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간 2008년 5월 24일~5월 27일 / 독서번호 952


정혜신 외 / 한겨레출판 펴냄 (2006년)


제가 모호한 여러 가지 관점들을 얘기했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에 대해서는 모호함을 참고 이리저리 열어놓고 생각하자는 거예요. 사람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닙니다. 모호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사람들을 보면서 깨달은, 완벽하게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 전제를 여러분들한테 말씀드릴께요.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건 오류가 전혀 없다든지 이건 100퍼센트 확신한다고 할 수 없거든요. 그런데 이 말만은 제가 자신 있게 할 수 있어요. “모든 인간은 완벽하게 불완전한 존재다.” 그러니까 쫄지 말자. 열어놓고 보자. 완벽하게 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 것 하나가 저는 이 명제라고 생각해요.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을 열고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생각한다면, 거짓을 좀 더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 드리고 싶네요.
- 정혜신, 38p



결국 과학을 한 측면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에서 이해하고, 그렇게 해서 찾아낸 중요성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를 제기하는 것이 과학사회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반드시 과학사회학자나 그와 연관된 학문을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이제는 과학과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 김동광, 63p


우리 사회에서 과학주의가 반성되지 않는 것도 큰 문제지만, 한편으로 생명에 대한 인식이 너무 기계화되고 분절화되어 있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생명에 대한 인식이 많이 분절화되어 있다는 말은 생명이라는 것을 오로지 개체 중심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중략)
인간이 살아가면서 하루에 의존하는 생물들의 수가 수만 종에 이른다는 분석이 생태학자들에 의해서 나오기도 하는데, 그처럼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거대한 생태계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죠.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자신을, 또 사회와 자연 같은 부분들을 쉽게 분리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 김동광, 77p


그렇지만 줄기세포 연구처럼 국가의 미래가 달려 있는 중요한 주제들에 대해서는 일반 시민들까지 참여시켜서 사회적 합의를 얻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만 다시 똑같은 실수가 되풀이되지 않겠지요. 저는 지금 상태에서 그냥 지나간다면 또 다른 제2, 제3의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지금 아무도 반성하지 않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어떤 제도도 만들지 않고 있는데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또 한 번 왁자하게 떠들다 끝나버리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로서는 그런 부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중략)
분자생물학적인 부분들이 너무 과장돼 있다고도 보는 것이죠. 지금은 마치 분자적 관점을 통해서만 생명을 이해할 수 있다는 식이지만, 그건 하나의 패러다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까 얘기한 생명에 대한 조작적 관점이라든가 등등 많은 것들을 통해서, 그건 하나의 패러다임일 뿐이지 결코 그것이 다른 접근들에 비해서 훨씬 우월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 김동광, 95p


백범 말씀 중에 “천길 벼랑에 올라가는 거야 장부라고 할 수 있느냐. 거기서 자기를 내던지는 게 장부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역사의 격랑 속에서 자기가 믿던 가치를 버리지 않으면 죽게 생겼으니까 그것을 바꿔나가는 과정은 훌륭한 것이라고 봅니다. 즉 모든 역사적인 부분에는 진보적인 성격과 한계가 함께 있을 수 있는데, 그 사람이 가진 진짜 진보성이라는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성찰하고 그럼으로써 어떻게 변화시켜 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 한홍구, 128p


원래 인간이란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존재고, 때로는 자기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을 남이 모를 뿐만 아니라 자신조차 모를 때가 많은 존재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속이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가 거짓말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 자기도 모를 때가 많지요. - 김두식, 170~171p


지금은 한국 교회가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는 전통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내세우지만, 1938년에 우리나라 대표적인 교단인 장로교 총회에서 이런 결의를 했습니다. “신사는 종교가 아니며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 참배가 애국적인 국가의식임을 자각하여, 앞으로도 신사 참배를 열심히 하자. 황국신민으로서 적성을 다하자.” 신사 참배가 종교의식이 아니라 애국심을 표현하는 한 방법일 뿐이라고 장로교 총회에서 결의하자, 그 뒤를 위어서 감리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기독교 종파들이 모두 신사 참배에 굉장히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냥 참여한 정도가 아니라 일본까지 가서 신사 참배를 하기도 하고, 안 하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권유해서 함께 하기도 했어요. 여러분들도 다 아시는 주기철 목사님을 비롯한 아주 소수의 기독교 지도자들만이 당시에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했습니다. - 김두식, 172p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사람들이에요. 거짓말도 많이 하죠. 사회 시스템 전체가 거짓말을 권하는 그런 면도 있어요. 다 같이 거짓말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그런 면이 있는데, 그런 불완전성 속에서 불확실한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늘 마음 한편이 불안하다는 거죠. - 김두식, 185p


