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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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로맨스 소설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띠지를 본 다음에야 오래 전 재밌게 읽었던 작가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때도 김혜나가 로맨스 소설을 썼나? 하는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정유정의 추천과 이전에 읽었던 기억들이 책으로 손을 내밀게 했다. 그리고 더 성숙해진 작가의 이야기를 만났다. 처음에는 약간의 혼란을 겪기도 했지만 밀도 있는 문장과 낯선 이국의 삶 속에서 발견한 일상이 눈에 들어오면서 빠져들었다. 요가 수련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작가도 요가를 수련하는 사람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작가의 말에서 요가와 글쓰기에 대한 이약기를 들을 수 있었다.


차문디 언덕. 인도 마이소르에 있는 곳이다. 한참 여행 서적을 읽고, 여행 팟캐스터를 들었을 때 스치듯 이 이름을 들었을지 모르지만 낯선 지명이다. 다른 소설인가에서 요가 수련을 위해 인도 어딘가로 와서 생활하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이 도시에 오는 이유도 대부분이 요가를 수련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요가를 하지 않는 나에게 용어나 자세 등은 너무 낯설다. 방송이나 인터넷 짤로 돌아다니는 요가 자세 외에는 아는 것이 없으니 당연하다. 경치로 유명한 차문디 언덕이라고 하지만 좋은 풍경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인도는 여자 혼자 다니기 쉽지 않은 곳이다. 소설 곳곳에 두려움과 성추행에 대해 나온다. 그때 느낀 감정들은 억울하고 분하고 격렬하다.


이야기는 두 개로 진행된다. 하나는 메이의 마이소르 일상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과거사다. 폰트와 굵기를 달리 해서 구분했다. 어린 시절 이야기는 충격이다. 세상에 그런 아버지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나를 돌아봤다. 가난한 일상, 아버지의 사랑이 없는 유년기 등은 그녀 삶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고모에 대한 기억은 지울 수 없는 낙인이 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모의 자살, 그 후 고모부와 두 딸이 행복한 표정으로 함께 찍은 사진 등이 자신의 가족과 이어지면서 큰 충격을 준다. 그녀는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삶을 산다. 사랑의 결핍은 폭식으로 이어진다. 채워지지 않는 허기는 육체에 큰 상처를 남긴 채 숨었다. 그러다 다시 그 허기가 깨어나 그녀의 삶을 뒤흔든다.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 요한은 선천적으로 체력이 약하다. 약해도 너무 약하다. 죽음의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다. 상당히 부유했던 집안이 요한의 수술과 병원비로 상당히 사라졌다고 한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신자이고, 그곳에서 둘은 만났다. 얼마나 허약한 체력인가 하면 혼자 욕실에서 샤워할 때 수증기가 가득 차면 헉헉거린다. 그래도 사랑은 나눌 힘은 있는 모양이다. 둘이 처음 영화관에 갔을 때 계단에서 주저하는 그를 엎고 올라가는 장면은 너무나도 인상적이다. 처음 밖에서 만날 때 그가 내뱉은 평범한 말 ‘거기 있어요. 내가 갈게요.’ 란 말이 왜 그녀에게 그렇게 강한 울림을 주었는지는 어릴 때 마을버스 사연을 읽고 알게 되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


요한과 헤어진 후 마이소르에 요가 수련을 하러 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도피다. 그녀가 자신의 과거사를 내뱉는 대상은 처음 도착한 호텔의 숙박을 도와준 케이다. 읽다 보면 케이와 진한 사랑을 나눈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만난 시간은 15일 정도다. 육체적 관계를 맺은 것도 아니다. 단지 필요한 순간 그가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삶을 뒤흔들었다. 유부남에, 1년의 반을 여행으로 보내는 그다. 사랑의 밀어를 나눌 정도도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를 잊지 못한다. 채워지지 않는 허기, 나가지 못하는 요가의 진도 등이 밖으로 드러난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안타까움과 아픔을 느낀다.


삶에서 깨달음은 잠깐 왔다 간다. 그 깨달음을 붙잡고, 파고들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힘들다. 마지막에 메이가 차문디 언덕을 걷고 기어서 올라가 발견한 것은 자신이 믿지 못했고 받지 못했던 아버지의 사랑이다. 자신의 곁에서 울고 있는 신이다. 고모의 자살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도 얻는다. 그 결과 중 일부가 그녀의 과거사다. 자신의 삶을 순서에 상관없이 적고 적는다. 이것으로 그녀의 허기와 폭식과 아픔이 해소되었을까? 모른다. 어쩌면 일부는 해소되었을 것이다. 삶은 그 순간을 넘어가면 또 다른 언덕이 나타나 우리를 나아가게 한다. 사족처럼 하나 덧붙이자면 케이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한 여행작가가 떠올랐는데 작가의 말에 그 이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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