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고리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4
제롬 들라포스 지음, 이승재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첫 장부터 강렬하다. 그 강렬함은 주인공 시점을 따라가면서 빠르고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빠른 장면 전환과 조금씩 밝혀지는 비밀은 호기심을 자극하고 사람을 책 속으로 끌어당긴다. 하지만 읽다 보면 어딘가에서 본 듯한 느낌을 자주 받는다. 기억을 잃은 남자의 행동에선 로버트 러들럼의 ‘잃어버린 얼굴’을, 잃은 기억으로 현실의 잘못을 좇고 파헤치려는 모습에선 영화 ‘토탈 리콜’이 떠올랐다. 그리고 몇몇 장면에선 명확하진 않지만 다른 작가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드리워져 있다.

 

이야기는 두 축으로 전개된다. 가장 중요한 축은 현재 기억을 잃은 나탕이 자신의 기억을 찾는 과정이고, 다른 축은 약 300년 전 일기 한 권의 내용을 둘러싼 해석이다. 이 둘은 처음부터 직접적인 연관성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누구나 두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나탕이 어떻게 이 일기를 가져왔고, 이 일기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보통의 스릴러라면 이 일기를 둘러싼 수많은 일이 벌어질 텐데 이 소설에서 그런 장면이 없다. 약간 그 중요성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가장 중요한 나탕의 활약은 대단하다.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그 모습을 보면 잘 다듬어진 살인병기 같다. 그의 전력이 궁금해진다.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정부 조직의 스파이 정도가 아닐까 정도다. 그것도 아주 뛰어난 스파이. 하지만 이것은 정답이 아니다. 세계 어느 정보조직도 그를 심각하게 뒤쫓지 않는다. 다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그를 미행하고 납치하려고 한다. 쉽게 그를 살해할 수 있는 적들이 어쩐 일인지 빈틈을 만들어준다. 그 덕분에 그는 몇 차례의 위기를 넘긴다. 하지만 왜 죽이지 않는 것일까? 이 의문은 마지막에 가서 풀린다.

 

시작은 한 아이가 부모들이 살해당하는 현장에서 공포에 떨면서부터다. 쉽게 이 아이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다. 기억을 잃은 나탕의 과거를 풀어내는 중요한 단서다. 마지막까지 작가는 이 과거를 숨겨놓는다. 그보다 그가 발견한 사실과 그를 쫓는 무리 때문에 과거를 찾고자하는 열망이 가득하다. 여기서 그의 활동범위는 무척 넓다. 유럽 북단에서 아프리카까지 오가며 그는 현대사의 비극을 눈앞에 펼쳐 보여준다. 불과 몇 년 전에야 알았던 수단이나 르완다의 종족 분쟁과 대학살이 여기선 생생하게 그려진다. 불편한 사실이다. 이 사실 속에 허구를 집어넣어 악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킨다. 이 점은 상당히 흥미롭다. 르포 작가였던 이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만약 내가 앞에서 말한 작품들을 보지 않았거나 좀더 이전에 보았다면 놀라워했을 것이다. 같은 프랑스 스릴러 작가인 막심 샤탕이나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와 비교해도 그 속도감이나 재미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만의 향기를 아직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익숙한 모습들이 왠지 모르게 다른 작가를 연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나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면서 다른 존재들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너무 약하거나 마지막에 너무 쉽게 악의 존재가 무너지는 장면은 긴장감을 떨어트린다. 현재 조금 아쉬운 점은 있지만 다음 작품에선 어떤 재미를 줄지 기대되는 작가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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