서구 지성사회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아우슈비츠와 굴락 얘기를 계속 해요. 그 이유는 그게 무슨 자랑스러운 역사라서가 아니라,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는 거죠. 따라서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복원한다고 해서 누구를 다시 감옥에 집어넣고 그런 방법만 있는 게 아닙니다. 잘못된 역사, 잘못된 기억에 대해서는 계속 애기해야 합니다. 계속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겁니다. - 김두식, 188p


북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북에 대해서 다 비판적이지 않아요. 저는 북쪽과 화해하고 용서함으로써 교류를 강화하는 것이 통합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이 북에 대한 환상 또한 안 가졌으면 좋겠어요. 사실 북은 모순투성이인 사회이면서 좋은 사회이기도 합니다. 남한도 비인간적인 사회이면서 또 좋은 사회이기도 하죠. 양면이 다 있어요. 따라서 같이 고민하고 같이 노력해서 공존을 모색하는 게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 김형덕, 220~221p


우리가 새롭게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안다는 것은 ‘알게 된 새로운 자기 몸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알기 이전의 몸이 있고 알고 난 뒤의 몸이 있는데, 몸이 변했기 때문에 과거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비가 알로 돌아가지 못하듯이……. - 정희진, 266p


저는 모든 언어는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언어는 말해지는 순간, 이미 번역됩니다. 화자와 청자가 말하는 의미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완벽한 의사소통은 군대에서나 가능합니다. 그러나 결코 바람직하지 않지요. 대화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상황이 다 다르기 때문에, 전달될 때는 이미 다른 의미가 됩니다.
...(중략)
저는 어떤 면에서 우리가 하는 영어를 미국 사람이 못 알아들을 때, 저항이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번역 불가능성이 바로 저항의 가능성입니다. 다시 말해, 저는 모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즉 권력관계의 전제는 의사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은 무지를 통과하지 못합니다. 의사소통이 돼야 권력이 작동하죠. - 정희진, 268~269p



사람들이 짝퉁을 모방이라고 보는데, 그것은 위계적인 발상입니다. 원래 원본, 기원, 순종, 본질 같은 건 없어요. 원본이 있는 게 아니라, 원본을 지향하는 욕망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원본이나 짝퉁 모두가 지향하는 바를 모방하는 거죠. - 정희진, 270p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작한 포스터 중에, ‘인권은 배려입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것이 있어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권은 배려가 아니라 경합하는 가치예요. 각축하고 투쟁하는 가치입니다. 누가 누구를 배려합니까? 흑인이 백인을 배려해야 돼요? 배려하는 말에는 이미 주체와 대상, 주체와 타자라는 구분이 있습니다. 남성이 여성을 ‘배려’한다 또는 ‘보호’한다는 것도 이상한 말이잖아요. 가정폭력을 보세요. 여자들은 맞으면서 보호받고 있잖아요.(청중 웃음) 보호라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굉장히 문제적인 말이에요. - 정희진, 273p


첫 번째로 대화를 나누는 사회적 구성원들, 곧 청자와 화자는 계급이라든가 성별, 인종, 나이, 성적 정체성 등 다양한 사회적 위치에 있기 때문에, 둘 사이에 완벽히 번역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중립적인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항의 차원에서 다양한 말을 생산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언어는 서구 백인 이성애자 젊은 남성에 의해서 구성된 말이지, 다양한 위치의 사람들 입장에서 만들어진 말이 아니라는 거죠. 동성애자 시각에서 하는 말과 여성 시각에서 하는 말, 장애인 시각에서 하는 말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릅니다. - 정희진, 275p


