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레논을 믿지 마라
카타야마 쿄이치 지음, 송미정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친다’가 예상외의 대박을 터트리면서 우리에게 다가온 가타야마 교이치. 그 후 몇 편 다른 작품을 읽어보았지만 왠지 나와는 맞지 않는다. 그의 베스트셀러 작품조차 나에겐 그냥 평범하였다. 영화로 만들어진 일본 것과 한국 것 모두 보았지만 나에겐 그냥 그런 영화였다. 차라리 다른 소설이 좀더 재미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번 소설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존 레논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제목과 이벤트 때문이다. 비틀즈에 열광하는 팬은 아니지만 그들이 현대 음악에 미친 영향을 알고 나름대로 좋아하고 존 레논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기 때문이다. 덕분에 ‘호밀밭의 파수꾼’을 한 번 더 읽기도 하였다. 그 소설 역시 나에겐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감성이 메말랐다기보다 접점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가타야마의 소설도 그런 느낌을 받는다. 나와의 접점이 상당히 떨어져 있다고 해야 하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에도 나는 이 소설이 나타내고자 하는 감성이나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상상 속의 존 레논이 주인공과 만나고 이야기 하는 것이나 과거와 현재의 여자 친구에 대한 감성 등의 모두가 가슴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세계와 상상의 세계가 동시에 펼쳐지지만 그 두 세계 어디에도 나는 쉽게 접속하지 못한 것이다. 다만 존 레논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더 가졌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레이와 유리코에 대한 이야기에서 약간의 혼란을 느끼기도 한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두 여자가 화자와 연결되고 감정들을 표출하지만 왠지 건조함만이 나에게 전해진다. 애절한 느낌이나 상쾌한 느낌도 없다. 즐거움도 슬픔도 없는 회색지대에 선 듯하다. 화자를 중심으로 무미건조함이 펴져나가는 느낌이다.

 

많지 않은 분량에 비교적 쉬운 문장이라 읽기 편했는데 나의 이성 한 곳을 건들이고 가는 문장이 있다. 화자 앞에 나타난 존 레논이 자신의 죽음을 아우슈비츠보다 끔찍하다고 한 대목이다. 이유가 아내의 눈앞에서 죽고 자식에게 이별의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흥분하는 것은 일본사람들의 저변에 깔린 인식 때문이다. 2차 대전 당시 원자폭탄으로 당한 피해를 강하게 주장하면서 그들이 가한 폭력에 대해 입 다물고 있는 현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관동대지진이나 남경대학살이나 731부대의 인체실험 등 특별한 것들을 제외하더라도 종군위안부나 강제인력동원이나 여러 지역에서 보여준 학살에 대한 반성보다 그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 더 강하게 주장하기 때문이다. 원자폭탄의 피해가 유전으로 이어지고 엄청난 후유증을 남겼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사전 작업이 없이 너무 했다는 피해의식만 강조하는 모습에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작가의 한 문장에 내가 흥분하여 글을 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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