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간 2008년 5월 21일~5월 23일 / 독서번호 950

강준만 지음 / 개마고원 펴냄 (2006년)

 

남자가 한평생 한 여자하고만 살아야 한다고 어느 누구도 정해 놓은 바 없다. 이 제한을 스스로에게 부과해 놓은 동물은 인간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더러는 몰래, 더러는 보란듯이 이를 어기곤 한다. 우리는 이 점에 관해서 규제를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규율에 따라 행하는 행동이 오히려 편협한 사회주의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상 각자의 삶이 사회 전체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때 누가 그 첫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 체 게바라 , 41p

한국인은 평등주의가 강한 만큼 시기심․질투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건 두 얼굴을 갖고 있다. 명암이 있다는 뜻이다. 강한 시기심․질투로 인한 사회적 부작용도 만만치 않지만, 그건 동시에 한국인의 무한한 도전정신을 일깨워준 엄청난 무형 자원이기도 했다. 시기심․질투는 척결이나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 51p

라캉은 프로이트가 동의어처럼 혼용해온 욕구․요구․욕망을 엄격히 구별하면서 무의식적 욕망이 심리적이고 생물학적이라기보다는 문화적이고 상징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경갑의 해설에 따르면, “인간은 식욕이나 성욕 같은 생리적 욕구를 언어로 표현한다. 욕구가 식욕이나 성욕 같은 생리적 충동이라면, 요구는 생리적 욕구의 언어적 표현이요 상징적 표현이다. 그러나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욕구는 의식적 언어의 이면으로 억압되어 무의식적 욕망을 형성한다. 결국 생리적 욕구와 언어적 요구 간이 메울 수 없는 심연에서 욕망이 형성되는 것이다.” - 81p

변절의 역사를 워낙 오랫동안 지켜본 탓인지 한국인들은 ‘신념’과 ‘소신’을 사랑하지만 그 이면의 ‘욕망’에 대해선 비교적 무관심한 것 같다. 물론 ‘욕망’없는 인간은 없다는 점에서 욕망 자체는 전혀 문제 삼을 게 못 된다. 문제는 과잉 욕망이다. ‘과잉’인지 아닌지 그걸 판별하는 게 쉽지 않다 하더라도 말이다.
한국은 대표적인 ‘욕망공화국’이다. 욕망에 두 얼굴이 있듯, 이는 좋은 의미도 나쁜 의미도 아니다. 나쁜 건 이중잣대다. 보통사람들의 욕망은 ‘평등주의’라고 꾸짖으면서도 자신의 욕망은 무한대를 추구하는 엘리트들의 이중잣대 말이다. 엘리트건 보통사람이건 이제 거국적 수준으로 욕망의 ‘열 관리’가 필요한 시점은 아닐까?
- 87p

열정과 탐욕의 유착은 나쁜가? 우문이다. 그야말로 극소수를 제외하곤 그건 인간 본성으로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문제는 열정과 탐욕은 뒤섞여 분리하기 어렵다는 데에 있다. 남들은 물론 열정을 가진 엘리트 자신도 잘 모른다. 권력욕이라는 자신의 탐욕 충족을 위해 뛰면서도 그걸 대의명분을 위한 열정으로만 생각한다. 세상을 자기 뜻대로 개조해 보겠다는 열정도 권력욕이라는 걸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자신에게 권력은 열정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일 뿐 ‘목적’은 아니라는 생각이 그런 착각을 지속시킨다. 윤리와 염치가 실종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을 진리와 정의로 간주하기 때문에 모든 걸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 91p

한국 민주주의는 자기 교정 능력이 약한 민주주의다. ‘홍수 민주주의’라는 딱지를 붙여도 무방하다. 누구건 갈 데까지 간다. 잘못 가도 내부에선 아무 말이 없다.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잘못 가는 걸 막을 수 있을 만큼 일정 세력을 형성하진 못한다. 그러다가 선거 때 한꺼번에 응징당하는 패턴이 마치 여름철의 홍수를 닮았다. 홍수가 난 다음엔 사후 분석이 쏟아져 나오는데, 모두 다 백 번 지당하신 말씀들이다. 그런데 왜 홍수가 나기 전엔 그걸 몰랐을까? 우리편에선 그런 비판이 안 나왔고 반대편에서만 그런 비판이 나왔기 때문이다.
- 97~98p