현실과 갈등하지 않거나, 투쟁하지 않거나, 문제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은 지배 이데올로기와 자기를 일치시키기 때문에 의견이 없을 수밖에 없고, 감정적이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감정적’이라는 말과 ‘정치의식이 있다’는 말을 같은 뜻으로 씁니다. 현실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무슨 감정을 느끼겠어요? 저는 ‘쿨한’ 사람하고는 말을 안 섞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감정적으로 세련된 사람을 싫어합니다. - 정희진, 277p


저항은 소통과 협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너의 타자성을 사랑한다’, ‘너의 결핍을 사랑한다’라는 말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사회적 약자들 중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깨달은 사람들은 고통당하고 억압받아왔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섹시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여성주의자나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 지역 차별이나 학력 차별에 분노하는 사람에게는 보입니다. 1인치를 더 본다는 텔레비전 광고처럼요. 다시 말해, 너의 결핍이 나의 대안이라거나, 너의 고통이 내게 지혜와 통찰을 준다거나, 너보다 내가 더 희생자라는 식으로 불행을 경쟁하는 소통방식, 즉 결핍을 부정하고 메우려는 생각보다는, 너의 결핍과 나의 결핍을 우리 자신의 일부로 긍정하고, 서로의 타자성과 연대하고 소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자 또는 다른 언어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 정희진, 283p



어차피 현재의 제도교육에서는 99.9퍼센트가 ‘실패’합니다. 제도교육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0.1 퍼센트 밖에 안 돼요. 그리고 0.1퍼센트로 성공해서 이른바 ‘명문 대학’에 갔다고 칩시다. 거기서 극소수만이 대기업에 취업합니다. 하지만 대기업에 들어가 봤자 10년 후면 명퇴 소리가 나옵니다. 지금은 영원한 정규직이 없습니다. 저는 진로를 고민하는 대학생들한테 “그렇게 살고 싶으세요?”라고 묻습니다. 다른 삶의 양식을 모색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방식과 기준으로 사는 사회에서는 개인도 사회도 불행합니다. 지금 교육제도에서는, ‘성공’한 극소수도 ‘실패’한 사람도 모두 불행합니다. 제 주변에 흔히 말하는 학벌 좋고 출세한 사람 많거든요. 그런데 행복한 사람 하나도 없어요. 다 죽을 만큼 바쁘거나 스트레스 최고인 상태예요. 행복이 성적순이라는 것은, 그것을 욕망하는 사람이나 그게 전부인 사람의 관점일 뿐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권력이나 출세에 인생 저당 잡힐 필요가 없다. 그래 봤자다, 다르게 살아야 한다, 궤도 밖으로 탈출하자, 그래서 왕따 당하는 게 아니라 기존의 사회를 왕따 시키자. - 정희진, 295p



인도 어린아이들의 47퍼센트가 평균 체중에 미달합니다. 또 가임 연령대에 속하는 여성들의 48퍼센트가 평균 체중에 미달하거나 심각한 빈혈에 시달려서 아이들을 낳더라도 제대로 영양을 공급할 수가 없습니다. 이 수치는 수년 동안의 내전과 인종 갈등, 가뭄에 시달리던 아프리카 사하라 지역보다도 더 심각한 수치입니다. - 프라폴 비드와이, 315p


기본적으로 프랑스와 한국, 인도, 남미, 미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본질은 기업이 주도한 세계화라는 것입니다. 기업이 주도한 세계화가 각 국가들의 우선순위를 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국의 정치인들은 자신들을 뽑아준 국민들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용률은 내려가고 각종 공공요금들은 올라가며, 어느 나라에서나 동일하게 지역간 그리고 계급간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 프라폴 비드와이, 325p


민주주의라는 것이 사람들이 그저 몇 년에 한 번씩 투표장에 가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 뽑힌 사람들이 자신들을 뽑은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수행하게 하는 참여의 메커니즘으로 계속 돌아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활동을 통해서 실제로 그들이 말하는 세계화보다 더 현실적인 대안적 정책을 도출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 프라폴 비드와이, 327p


