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간 2008년 5월 21일~ 5월 23일 / 독서번호 951
전재호 지음 / 책세상 (2000년)
반동적 근대주의란 19세기 말 이래 독일에서 진행된 근대화 과정을 지칭하는 용어로, 역사학자인 제프리 허프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파시즘의 반자유주의적이고 반계몽주의적 성격과 기술적 근대성 사이의 모순을 찾다가 독일의 전통적인 혼과 서구의 기술을 접합시키려 했던 일단의 사상가와 기술자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19세기 말엽부터 비합리적인 독일의 절대정신과 기술적 근대성을 적절히 종합해냈고 이는 반자본주의적이고 비합리적인 파시즘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허프에 따르면 반동적 근대주의는 1960년대 제3세계 국가에서 기술과 금융에 대한 광신의 형태로 다시 등장했다. 반동적 근대주의는 19세기 말 독일과 마찬가지로 근대성을 기술만으로 한정시킨 저발전국가에서 등장했으며, 이는 민족주의적 열정과 결합되었다.
- 15p
우선 박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은 당시 한국의 열악한 경제적 조건, 군사 쿠데타로 인한 정통성 부재를 경제 성장으로 만회하려는 욕구, 경제적으로 우월한 북한을 따라잡으려는 욕구 그리고 자립적인 한국을 건설하려는 미국의 대한정책이 결합되어 등장한 것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경제정책에 대한 박정권의 의지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박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이미 민주당 정권에 의해 거의 완성된 것이었다. 제1차 계획을 전면적인 수출 주도형 산업화로 수정시키고, 당시 한국이 절실히 필요로 하던 자금을 차관 형태로 제공해주었으며, 한국제 상품의 최대 수출시장을 제공했던 미국의 역할을 고려한다면, 당시의 경제 성장이 결코 박정권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세계 최장시간의 노동과 최악의 노동조건에 시달린 노동자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한국의 경제 성장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측면을 간과한 채 경제 성장의 공을 박정권에게만 돌리는 것은 명백한 역사적 왜곡이다.
뿐만 아니라, 박정권이 70년대 초반부터 추진하기 시작한 중화학공업화정책과 새마을 운동은 이 시기의 대내외적 경제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등장한 정책이지만, 경제 논리에 의해 진행되지 않고 유신체제의 정당화 및 공고화라는 정치 논리에 의해 좌우됨으로써 정책의 방향과 성격이 변질되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 84~85p
국가주의 담론이 등장한 60년대 말부터 박정권은 본격적으로 전통문화 부문의 정책을 강화해나갔다. 이는 자신이 한민족의 역사적 정통성-민족사적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국민들에게 정권을 중심으로 단합해야 한다는 국가주의를 유포하려는 의도에서 출현한 것이었다. - 89p
결국 박정권은 60년대 말부터 호국선현 및 국방유적 정화를 통해 국민들에게 자주국방, 총력안보, 국민총화로 대표되는 군사주의, 국가주의 및 반공주의를 주입시키려 했으며, 선현유적 보수 등을 통해 자신들이 민족적 정통성을 갖고 있음을 부각시키려 노력했다. - 94p
박정권은 자신들의 경제 발전의 성공을 한민족의 새로운 ‘황금시대’로 격상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한글 창제가 ‘국민 주체화의 노력’이며, 우리 민족은 “훌륭한 내 나라의 글자를 가진 문화민족……우수한 민족”이라고 지적한 데서 드러나듯이, 박정권은 세종대왕 및 한글 강조를 통해 자신이 ‘민족 주체성’을 세운 정권임을 과시하려 했다. 게다가 이를 통해 ‘민족문화의 정수’인 한글의 전용화를 결정한 박정권이야말로 진정한 민족문화의 계승자라는 논리를 전파하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여기에는 군사 정권의 딱딱한 이미지를 세종대왕의 문화 이미지로 순치시키려는 의도도 개입되어 있었다. - 101p
박정권은 한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복원하고 부활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자의적이고 선택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특히 군사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호국유적을 집중 복원한 것이나 국가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충효사상과 같은 봉건적인 사고를 부활시킨 사례들은 그들의 사고에 내재한 반동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 107p
박정권은 북한 공산당의 남침 야욕을 방지하기 위해, 다른 말로 국가 안보를 위해 경제 발전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국민들의 기본권 침해를 정당화 시켰다. 그들에게는 국가 안보와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면 민주주의도, 노동자의 권익도 희생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정당한 것은 아니다”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대로, 박정희의 독재는 정당화될 수 있지만, 결코 정당한 것은 아니었다.
- 118~119p
단적으로 박정권은 자신에게 저항하는 자의 신체뿐 아니라 정신에도 고통을 가해서 자신의 개인적 의지를 관철시켰다는 점에서 민주주의 시대의 절대군주였다. 그렇기 때문에 박정권의 근대화를 반동적 근대화로 지칭할 수 있는 것이다. - 123p
홉스봄은 1984년 《전통의 발명》을 편집하면서 ‘발명된 전통’이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했고, 많은 역사학자들은 ‘역사의 이용’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전자는 일반적으로 오래된 것으로 간주되는 전통들 대부분이 정치, 경제, 사회적 이유에 의해 아주 최근에 발명된 것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증명하는 반면, 후자는 현재적 필요에 따라 역사가 어떻게 새롭게 해석되면서 변형되는가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 13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