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론자에게 기도란 그저 허상이요 시간낭비일 뿐이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는 그만큼 소중한 시간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인 나로서는 당연히 후자 쪽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기도에 대해 그토록 확신이 없는 것일까? 영국의 목회자 마틴 로이스 존스는 기도를 둘러싼 혼란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일 중에, 또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는 부분 가운데 이른바 기도만큼 그들을 난처하게 만들고 허다한 문제를 일으키는 일도 없다." (p20)

 전문가가 아니라 순례자의 마음가짐으로 이 책을 썼다. 다른 이들이 의문스러워하는 점들이라면 나 역시 궁금하다.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는가? 주님이 나 같은 존재에게 마음을 쓰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도 응답에 일관성이 없고 변덕스러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암에 걸렸을 때 주변에 중보해주는 친구가 많으면 기도를 받지 못하는 환자보다 빨리 나을까? 하나님이 때로는 가까이, 때로는 멀리 떨어져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도는 하나님 마음을 바꾸는가, 아니면 나를 변화시키는가?
 나 역시 이 책을 쓰기 전까지는 웬만하면 기도라는 주제와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다. 죄책감과 열등감 때문이었다. 기도 일지를 쓰지도 않고, 영적인 지도자를 만나러 다니지도 않으며, 정기적으로 기도 모임에 나가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게 쉽지 않았다. 공개적으로 기도 이야기를 하자면 스스로 의심의 안경을 끼고 있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고백해야 했다. 응답받은 기도에 기뻐하기보다 응답받지 못한 기도에 더 집착하는 게 내 실상이다. 간단히 말해서 기도에 관한 책을 쓸 만한 자질이라곤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진심으로 알고 싶어한다는 것'뿐이다. (pp20-1)

 물방울이 강물을 이루는 여정을 보며, 기도에 대해 오랫동안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여태까지는 하류에서 시작해서 개인적인 관심사를 상류에 계신 하나님께로 올려보내려고 했었다. 주님이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는 것처럼 자신의 상황을 알려드리기에 급급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고 도저히 거부할 수 없도록 몰아붙이려는 듯 강청하며 매달렸다. 그럴 게 아니다. 상류에서 시작해 물길을 탔어야 했다. (pp33-4)

 시카고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던 중에, 젊은 여성이 손을 들고 일어나서 질문을 했다. 꼬박꼬박 수업에 참석하면서도 입 한 번 뻥끗하지 않던 수줍고 성실한 학생이었다. 함께 공부하던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귀를 쫑긋 세웠다. 무엇인가를 묻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놀라웠기 때문이다. "늘 진심으로 기도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마지못해 앉아 있기도 했어요. 무슨 의식에 참석하는 것처럼요. 주문을 외듯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기도도 들으실까요? 이건 아니다 싶은데도 계속 그러고 있어야 할까요?"
 한동안 침묵이 흐르도록 내버려둔 다음에 말했습니다. "보세요. 방 안이 조용해졌지요? 자매님이 얼마나 정직한 사람인지 이미 다들 알고 있습니다. 연약함을 드러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매님은 여기 있는 모든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교묘한 말로 지갑을 열게 만드는 장사꾼과는 전혀 다른 진지함 같은 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모두들 하던 일을 멈추고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 뜻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기도에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될 거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이의 진심을 원하십니다." (pp66-7)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8)는 말씀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기도가 부질없는 짓이란 얘기가 아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기도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주님이 돌봐주신다는 걸 확인하려고 안달복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는 진즉부터 자녀들을 돌보고 계시며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깊이 관여하신다. 기도는 하나님께 새로운 정보를 드리는 의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상황을 새카맣게 모르고 계신다는 듯 요구 사항을 늘어놓을 게 아니라, "주님은 제게 이것이 필요하다는 걸 아십니다"라고 고백하는 편이 타당하다. 기도에 관한 의문점들에 대해 팀 스태포드가 찾아낸 일종의 해답도 그와 비슷하다.

 기도에서 가장 인격적인 부분을 이해하는 열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르고 계신 사실을 가르쳐드리려고 기도하는 게 아니다. 잊고 계신 걸 상기시켜 드리려는 것도 아니다. 자녀들이 구하는 일들을 하나님은 벌써부터 보살펴오셨다. 자녀들이 더불어 문제를 해결하자고 찾아오길 오랫동안 기다리렸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 어려움을 끼치는 인물이나 곤란한 상황들을 주님과 나란히 서서 바라보게 된다. 문제나 사람으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얼마든지 아름다운 찬양을 드릴 수 있다.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잘 알고 있는 가장 절친하고 오래된 벗에게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 지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가장 친한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하나님과 대화하라. 사랑 안에서 교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pp99-100)

 전에는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8)고 하신 예수님 말씀 때문에 늘 헷갈리곤 했다. 그렇다면 뭐 하러 기도를 한단 말인가? 친구로서 친밀감을 나누고 싶어하시는 마음을 알고 나서 이 의문이 풀렸다. 서로를 깊이 알면 알수록 커뮤니케이션에 필요한 정보의 양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의사를 처음 만날 때는 병력을 시시콜콜 알려주는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 반면에 이미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주치의라면 당장 어디가 아픈지만 이야기하면 그만이다. 교우관계도 그렇다. 흉허물 없이 지내는 가까운 친구끼리는 낯빛만 봐도 서로의 상태를 꿰고 있는 까닭에 거추장스러운 절차를 생략한 채 곧바로 '영혼의 문제'를 꺼낼 수 있는 것이다.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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