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느 도망자의 고백
야쿠마루 가쿠 지음, 이정민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7월
평점 :
일본 원제는 <고해>다. 처음엔 원제를 모른 채 읽었다. 모두 읽은 후 우연히 원제를 알게 되면서 작가가 마지막에 들려준 이야기가 완전히 이해되었다. 이번 소설은 이전까지 읽었던 야쿠마루 가쿠의 소설과 조금 다른 느낌이다. 피해자 가족을 중심에 둔 것도 아니고, 가해자에 완전히 몰입한 것도 아니다. 비 오는 날의 뺑소니 사건과 그 사건의 피해자 가족을 보여주면서 하나의 사건이 두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천천히 풀어낸다. 이 사고는 두 가족 모두에게 큰 상처를 준다. 어느 가족이 더 큰 피해를 입었는가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 피해를 수량화해서 나타내는 일은 힘들고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쇼타는 알바 친구들과 술 한잔한 후 집에 들어온다. 여자 친구가 ‘지금 당장 날 보러 오지 않으면 헤어질 거야’란 문자를 보내왔다. 집에 다른 가족들은 없고, 자신이 거둔 길 고양이만 있다. 차에 고양이를 태우고 여친의 집으로 간다. 비 오는 밤이고, 고양이 나나가 이동 장에서 평소와 다르게 운다. 이동 장에 손을 뻗치는 순간 엄청난 충격이 온다. 무언가를 치었다. 백미러에 비친 붉은 빛을 보고 멈추지 않고 그냥 달린다. 다음 적색 신호가 나타날 때까지. 이 프롤로그는 정말 잠깐 동안에 벌어진 이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적색 신호 속에 순간 쇼타의 머리 속을 지나갔을 생각은 그려내지 않았다. 다만 차안에서 쇼타가 느낀 냉기에 대해서만 말한다.
제목에 나온 도망자란 단어 때문에 쇼타가 경찰에 잡히지 않고 계속 도망다니는 것을 예상했다. 하지만 작가는 우수한 경찰에 잡힌 순진한 대학생 뺑소니 사고자를 바로 알려준다. 왜 작가가 차종을 말했는지, 이 차종이 어떤 단서가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쇼타는 자신이 뺑소니란 사실을 숨기지 못한다. 다만 사람을 치었다는 것을 그 당시 알지 못했고, 왜 그 늦은 밤에 나갔는지 거짓말한다. 부모가 변호사를 선임해 재판에 들어가지만 그는 음주, 뺑소니, 살인치사 등의 죄목으로 4년 10개월 형을 받는다. 검사가 구형한 6년에 거의 비슷한 형량이다. 피해자 가족에게 이 편결은 부족한 느낌이다. 그리고 피해자의 남편은 이 재판 과정을 아들에게 녹음해서 와 달라고 요청한다. 왜 그럴까?
2장으로 넘어가면 교도소에서 출소하는 쇼타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엄마가 유일하다. 뺑소니 사고로 유명한 방송 출연 교수였던 아버지는 추락했고, 부모는 이혼, 누나는 파혼했다. 아버지가 방송에 나가지 못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누나의 파혼 등은 솔직히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산산조각난 가족의 현재를 보여준 후 엄마와 함께 살고 특이한 성을 엄마의 성으로 바꾸라고 말한다. 하지만 쇼타는 파혼한 누나를 보는 것도, 자신의 뺑소니 사고를 아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두렵다. 가석방의 기회가 있었지만 사회의 시선이 두려워 그 기회를 차 버린 적이 있었다. 엄마의 도움으로 작은 집을 구하고, 일용직으로 겨우 살아간다. 그의 마음 속에서는 항상 망령이 떠돌고, 그의 과거를 아는 누군가가 지적할 것 같은 두려움이 가득하다.
작가는 쇼타가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변호사가 피해자 가족을 만나 분명하게 사과할 것을 말하지만 황금 같은 20대의 거의 5년을 감옥에서 보냈다는 생각에 이를 거부한다. 제대로 된 반성이 아직 부족하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의 뒷담화를 통해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치는지 알게 된다. 그가 죄의식을 가지고 평범한 일용직으로 건실하게 보낼 때 옆에 다가온 인물은 쇼타를 어둠 속으로 끌고 가려는 자칭 사고사 출소인이다. 그는 아주 조금씩 쇼타에게 다가와 그의 마음에 사회에 대한 불만의 씨앗을 심어둔다. 이 소설에서 쇼타가 과연 어떻게 이 인물을 대처할 것인가 하는 것도 재미 중 하나다. 쇼타를 보면서 범죄자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이고 일괄적인 거부감과 선입견을 돌아보게 된다.
이야기의 또 다른 한 축은 쇼타에게 죽은 피해자 가족이다. 그 중에서 피해자의 남편은 쇼타에 대한 관심이 유별나다. 탐정 사무소를 통해 쇼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그의 아내가 늦은 밤 빗길에 나간 것도 당시 그의 고열 때문이었다. 5년이 흐른 후 그는 치매가 있어 가끔 아들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삶은 다른 누군가의 표상이 되었기에 후배 선생이 자주 찾아온다. 탐정의 얄팍한 상술은 치매 노인의 조사를 더 연장하고, 쇼타가 사는 곳까지 가게 한다. 그가 쇼타에게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복수일까? 그의 마음 속에 담고 있는 속죄는 또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뛰어난 가독성 속에 의문의 씨앗들은 하나씩 꽃을 피운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 왔을 때 원제의 의미가 드러나고, 죄의식과 진정한 의미의 속죄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한 순간의 실수를 이렇게 풀어내면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