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독서기간 2008년 5월 21일~ 5월 23일 / 독서번호 951

전재호 지음 / 책세상 (2000년)

반동적 근대주의란 19세기 말 이래 독일에서 진행된 근대화 과정을 지칭하는 용어로, 역사학자인 제프리 허프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파시즘의 반자유주의적이고 반계몽주의적 성격과 기술적 근대성 사이의 모순을 찾다가 독일의 전통적인 혼과 서구의 기술을 접합시키려 했던 일단의 사상가와 기술자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19세기 말엽부터 비합리적인 독일의 절대정신과 기술적 근대성을 적절히 종합해냈고 이는 반자본주의적이고 비합리적인 파시즘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허프에 따르면 반동적 근대주의는 1960년대 제3세계 국가에서 기술과 금융에 대한 광신의 형태로 다시 등장했다. 반동적 근대주의는 19세기 말 독일과 마찬가지로 근대성을 기술만으로 한정시킨 저발전국가에서 등장했으며, 이는 민족주의적 열정과 결합되었다.
- 15p

우선 박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은 당시 한국의 열악한 경제적 조건, 군사 쿠데타로 인한 정통성 부재를 경제 성장으로 만회하려는 욕구, 경제적으로 우월한 북한을 따라잡으려는 욕구 그리고 자립적인 한국을 건설하려는 미국의 대한정책이 결합되어 등장한 것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경제정책에 대한 박정권의 의지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박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이미 민주당 정권에 의해 거의 완성된 것이었다. 제1차 계획을 전면적인 수출 주도형 산업화로 수정시키고, 당시 한국이 절실히 필요로 하던 자금을 차관 형태로 제공해주었으며, 한국제 상품의 최대 수출시장을 제공했던 미국의 역할을 고려한다면, 당시의 경제 성장이 결코 박정권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세계 최장시간의 노동과 최악의 노동조건에 시달린 노동자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한국의 경제 성장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측면을 간과한 채 경제 성장의 공을 박정권에게만 돌리는 것은 명백한 역사적 왜곡이다.

뿐만 아니라, 박정권이 70년대 초반부터 추진하기 시작한 중화학공업화정책과 새마을 운동은 이 시기의 대내외적 경제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등장한 정책이지만, 경제 논리에 의해 진행되지 않고 유신체제의 정당화 및 공고화라는 정치 논리에 의해 좌우됨으로써 정책의 방향과 성격이 변질되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 84~85p

국가주의 담론이 등장한 60년대 말부터 박정권은 본격적으로 전통문화 부문의 정책을 강화해나갔다. 이는 자신이 한민족의 역사적 정통성-민족사적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국민들에게 정권을 중심으로 단합해야 한다는 국가주의를 유포하려는 의도에서 출현한 것이었다. - 89p

 

결국 박정권은 60년대 말부터 호국선현 및 국방유적 정화를 통해 국민들에게 자주국방, 총력안보, 국민총화로 대표되는 군사주의, 국가주의 및 반공주의를 주입시키려 했으며, 선현유적 보수 등을 통해 자신들이 민족적 정통성을 갖고 있음을 부각시키려 노력했다. - 94p

 

박정권은 자신들의 경제 발전의 성공을 한민족의 새로운 ‘황금시대’로 격상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한글 창제가 ‘국민 주체화의 노력’이며, 우리 민족은 “훌륭한 내 나라의 글자를 가진 문화민족……우수한 민족”이라고 지적한 데서 드러나듯이, 박정권은 세종대왕 및 한글 강조를 통해 자신이 ‘민족 주체성’을 세운 정권임을 과시하려 했다. 게다가 이를 통해 ‘민족문화의 정수’인 한글의 전용화를 결정한 박정권이야말로 진정한 민족문화의 계승자라는 논리를 전파하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여기에는 군사 정권의 딱딱한 이미지를 세종대왕의 문화 이미지로 순치시키려는 의도도 개입되어 있었다. - 101p

 

박정권은 한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복원하고 부활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자의적이고 선택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특히 군사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호국유적을 집중 복원한 것이나 국가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충효사상과 같은 봉건적인 사고를 부활시킨 사례들은 그들의 사고에 내재한 반동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 107p