호칭 문제는 두말할 필요 없이 권위주의와 연결된다. 이는 특히 조직에서 문제가 된다. 권위주의에도 여러 장점이 있을 수 있으나(예컨대, 조직의 안정),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조직의 경직화를 초래한다는 점일 것이다. 권위주의 분위기가 강한 조직에선 연공서열을 파괴하는 혁신을 단행하긴 쉽지 않다. - 177p

한나 아렌트는 “폭력이 전제되는 순간 권위는 죽는다”고 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권위와 권력의 차이는 권위는 절대로 폭력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권위는 설득과도 같다. 권위는 위계질서에서 나온다. 위계질서의 정당성과 정통성이 문제가 되긴 하겠지만 말이다.
- 182p

표면적인 겸손은 별로 믿을 만한 지표가 못 된다. 자신의 권력․권위에 도전할 가능성이 없거나 추종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겸손해 그들을 감동시키지만, 자신의 권력․권위 강화와 그걸 이루기 위해 동원되는 명분(또는 그 어떤 명분을 내걸고 그걸 이루기 위해 필요한 자신의 권력․권위 강화)을 실현하는 일에 있어선 둘도 없는 독재자가 되는 극명한 대조가 나타나기도 한다. - 189p

그 누구건 좋은 기억은 간직하고 싶고 나쁜 기억은 몰아내고 싶어 한다. 좋건 나쁘건 기억의 포로가 되어 진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행위에 대한 기억 기능이 전혀 없이 그때그때 편의적인 행위를 취하는 바람에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말을 듣는 사람도 있다. 인도 사상가 크리슈나무르티는 새로운 경험을 몰아내고 낡은 기억만을 갖게 되는 걸 막기 위해선 ‘사실적 기억’과는 다른 ‘심리적 기억’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백 번 옳은 말이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과 ‘심리’의 분리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도 분리를 위해 애는 써야 한다. - 203p

“강한 신념으로 무장하고 확고한 소신을 갖되, 나의 신념과 소신이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줄 때엔 다시 생각해보라. 거대담론 앞세워 미친 척 하지 말고 나의 속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어 미처 나도 잘 보지 못하는 내 안의 인정투쟁용 탐욕을 직시하라. 성찰 없는 신념은 재앙이다.”
신념은 늘 과유불급의 시험대 위에 오른다. 아니 올라야만 한다. 그 첫 번째 시험이 바로 성찰성이다. 성찰성이라는 말은 원래 인식론에서 사용되던 철학용어로 내가 어떤 주장을 하려면 그것이 내 주장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성찰의 씨가 마른 사람들이 외치는 정치 구호는 상징적 폭력에 다름 아니다. - 218p

가장 문제가 되는 건 근본주의와 기회주의의 결합이다. 얼른 봐선 결합이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 불가능이란 없는 법이다. 기회주의적 헤게모니 쟁탈을 위한 처세술로 골통 행세를 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는가? 유명 인사들 가운데 이런 사람들 숱하게 많다. 피해를 보는 건 누군가? 진정한 의미의 꼴통이다. 꼴통을 부정적으로만 볼 건 아니다. 앞서 말하지 않았는가. 진정한 꼴통은 이익을 취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모든 걸 걸 수도 있다. 요즘 이런 꼴통을 볼 수 있는가? - 220p

배신의 다양한 모습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배신의 본질에 대해선 새삼 마키아벨리의 탁견에 놀라게 된다. 일찍이 마키아벨리는 “인간은 자기가 두려워하는 자보다 사랑하는 자를 더 쉽게 배반한다. 자기의 이해관계 앞에서 언제나 서슴없이 의리와 기반을 끊어버리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더 나아가 정치인에겐 배신이 필수 덕목일 수도 있다고 보았다.
- 266p

배신의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배신의 주된 이유가 자기 자신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이익’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임을 유념하여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이익’의 몫을 키우기 위해 묵묵히 노력하는 것이다. 그게 부질없다고 생각한다면 대범한 관용을 키우는 것이다. 배신에 상처에 괴로워하면서 남의 동정심을 구걸하거나 자신을 소홀히 하는 건 자신이 자신에 대해 또 한 번의 배신을 저지르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27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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