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막스를 만나 지나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막스 또한 소녀의 유괴 사건에 관여하게 된다. 마치 이 범인을 잡게 되면 10년 전 실종된 여동생을 찾을 수 있을 것처럼.
어린 여자아이에게서 성욕을 느끼는 변태 자식들은 스릴러물이나 수사물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캐릭터다. 이런 놈들 중에는 실제 성행위를 하지 않더라도 단지 피해자를 감금하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욕망을 채울 수 있는 놈들이 있다. 역겹기는 매 한 가지다.
아무리 범인들의 추악한 범죄가, 개인의 불우한 성장과정이나 혹은 갑작스런 충격 등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가정해도,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겐 그것이 별로 중요치 않을 것이다. 그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과 공포는 이미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범인을 잡으려는 여형사와, 사라진 여동생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으로 독자적인 방법으로 범인을 찾아나서는 오빠 막스의 각기 다르지만 같은 노력은 결국 범인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서게 되고, 끝내 밝혀지는 범인의 실체 또한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세상에 가장 약한 것이 인간이고, 가장 강한 것이 또한 인간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장면이다.
가끔씩 잊을 만하면 어린 아이의 유괴사건이 뉴스를 장식한다. 그리고 대부분 끔찍하고 안타까운 결말로 이어진다. 그럴 때마다 정부와 언론들은 사형제도의 부활을 부르짖고, 여기에 여론도 휩쓸려 한바탕 광기의 축제가 벌어진다. 물론 그 어떤 축제도 이미 숨진 아이들을 되살리지는 못한다.
유아 유괴는 끔찍한 범죄다. 물론 모든 유괴 행위가 범죄임에는 틀림없지만, 보호를 받아야 할 어린 아이들이 도리어 범죄의 희생자가 되는 것은 특히 더 치명적인 상처를 우리들에게 안겨준다. 그리고 그 상처와 아픔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2007년 우리 곁을 떠난 혜진이와 예슬이를 기억한다. 그리고 기억해야만 한다.
이런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호들갑을 떨고, 마치 자기들이 아이들에게 극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유세를 부리는 것들을 보면 역겨움이 솟구친다. 저소득층 자녀들, 다문화 아이들, 탈북 청소년들을 위해 정부가 지금까지 기울인 노력이 단 한 개라도 있었다면 그것은 온전히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덕분이다. 그 아이들의 피눈물 나는 죽음으로 간신히 얻어낸 것들이라는 소리다. 평소 가난한 아이들에게, 소외받는 아이들에게 우리 사회가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고 사랑했다면, 끔찍한 유괴와 아이들의 가슴 아픈 죽음은 지금보다 훨씬 더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모든 범죄자들이 처음부터 악마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가난하고 아무런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자라나는 수많은 아이들 중에서 또 다른 악마가 만들어지고, 그들이 또 다른 끔찍한 일들을 벌이지 않도록, 우리는 이 잘못되고 비틀어진 세상을 똑바로 세워나가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온전히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이 땅에 태어난 우리의 소중한 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자식들이자, 우리의 보물들이다. 돈이 없다고, 부모가 가난하다고, 또는 부모의 피부색이 다르다고 차별받거나 보호 받지 못하면 안 된다. 그런 사회는 병든 사회이고, 또 다른 유괴범, 또 다른 혜진이와 예슬이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사라진 소녀들》에서 밝혀진 범인 역시 과거 불우한 성장 과정을 통해 삐뚤어진 자아관과 이성관을 갖게 된다. 그리고 결국 부모마저 살해하는 악마가 되고 만다. 우리 사회가 지금 이 순간, 황금에 눈이 어두워, 소중한 아이들을 악마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세심히 살펴야 한다. 이 세상은 악마가 자라날 여지가 너무나 많지 않은가.
몇 년 전 설문조사에서 10억을 벌 수 있으면 감옥에 10년 동안 갇혀도 좋다고 응답한 우리 학생들의 비율이 매우 높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런 사회라면 앞으로 더 끔찍한 일들이 멈추지 않고 발생할 수밖에 없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는 어른들이 되어야겠다. 그리고 그런 당당하고도 인간다운 교육을 할 수 있는 어른들이 되어야겠다.
《사라진 소녀들》은 가족을 지키지 못한 이의 슬픔과 분노가 잘 표현되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하지만 단지 피를 나누었다고 가족은 아닐 것이다. 이 땅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모두가 가족이다. 우리는 함께 행복하고 함께 웃어야 한다. 모든 아이들이 활짝 웃을 수 있는 세상이 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다. 우리 딸도 포함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