박정권은 북한 공산당의 남침 야욕을 방지하기 위해, 다른 말로 국가 안보를 위해 경제 발전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국민들의 기본권 침해를 정당화 시켰다. 그들에게는 국가 안보와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면 민주주의도, 노동자의 권익도 희생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정당한 것은 아니다”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대로, 박정희의 독재는 정당화될 수 있지만, 결코 정당한 것은 아니었다.
- 118~119p

단적으로 박정권은 자신에게 저항하는 자의 신체뿐 아니라 정신에도 고통을 가해서 자신의 개인적 의지를 관철시켰다는 점에서 민주주의 시대의 절대군주였다. 그렇기 때문에 박정권의 근대화를 반동적 근대화로 지칭할 수 있는 것이다. - 123p

홉스봄은 1984년 《전통의 발명》을 편집하면서 ‘발명된 전통’이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했고, 많은 역사학자들은 ‘역사의 이용’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전자는 일반적으로 오래된 것으로 간주되는 전통들 대부분이 정치, 경제, 사회적 이유에 의해 아주 최근에 발명된 것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증명하는 반면, 후자는 현재적 필요에 따라 역사가 어떻게 새롭게 해석되면서 변형되는가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 134p


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독서기간 2008년 5월 21일~5월 23일 / 독서번호 950

강준만 지음 / 개마고원 펴냄 (2006년)

 

남자가 한평생 한 여자하고만 살아야 한다고 어느 누구도 정해 놓은 바 없다. 이 제한을 스스로에게 부과해 놓은 동물은 인간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더러는 몰래, 더러는 보란듯이 이를 어기곤 한다. 우리는 이 점에 관해서 규제를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규율에 따라 행하는 행동이 오히려 편협한 사회주의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상 각자의 삶이 사회 전체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때 누가 그 첫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 체 게바라 , 41p

한국인은 평등주의가 강한 만큼 시기심․질투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건 두 얼굴을 갖고 있다. 명암이 있다는 뜻이다. 강한 시기심․질투로 인한 사회적 부작용도 만만치 않지만, 그건 동시에 한국인의 무한한 도전정신을 일깨워준 엄청난 무형 자원이기도 했다. 시기심․질투는 척결이나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 51p

라캉은 프로이트가 동의어처럼 혼용해온 욕구․요구․욕망을 엄격히 구별하면서 무의식적 욕망이 심리적이고 생물학적이라기보다는 문화적이고 상징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경갑의 해설에 따르면, “인간은 식욕이나 성욕 같은 생리적 욕구를 언어로 표현한다. 욕구가 식욕이나 성욕 같은 생리적 충동이라면, 요구는 생리적 욕구의 언어적 표현이요 상징적 표현이다. 그러나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욕구는 의식적 언어의 이면으로 억압되어 무의식적 욕망을 형성한다. 결국 생리적 욕구와 언어적 요구 간이 메울 수 없는 심연에서 욕망이 형성되는 것이다.” - 81p

변절의 역사를 워낙 오랫동안 지켜본 탓인지 한국인들은 ‘신념’과 ‘소신’을 사랑하지만 그 이면의 ‘욕망’에 대해선 비교적 무관심한 것 같다. 물론 ‘욕망’없는 인간은 없다는 점에서 욕망 자체는 전혀 문제 삼을 게 못 된다. 문제는 과잉 욕망이다. ‘과잉’인지 아닌지 그걸 판별하는 게 쉽지 않다 하더라도 말이다.
한국은 대표적인 ‘욕망공화국’이다. 욕망에 두 얼굴이 있듯, 이는 좋은 의미도 나쁜 의미도 아니다. 나쁜 건 이중잣대다. 보통사람들의 욕망은 ‘평등주의’라고 꾸짖으면서도 자신의 욕망은 무한대를 추구하는 엘리트들의 이중잣대 말이다. 엘리트건 보통사람이건 이제 거국적 수준으로 욕망의 ‘열 관리’가 필요한 시점은 아닐까?
- 87p

