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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도 수컷과 암컷이 있습니다
오다 마사쿠니 지음, 권영주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재미있는 제목이다. 책에도 성별이 있다니 말이다. 수컷과 암컷이 있으니 당연히 새끼도 친다. 이때 태어난 책들이 바로 환서다. 혹은 그것이라 불린다. 이 소설은 바로 이 환서를 바탕으로 한 애서가의 삶을 환상적으로 그려내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문장이 상당히 고답적이고 파편적이라 조금 어렵다. 적응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어느 정도 적응하면 이 황당하고 몽상적인 이야기를 조금씩 즐기게 된다. 이야기 구조도 시간의 흐름을 따르거나 인물 위주가 아니라 조금만 방심하면 엉뚱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도이 히로시가 자신의 아들에게 자신의 외조부 후카이 요지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이다. 처음에는 이 도입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뭐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엄청난 서책 수집가였다는 사실이 먼저 눈길을 끌었는데 읽다 보니 그 엄청난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책에도 수컷과 암컷이 있어 새끼를 친다고 했을 때 이 소설의 장르가 뭘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힘들게 한 것은 문장이다.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쉼표를 남발하고, 이름을 끊어서 표현하고, 작품 이름을 패러디하는 등의 방식을 사용하여 강한 집중력을 요구했다. 이 문턱에서 좌절하면 이 요상한 책의 재미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된다.
이 소설을 끌고 나가는 인물은 후카이 요지로다. 그리고 그의 아내 미키와 동창생 샷쿠리다. 샷쿠리는 멈추지 않는 딸꾹질로 인해 생긴 별명이다. 본명은 가메야마 긴고지만 미키를 처음 만난 날부터 거의 백세에 달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있다. 미키의 저주라고도 하지만 이 딸꾹질의 좋은 점도 발견하는데 이것도 하나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다. 이 소설의 장점 중 하나가 소소하지만 재밌는 에피소드들이 곳곳에 있다는 것이다. 가끔 나오는 언어유희는 사실 일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재미를 잘 알 수 없는 것들이다. 반면에 애서가의 모습을 보여줄 때는 나도 모르게 공감대가 형성된다. “책이란 말이지, 읽으면 읽을수록 모르는 게 늘어나는 거야.”라고 할 때 경험적으로 고개를 자동적으로 끄덕였다.
요지로의 일생을 자신의 자식에게 들려주는 방식이지만 그 속에는 말하는 화자의 삶도 잠시 나온다. 하지만 중심이 되는 것은 역시 요지로다. 그가 어떻게 아내 미키를 만났는지, 2차 대전 당시 군에 끌려갔다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 들려줄 때 나의 상상력은 다른 곳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의 모습을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는데 개인의 환상적 체험으로 끝나 아쉬움을 남겼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요지로가 경험한 것은 이 책의 뼈대를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다. 환서들을 비롯해 전 세계 책들이 날아가서 모이는 라디나헤라 환상 도서관과 사람이 죽은 후 한 권의 책으로 변해 날아간다는 설정은 아주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공식 집계 22만권을 모은 요지로가 과연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을까 하는 의문이 살짝 들었다. 내 경우 쌓아두고 읽지 못한 책이 더 많기 때문이다. 단순히 읽기만 하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책도 적지 않다. 그래서 이런 장서가 이야기가 나오면 그냥 눈길이 간다. 여기에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능청스럽게 풀어낼 때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 수 있지 하고. 나의 바람과 부러움이 곁들여 생긴 부작용이다. 만약 이 소설처럼 책과 책의 방사를 통해 새로운 책이 태어난다면 현재 집에서 그 책을 보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요지로처럼 400평의 거대한 공간이 나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있으면 가능할까? 아마도 마눌님의 눈총에......
후카이의 비밀이 드러나는 것도 사실은 바로 환서에 의해서다. 그는 매년 일기를 썼는데 이 기록이 단절된 적 있다. 바로 군 징집 당시다. 이때의 일기가 환서로 태어난 것이다. 환상 도서관이나 하늘을 나는 날개가 달린 다리 여섯의 코끼리가 등장하는 것도 여기다. 물론 소설 속 현실에서 미키가 죽을 때 한 번 더 이런 환상적인 일이 벌어진다. 혼자만의 경험이 아니라 가족 전체가 보는 앞에서 말이다. 사실 미키는 요지로 생전에는 책을 읽을 수 없었는데 뇌졸중 후 갑자기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요지로가 남긴 유서의 내용이 사실로 밝혀지는 순간이다.
책을 읽으면서 먼저 연상된 작가가 있다. 모리미 도미히코다. 그의 소설을 읽을 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복잡한 듯한 이야기를 하나씩 읽으면서 그 재미에 빠졌듯이 이번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애서가에 대한 환상을 기상천외하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 책 자체가 하나의 기서다. 환서까지는 아니겠지만 기이한 부분들이 상당히 많다. 그리고 읽으면서 꾸준히 느낀 것이지만 이 책 번역 참 어려웠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투와 쉼표를 어떤 식으로 표현할 것인지 하는 것과 엄청나게 많은 주석을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 하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역자가 주석본을 쓰라면 쓸 수 있을 정도란다. 주석이 더 많았다면 아마도 훨씬 힘들게 읽었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편집자와 역자의 선택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