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창비시선 450
유병록 지음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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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쉽고 빠르게 읽은 시집이다. 앞의 몇 편을 읽은 후 한동안 묵혀 두었다가 이번에 다 읽었다. 얼마전까지 읽은 시들이 조금 어렵게 다가왔다면 이 시집은 상대적으로 공감하는 내용들이 많아 쉬웠다. 가장 먼저 눈길은 끈 시는 짧은 시였다. “양말에 난 구멍 같다 / 들키고 싶지 않다.” (<슬픔은> 전문) 그 다음 시인 <슬픔은 이제>는 처음 읽을 때 그 의미를 몰랐다. 시인의 어린 아들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나에게 슬픔을 숨길 수 있을 때까지 / 모르는 척 / 내가 나를 속일 수 있을 때까지 / 괜찮아진 척 “이란 문장을 읽으니 사뭇 다른 느낌이다.


어린 아들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기 전 나의 시선을 끈 시들은 일상의 감정을 노래한 시들이다. “보잘것없는 욕망의 힘으로 / 나는 살아가지” (<다행이다 비극이다> 일부)라고 말할 때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에 가야지>를 읽으면서 나의 일과를 떠올렸다. 그런데 다시 읽으면서 그 시어들 사이에 숨겨진 감정을 발견하고 순간 울컥했다. <퇴근을 하다가>에서 그가 ”무사한 하루란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라면서 “저기서 / 꼭 제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을 / 제가 하고 있습니다 / 그게 참 마음에 듭니다”라고 할 때 순간 뜨끔했다. 그 앞에 나온 시인이 보여준 직장인의 하루 일상은 누구나 비슷할 것이다. <사기>에서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나를 / 들키고 싶은 나를” 말할 때 먹먹해졌다.


시인의 상실을 알고 다시 읽으니 처음에 흔한 연인과의 이별처럼 읽혔던 것들이 완전히 다르게 다가온다.  <장담은 허망하더라>에서 “다짐은 허망하더라 / 너를 잊지 않겠다 다짐하였는데” 라고 말했지만 출근도 퇴근도 휴가도 가는 일상은 반복된다. 삶이 지닌 무서운 힘이다. 그러나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고통이 끝나면 / 이상하지 / 낯선 고통이 시작되지 “(<너무나 인간적인 고통> 일부) “시간이 지나면 / 고통은 잦아들고 / 잊조 / 다시 살아가리라는 말 / 고개를 끄덕입니다” (<눈물도 대꾸도 없이> 부분) 이성과 감성의 괴리는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아주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라고 외칠 때 나의 지나간 다짐들이 떠오른다. 사정이 생겨 문을 닫았다는 칼국수집을 보고 <지구 따윈 없어져도 그만이지만>이라고 말하면서 “저녁을 뭘 먹을지 고민하다 / 앞으로 칼국수를 먹지 않겠다 다짐”한다. <장담은 허망하더라>라고 말한 그가 다짐하지 않기로 한 그의 다짐을 보면서 평범한 우리의 삶이 떠올랐다. 일상에서 상실을, 감정의 우물에서 퍼내면서 가면을 쓴 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살아가는 그의 모습이 안스럽다. 책 마지막에 ‘시인의 말’에서 “쓰겠습니다 / 살아가겠습니다”라고 적은 글을 보고 다시 울컥했다. 만약 발문을 대충이라도 읽지 않았다면 <미지의 세계>처럼 모르고 오독하고 내 삶의 경험과 연결해서 해석했을 것이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의 산문집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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