열정과 탐욕의 유착은 나쁜가? 우문이다. 그야말로 극소수를 제외하곤 그건 인간 본성으로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문제는 열정과 탐욕은 뒤섞여 분리하기 어렵다는 데에 있다. 남들은 물론 열정을 가진 엘리트 자신도 잘 모른다. 권력욕이라는 자신의 탐욕 충족을 위해 뛰면서도 그걸 대의명분을 위한 열정으로만 생각한다. 세상을 자기 뜻대로 개조해 보겠다는 열정도 권력욕이라는 걸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자신에게 권력은 열정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일 뿐 ‘목적’은 아니라는 생각이 그런 착각을 지속시킨다. 윤리와 염치가 실종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을 진리와 정의로 간주하기 때문에 모든 걸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 91p

한국 민주주의는 자기 교정 능력이 약한 민주주의다. ‘홍수 민주주의’라는 딱지를 붙여도 무방하다. 누구건 갈 데까지 간다. 잘못 가도 내부에선 아무 말이 없다.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잘못 가는 걸 막을 수 있을 만큼 일정 세력을 형성하진 못한다. 그러다가 선거 때 한꺼번에 응징당하는 패턴이 마치 여름철의 홍수를 닮았다. 홍수가 난 다음엔 사후 분석이 쏟아져 나오는데, 모두 다 백 번 지당하신 말씀들이다. 그런데 왜 홍수가 나기 전엔 그걸 몰랐을까? 우리편에선 그런 비판이 안 나왔고 반대편에서만 그런 비판이 나왔기 때문이다.
- 97~98p

호칭 문제는 두말할 필요 없이 권위주의와 연결된다. 이는 특히 조직에서 문제가 된다. 권위주의에도 여러 장점이 있을 수 있으나(예컨대, 조직의 안정),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조직의 경직화를 초래한다는 점일 것이다. 권위주의 분위기가 강한 조직에선 연공서열을 파괴하는 혁신을 단행하긴 쉽지 않다. - 177p

한나 아렌트는 “폭력이 전제되는 순간 권위는 죽는다”고 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권위와 권력의 차이는 권위는 절대로 폭력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권위는 설득과도 같다. 권위는 위계질서에서 나온다. 위계질서의 정당성과 정통성이 문제가 되긴 하겠지만 말이다.
- 182p

표면적인 겸손은 별로 믿을 만한 지표가 못 된다. 자신의 권력․권위에 도전할 가능성이 없거나 추종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겸손해 그들을 감동시키지만, 자신의 권력․권위 강화와 그걸 이루기 위해 동원되는 명분(또는 그 어떤 명분을 내걸고 그걸 이루기 위해 필요한 자신의 권력․권위 강화)을 실현하는 일에 있어선 둘도 없는 독재자가 되는 극명한 대조가 나타나기도 한다. - 189p

그 누구건 좋은 기억은 간직하고 싶고 나쁜 기억은 몰아내고 싶어 한다. 좋건 나쁘건 기억의 포로가 되어 진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행위에 대한 기억 기능이 전혀 없이 그때그때 편의적인 행위를 취하는 바람에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말을 듣는 사람도 있다. 인도 사상가 크리슈나무르티는 새로운 경험을 몰아내고 낡은 기억만을 갖게 되는 걸 막기 위해선 ‘사실적 기억’과는 다른 ‘심리적 기억’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백 번 옳은 말이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과 ‘심리’의 분리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도 분리를 위해 애는 써야 한다. - 203p

“강한 신념으로 무장하고 확고한 소신을 갖되, 나의 신념과 소신이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줄 때엔 다시 생각해보라. 거대담론 앞세워 미친 척 하지 말고 나의 속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어 미처 나도 잘 보지 못하는 내 안의 인정투쟁용 탐욕을 직시하라. 성찰 없는 신념은 재앙이다.”
신념은 늘 과유불급의 시험대 위에 오른다. 아니 올라야만 한다. 그 첫 번째 시험이 바로 성찰성이다. 성찰성이라는 말은 원래 인식론에서 사용되던 철학용어로 내가 어떤 주장을 하려면 그것이 내 주장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성찰의 씨가 마른 사람들이 외치는 정치 구호는 상징적 폭력에 다름 아니다. - 218p

