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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과 개
하세 세이슈 지음, 손예리 옮김 / 창심소 / 2021년 2월
평점 :
2020년 163회 나오키상 수상작이다. 나오키상을 받았다는 것과 함께 나의 시선을 끄는 것은 작가 이름이다. 불야성 3부작의 작가이기 때문이다. 오래전 <불야성>을 펼쳐 카페에서 단번에 읽었던 그 작가다. 이후 나온 작품들은 살 타이밍을 놓쳤고, 절판되었다. 나의 안일함이 만든 잘못이다. 다행이라면 전자책은 구입이 가능하다. 한자로 쓴 작가의 필명을 보니 이름에 에피소드도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홍콩배우 주성치를 꺼꾸로 읽은 것이다. 인터넷서점 작가 소개에 이 이야기도 나온다. 가끔 이런 작가들이 어떤 상을 받았다는 기록을 보면 ‘받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든다. 유명해서 생긴 착각이다.
미미 여사가 쓴 심사평이 인상적이다. “개를 의인화하지 않고”란 대목은 동물들이 나올 때 의인화를 당연한 듯이 하는 작품들을 자주 본 탓에 더 마음에 와 닿는다. 솔직히 말해 작가 이름과 나오키상 수상작이란 이유로 책 소개를 대충 읽었다. 소설을 다 읽을 때까지 ‘동일본대지진으로 주인을 잃은 개 다몬이 친구인 소년 히카루를 다시 만나기 위해 5년 동안 일본 전역을 떠돌며 만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란 것을 몰랐다. 물론 첫 이야기를 읽고 목차 속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 이야기란 것은 알았지만 5년이란 긴 시간이란 생각은 못했다. 마지막 이야기를 읽고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는 것도 덧붙인다.
작가는 한국판 서문에 개와 25년을 함께 살았고, 부정기 연재를 했다고 말한다. 소설 속 5년의 시간도 이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일본 느와르 소설을 주로 쓴 작가의 이력을 생각하면 이런 고백은 조금 낯설다. 나오키상 수상은 책 판매에도 많은 영향이 끼쳤고, 자신이 한때 오만했다고 말한다. 이런 이야기가 제목과 함께 왠지 모를 훈훈한 이야기 전개를 머릿속에 만들었다. 하지만 첫 단편 <남자와 개>를 읽고 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소설 속에 강하게 자리 잡은 동일본대지진의 여파를 조금씩 느꼈다. 첫 단편과 마지막 단편이자 표제작인 <소년과 개>는 쓰나미 이후 무너진 삶과 그 이후를 다룬다.
개의 이름은 다몬이다. 개 인식표에 이 이름이 적혀 있다. 몸에 인식칩도 심어져 있어 이름과 주인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주인은 연락이 되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른 채 이 개와 함께 산다. 다몬이란 이름을 알아도 자신이 부르고 싶은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이 있다. 인식표가 사라져 자신들이 좋아하는 이름을 붙인 경우도 있다. 이렇게 이어진 여섯 개의 인연과 이야기는 다른 분위기와 상황을 보여준다. 변치 않는 것은 다몬이 늘 한 방향을 쳐다본다는 것과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위안과 안식을 준다는 것이다. “개는 훌륭하다” 것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치매를 앓는 어머니와 간병에 지친 누나를 생각하며 절도범 차를 운전하는 남자, 생존을 위해 도둑질을 할 수밖에 없었고 배신을 당한 도둑, 자신밖에 모르는 남편과 그를 사랑했던 아내의 지친 삶을 다룬 부부 이야기, 자신을 매춘부로 타락시킨 남자를 죽인 후 다몬을 만난 매춘부, 아내를 췌장암으로 잃고 자신도 췌장암을 걸려 홀로 살아가는 사냥꾼 노인, 그리고 다몬이 긴 세월과 거리를 지나 만나고자 한 소년 이야기가 다른 분위기를 풍기며 펼쳐진다. 이 단편들 한 편 한 편이 아주 매력적이고 뛰어난 가독성을 보여준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다가 뭉클해지고, “왜 그렇게 살까!” 하는 한숨을 내뱉고, 읽다가 “뭐지?’란 의문을 던진다. 이 순간들에 다몬은 최고의 친구이자 가족이자 위안이다.
작가는 다몬의 가족으로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다루지 않는다. 동일본대지진으로 삶이 힘들어지거나 어쩔 수 없이 도둑이 되거나 매춘부가 되는 등 각자의 사연으로 낮은 곳에 머문 사람들을 다룬다. 이들은 다몬을 가족으로 대한다. 이 감정은 개와 함께 산 사람이라면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몬을 잘 훈련되고 친밀하게 그리고 전혀 의인화하지 않은 것도 이런 감정을 잘 표현하기 위한 한 방편일 것이다. 작가가 개를 등장시킨 다른 소설도 있다고 하니 출간을 기대해본다. 그리고 번역에서 ‘하느님’과 ‘하나님’을 혼용해서 사용하는데 등장인물이 일본 기독교 신자가 분명하지 않다면 ‘하나님’이란 표현은 올바르지 않다. 좋은 가독성에 작은 방해가 되어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