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없는 세월
박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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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수상한 식모들>에서 환상과 현실을 뒤섞어 재미난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최 씨 집안 여자들을 중심으로 지나간 세월을 복기하고 앞으로 펼쳐질 세계를 그려낸다. 그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삶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바구미 여사에서 시작하여 윤희까지 이어지는 기이한 능력은 최 씨 집안의 내력이지만 우리들의 욕망과 희망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비록 그 능력이 신통방통하고 괴이하고 이상하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1988년부터 시작하여 2023년까지 이어지는 긴 시간 동안 세 여자를 중심으로 풀어낸다. 첩살이하던 엄마의 죽음을 보고 본가로 간 미령이 중심에 있다면 그녀를 데려온 명옥과 그 딸 신혜가 다른 한 축을 맡고 있다. 미령의 엄마 선옥이 자살한 후 두 남매 중 미령을 자기 집으로 데려온 것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고모인 바구미 여사를 돌볼 아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바구미 여사는 쌀집 딸로 신기가 있는데 쌀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녀의 놀라운 예언능력은 그 집안의 부를 이루는데 큰 도움을 준다. 그러니 정신을 놓은 중늙은이를 내치지도 못하고 고이 모실 뿐이다. 이렇게 이야기는 시작한다. 

1988년 전두환은 잡혀 들어가고, 그의 업적이라 칭송되던 올림픽은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외형 속에서도 사람들의 삶은 변함없이 이어진다. 작가는 이런 순간들을 포착하고, 그 속에 사람들의 삶을 풀어놓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미령이 얹혀사는 집에서 나름 잘 살고 있고, 명옥은 남편은 쓸데없는 투자와 허세로 고생을 하고, 신혜는 자신을 둘러싼 이상한 능력 때문에 고민을 한다. 그녀들의 이런 삶을 시간 속에 녹여내는데 그 삶들이 우리의 삶과 묘하게 겹쳐진다. 만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그리워하고, 다시 사랑하는 삶의 순환 속에 그들이 놓여 있는 것이다. 단순히 이런 반복만 보여주었다면 지루한 책읽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이 세 여자의 삶의 환상과 현실을 교차시키고, 실제 현실을 그 바탕에 깔아놓는다. 

세 여자가 중심인 듯하지만 자세히 읽다보면 서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공간과 시간이 중심이다.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이 세 여자가 기구하다면 기구할 팔자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하지만 그 속에 펼쳐지는 삶의 모습은 우리의 삶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뜨겁던 사랑은 현실의 벽 앞에 무너지지만 좌절하기보다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고 살아간다. 속고, 속이고, 거짓말하고, 믿고, 믿는 척하는 삶의 현실이 그대로 펼쳐진다. 눈앞에 보이는 진실은 거짓으로 치부되고, 입에 발린 거짓말은 진짜로 찰떡같이 믿는다. 

과거를 복기하고 드러내는 순간이 끝나고 미래를 그려낼 때 모습 또한 지금과 특별히 다를 것이 없다.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거대한 허상이 무너지지만 곧 다른 허상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부자는 더 부유해지고, 어설픈 부자는 사기당하고, 가난한 사람은 변함없이 가난하거나 더 가난해진다. 작가는 이 장면들을 교묘하게 삽입하여 현실의 비틀린 모습을 풍자하고 비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삶은 변함없이 도도하게 흘러간다. 이 거대한 흐름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한 사람 한 사람마다 각각 다른 굴곡을 가지고 있다. 단숨에 읽히지만 그 바닥에 흐르는 슬픔과 삶들이 아련하게 가슴에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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