가장 문제가 되는 건 근본주의와 기회주의의 결합이다. 얼른 봐선 결합이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 불가능이란 없는 법이다. 기회주의적 헤게모니 쟁탈을 위한 처세술로 골통 행세를 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는가? 유명 인사들 가운데 이런 사람들 숱하게 많다. 피해를 보는 건 누군가? 진정한 의미의 꼴통이다. 꼴통을 부정적으로만 볼 건 아니다. 앞서 말하지 않았는가. 진정한 꼴통은 이익을 취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모든 걸 걸 수도 있다. 요즘 이런 꼴통을 볼 수 있는가? - 220p

배신의 다양한 모습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배신의 본질에 대해선 새삼 마키아벨리의 탁견에 놀라게 된다. 일찍이 마키아벨리는 “인간은 자기가 두려워하는 자보다 사랑하는 자를 더 쉽게 배반한다. 자기의 이해관계 앞에서 언제나 서슴없이 의리와 기반을 끊어버리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더 나아가 정치인에겐 배신이 필수 덕목일 수도 있다고 보았다.
- 266p

배신의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배신의 주된 이유가 자기 자신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이익’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임을 유념하여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이익’의 몫을 키우기 위해 묵묵히 노력하는 것이다. 그게 부질없다고 생각한다면 대범한 관용을 키우는 것이다. 배신에 상처에 괴로워하면서 남의 동정심을 구걸하거나 자신을 소홀히 하는 건 자신이 자신에 대해 또 한 번의 배신을 저지르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270p



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독서기간 2008년 5월 17일~5월 21일 / 독서번호 949




박노자 ․ 허동현 지음 / 푸른역사 펴냄 (2003년)




사실 6․25 전쟁 이후 한국은 미국이라는 중심부 자본주의 국가에 군사․정치․경제적으로 종속된 ‘식민지’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하면 우리는 해방 후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가하는 미국과 긴밀한 유대를 맺고, 이를 이용하여 역사상 최초로 서구 중심의 세계 질서 속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 허동현, 48p




한 세기 전 우리 자신의 눈으로 서구 근대 읽어 들이기에 실패한 역사를 되새겨보면서, 한자 교육을 게을리한 결과 한 세기 전 조상들이 쌓아놓은 정신적 보고에 쉽게 다가갈 수 없게 되었다는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날마다 쏟아져 들어오는 새로운 개념과 현상들을 우리 언어로 표현하는 데 소홀한 결과, 이제는 우리끼리도 최신 정보와 지식을 교류하려면 영어 단어를 빌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아닐까요?

- 허동현, 62p




정치적으로 독립을 지향했다 해도, 새로운 문명을 메이지 일본이 중역하며 변질시킨 서구의 기본 틀 안에서 이해한 것이야말로 이 시기 한국의 애국적 계몽운동의 가장 큰 비극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들은 일제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했지만, ‘경쟁’과 ‘국민’이라는 일본화된 서구 개념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비극의 진실을 이해하여 적어도 상황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남과 치열한 경쟁을 하지 않으면서 살 권리, 개성의 다양성을 존중받을 권리를 보장해주면 좋지 않겠습니까?

- 박노자, 71p




'보수‘라는 말은 기득권의 보존과 기존 가치체제의 보존이라는 서로 매우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 보수를 자칭하는 사람들 중에서 반대쪽 사람들에게까지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가치보다 기득권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 한국 ‘보수’의 최대 약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 박노자, 83p




당시 지식인들은 자신의 어깨 위에 제국주의 열강의 침입을 막아야 하는 반침략의 과제 외에도 자체 내의 봉건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반봉건의 책무도 함께 짊어졌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 허동현, 88~89p




어떻게 보면 한 세기 전 한반도를 열강의 즐거운 ‘이권 사냥터’로 만들었던 조선 정부의 이권 양여정책도 이러한 이이제이에 입각한 균형의 책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후세인 치하의 이라크 정부가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 독일에게 유전 개발권을 준 것처럼 말이지요.

...

