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두각시 조종사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손화수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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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소피의 세계>를 아주 재밌게 읽었었다. 3권으로 출간된 책을 정신없이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대로 넘어오면서 나의 이해력이 딸려 재미가 조금 덜했지만 서양철학에 관심있는 초심자용으로 최소의 소설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이후 나온 그의 책 몇 권을 더 샀다. 당연히 그 책 읽기는 기약 없는 일이 되었지만 언젠가 <소피의 세계>를 다시 한 번 읽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가슴 한편에 품고 있었다, 오늘 이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 서점으로 작가의 작품들을 검색하니 내가 놓친 책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다. 음… 이 책들은 일단 미루어 두자.


이번 책의 선택은 단순하다. 앞에서 말한 <소피의 세계>를 재밌게 읽었기 때문이다. 가끔 어떤 책을 선택할 때 작가 이름만 보고 책 내용은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노년의 언어학자를 주인공으로 오늘날 유럽 대부분 언어의 뿌리인 인도유럽어족을 탐구한다고 했는데 솔직히 이 언어 부분은 읽으면서 하나도 이해를 하지 못했다. 나의 외국어 이해 능력도 부족하다. 하지만 이 부분을 잘 모른다고 소설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학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부분에 관심이 있다면 새로운 재미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야코브 야콥센이다. 학교 교사인데 신문 부고란을 읽고 옛 스승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그가 스승과의 일화를 말하는데 유족들이 의심의 눈빛을 보낸다. 고인의 손녀인 윌바가 그의 말에 딴지를 건다. 그와 언어학에 대화를 나누는데 이때만 해도 이 부분이 의미하는 바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소설의 시작에 나오는 앙네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도. 그가 절친인 펠레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이 인물이 실존하는 사람이 아니라 꼭두각시란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펠레 때문에 그가 이혼했다고 했을 때조차도 말이다. 작가는 중요한 사실을 숨긴 채 중간에 하나씩 풀어내는데 이때마다 앞에서 벌어진 일들을 돌아보게 된다.


야코브가 장례식에 가는 것은 그 인물들을 개인적으로 알기 때문이 아니다. 아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습관처럼 찾아가는데 그 이면에는 대가족에 대한 선망이 깔려 있다. 장례식장에 가기 전 그는 고인에 대해 조사하고, 그와의 관계에 대해 치밀한 이야기를 만들어 놓는다. 모른 채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가 만들어낸 이야기들이 사실처럼 다가온다. 많은 장례식장에서 큰 문제없이 지나갔는데 한 장례식장에서 그는 큰 실수를 한다. 고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일로 앙네스에게 관심을 받고, 그녀에게 편지를 쓰게 된다. 이 소설이 편지 형식으로 시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읽다 보면 두 번 크게 놀란다. 펠레가 꼭두각시란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과 장례식장의 고인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란 사실이다. 펠레와 대화를 나누면서 언어학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쌓고, 어린 시절 왕따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지만 펠레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아내와 불화가 생기고 이혼하게 된다. 만약 인형극으로 이 대화를 본다면 재밌는 무대가 될지 모르지만 일상 생활에서 자주 본다면 소설 속 그의 학생들 같은 반응이 나올 것이다. 장례식장의 고인에 대한 가공의 관계는 이 소설이 풍부한 지식을 전달하는 지식소설임을 알려준다. 고인의 분야에 따라 전달하는 지식은 바뀐다. 물론 그에 따라 언어학에 대한 이야기도 같이 나온다.


거짓과 사실이 교묘하게 섞였고, 오해와 진실이 서로의 이해 속에서 엮인다. 윌바와의 만남이 그의 거짓을 밝혀내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사실을 오해하게 만들기도 한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서로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좀더 편안하게 대할 때 이 둘의 관계는 미묘한 흐름을 가진다. 아는 것을 안다는 사실이 주는 안정감과 약간의 불안감이 이 둘의 대화 속에 묻어 있다. 그리고 처음 그가 에리크 룬딘의 장례식장에서 느낀 데자뷔는 후반부에 예상하지 못한 사실을 풀어놓는다. 그의 이야기 중간 중간에 나왔던 몇 가지 사실들이 엮이면서 만들어진 사실이다. 소설을 다 읽을 때는 발견하지 못했는데 이 글을 쓰면서 그 문장을 발견하고 이 소설이 얼마나 치밀하게 구성되고 전개되었는지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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