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우타코 씨
다나베 세이코 지음, 권남희.이학선 옮김 / 여성신문사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이전에 나이 드신 노인분들의 섹스를 보여준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의 평이 갈라졌는데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서 늘 보는 노인들의 삶에 대한 이 영화를 칭찬하였다. 우리가 늘 나이 30이니 40이니 하면서 그 나이가 오지 않거나 그 나이가 되면 성 생활도 연애도 두근거림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 생각들이 잘못되었고, 그 감정이나 생활에 변화가 없음을 알게 된다. 여기선 그 나이를 훨씬 넘은 77살 여인 우타코씨가 있다.

 

이 소설을 읽다 먼저 느낀 것은 연작 러브 스토리다. 한 편 한 편이 독립적이면서 이어져있기에 그런 느낌을 받는다. 각 편마다 우타코씨의 두근거림을 보는 것도 즐겁다. 이 소설이 1984년에 발행되었다는 것을 알고 본 후 새삼 놀랍기도 하다. 무려 20년도 전에 이런 즐거운 소설이 나왔다는 것과 아직 이런 소설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다. 불과 몇 년 전 어르신들의 성생활을 다룬 영화로 들썩인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내가 현재까지 살아온 만큼 살아야 도달할 수 있는 나이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이야기가 처음의 우려와는 달리 상당히 유쾌하고 즐겁고 신선했다. 우타코씨가 세상을 보는 눈이나 삶을 누리는 모습을 보면 배우는 것도 느끼는 점도 많다. 우타코씨 뿐만 아니라 주변 노인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들과 삶에 약간은 놀라기도 한다. 만약 내가 10대나 20대에 이 소설을 보았다면 징그럽다거나 늙어서 주책이라는 등의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들도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한 명의 사람임을 생각하면 너무 당연한 것들이다. 젊음과 설렘을 우리만 누릴 수 있다는 착각과 오만에서 헤어나지 못할 나이를 지났음을 감사히 생각한다.

 

살아오는 동안 가장 듣기 싫었던 것 중 하나가 “~답게 ”나 “~니까”라는 말들이다. 이 접미사가 붙게 되면서 단정 지어지는 일들이 싫은 것이다. 왜 나를 나로 보지 못하고 자신들이 바라는 대로 나를 재단하는지 정말 싫었다. 사람들이 늘 사물이나 사람을 볼 때 그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본다는 것을 알지만 역시 이런 말들은 기분 좋은 표현이 아니다. 여기 이 소설 속 우타코씨도 그렇게 남들에게 정의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들들이 바라는 모습이나 생활뿐만 아니라 며느리들의 생각조차 독립적인 이 77살 여인 우타코씨에겐 불만투성이다.

 

재미있는 대목 중 하나가 며느리들의 전화인데 큰 며느리에게 한 이야기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변질되어 셋째 며느리에 오게 되면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되는 것이다. 또 아들들의 나이가 모두 4-50대인데 그들의 말과 행동을 보면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 자식들과의 대화를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나도 저런데” 하는 부분도 있고, “야! 너무 뻔한 목적이다”라고 웃거나 “그래도 자식이구나”하고 생각하게 된다.

 

온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가 차 동무니 연애니 섹스니 하는 열풍에 휩싸여 있는 와중에도 우리의 우타코 여인은 시류에 흔들리기보다 자신의 삶을 유지한다. 하지만 이 중심을 제대로 잡은 할머니도 가끔 느끼는 설렘엔 더없이 약한 모습을 보인다. 이 설렘이 깨어지는 장면들을 볼 때 마다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느끼지만 덕분에 이어지는 이야기로 즐거움을 보상받는다. 마지막에 남긴 여운은 앞으로 어떤 삶이 펼쳐질지 무척 궁금하기도 하다.

 

사족 하나, 책 속에 나오는 셋째 며느리의 잘못된 단어 사용인 유산택배(원래는 유산분배)처럼 이학선 선생의 약력에서 희수를 고희로 적은 것이 단순히 오타인지 무지인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다음번엔 교정되어 나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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