재미있는 것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최강대국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진짜 제국주의 국가들은 조선에 큰 욕심이 없었고,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러시아와 미국은 그다지 절실하지 않은 전략적․경제적 동기만 갖고 있었던 데 비해, 제국주의라고 할 수도 없는 부차적 제국주의 국가인 청․일 양국은 조선에 매우 절실한 이해가 걸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청국과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러시아와 미국을 이용하려 했던 것 아닐까요? 지금 미국이 동아시아 지배를 위해 한국에서 추구하는 전략적 동기가 그때 미국에게는 없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당시 한국인들이 미국을 짝사랑한 진짜 이유가 아닐까요?

...

현명한 책략과 견실한 자강, 이것이 먹이를 노리는 포식자들의 다툼에서 우리의 번영과 양심을 지켜줄 방패일 겁니다.

- 허동현. 231~233p




약육강식의 세계를 초월하려 한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결국 이상향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 구도의 r길에서 적어도 한 가지는 얻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종과 국경을 뛰어넘는 사해동포적 인류주의의 이상과 실천입니다.

또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은 20세기 초반의 극동권 사회주의자들이 결코 모두 전체주의적 색깔의 레닌, 스탈린주의에 홀린 것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홉스봄의 표현대로 당시는 ‘극단의 세기’였던 만큼 한․중․일 삼국의 좌파운동에서 스탈린주의의 여러 갈래들이 패권을 잡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지 않은 소수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듯합니다.

- 박노자, 239~240p




그러나 경쟁을 위주로 하는 반인륜적 자본주의 사회를 평화적으로 개조시키는 데에 절망한 유럽의 일부, 극동의 소수 아나키스트들이 파괴주의의 유혹에 빠지긴 했어도, 대다수 아나키스트들은 온갖 역경속에서도 아나키즘의 원칙대로 평화적 수단만을 썼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1920~30년대 극동의 아나키스트들에게 배울 점은 일본인 기자의 사례가 보여주듯 초국가주의․초민족주의 아닌가 싶습니다.

- 박노자, 246p




약탈을 당하는 국립박물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오직 석유와 관련된 정부 부서만을 집중적으로 보호했던 바그다드 점령 직후의 미국의 태도는, 자원 약탈밖에 아무것도 모르는 오늘의 미국 극우파 통치자의 기본 자세를 잘 보여줍니다. 추악한 형태이긴 하나, 후세인 정권은 야수적인 제국주의 세계에서 이라크 주민들의 집단적 생존을 담보하는 국민국가였던 것입니다. - 박노자, 267p




역사에 대한 편견 가운데 하나가 역사를 무슨 심판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

역사는 도덕주의에 입각한 심판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자기 행동의 도덕적인 책임이 각자의 것이듯, 과거 인물에 대한 도덕적인 판단도 각자가 하는 것이지 역사학자가 하는 것은 아니죠. 그런 점에서 현실적인 문제들을 비판할 수는 있어도, 역사학자가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박노자, 306~307p




역사는 시민 개개인의 것입니다. 시민 개개인이 알맞은 역사 해석을 선택할 권리가 있고, 자신만의 진실을 역사의 해석을 통해 찾을 권리가 있습니다.

...

(역사학자는) 시민들에게 역사 읽는 여러 방법을 이야기해주는 소개자, 내레이터이자 과거 일의 많은 해석자 가운데 한 사람일 뿐입니다.

- 박노자, 310p



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독서기간 2008년 5월 3일~ 5월 6일 / 독서번호 942

김진명 지음 / 대교베텔스만 펴냄 (2007년)

“한 나라의 지도자로부터 국가의 정상적 작용이 뭐냐는 질문을 들으니 기분이 야릇해지는군요. 내가 아는 한 국가의 지도자로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구성원들을 최소한 굶지는 않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 해야 합니다. 자신의 철학, 사상, 세계관, 신념, 꿈 이런 것들을 굶어 죽는 인민 앞에 내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사치요 허영이요, 아니 광기요 살인입니다. 보세요. 당신이 해낸 핵 개발은 수백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고통에 눈을 감고,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이루어낸 것이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인정받아서도 안 되고 국제 사회가 이런 핵 보유를 인정해서도 안 됩니다.”

- 131~132p


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