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마리아나 엔리케스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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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아르헨티나를 배경으로 하는 12편의 단편 소설을 실고 있다. 아르헨티나 소설하면 그 유명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먼저 떠오른다. 그 외 작가는 솔직히 잘 모른다. 검색하면 몇 권의 책과 작가가 나오지만 제목만 겨우 알거나 오다가다 본 작품이나 작가들 일뿐이다. 자세하게 들어가면 몇 권은 아! 하고 감탄할지 모르지만 그 정도로 낯설다. 이 낯섦을 뚫고 라틴 아메리카 고딕 호러라는 독특한 분위기가 가졌다는 말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고딕 호러가 남미라면 어떤 느낌일까? 호기심과 기대가 교차했다.

 

이 소설집의 첫 작품 <더러운 아이>는 내가 알고 있던 부에노스아이레스 환상을 단숨에 깨트린다. 탱고와 멋진 관광지의 이미지가 이 작품으로 산산조각났다. 물론 큰 도시의 이면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작가가 묘사하고 설명한 동네의 모습은 그만큼 강렬하다. 남미의 미신이나 주술 등과 결합해 경제적 퇴락과 부패 등이 만들어낸 풍경이 강한 인상을 남긴다. <오스테리아 호텔>은 스티븐 킹의 단편 소설을 읽는 느낌을 준다. 과거 군사 독재 시절 경찰학교가 호텔로 바뀌었다는 사실과 이것을 말했다고 해고된 아버지와 이에 대한 작은 복수가 두 소녀가 본 무시무시한 환상으로 완전히 이미지가 바뀐다. 아르헨티나 군사 독재 시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마약에 취한 세월>은 1989년부터 1994년까지 연도별 기록을 담고 있다. 무능한 부모를 비웃고 마약과 음악에 취한 청춘들의 모습은 그렇게 낯설지 않다. 마약 대신 술을 넣고 보수적인 부모에게 대항하던 우리를 대입하면 어떨까? <아델라의 집>은 가장 호러적인 작품이다. 왼팔 없이 태어난 소녀 아델라, 파블로 오빠는 공포영화를 같이 보러간다. 화자는 부모가 반대한다. 영화 내용 등을 화자에게 말하는 것을 막지는 않는다. 아델라와 오빠는 마을 폐가에 끌린다. 폐가 앞을 서성이다 결국 들어간다. 그리고 집안에서 아델라가 사라진다. 화자가 본 환상은 또 무엇일까?

 

<파블리토가 못을 박았다 : 페티소 오레후도를 떠올리며>란 긴 제목의 단편은 다크 투어리즘을 다룬다. ‘범죄 및 범죄자 투어’의 가이드인 파블로 앞에 어느 날부터 어린이 연쇄살인마 페티소 오레후도의 환영이 나타난다. 이 연쇄살인마의 기록을 보면서 섬뜩함을 느끼고, 아이의 탄생이 만들어낸 부부의 갈등이 눈길을 끈다. <거미줄>은 권태로운 결혼 생활과 파라과이의 폭력적인 무질서가 처음에 시선을 끌었다. 정의로운 몸부림이 만들어낼 가혹한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후 어떤 숲에 차가 멈추면서 생긴 이야기는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하다 로맨스로 넘어간다.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학기말>은 환상과 자해를 다룬다. 자해를 해야만 하는 병이 있다는 것을 아는데 이 병에 소녀 마르셀라가 걸린 것일까? 마르셀라가 화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숨을 죽이고 이것을 듣고 있던 다른 소녀들이 더 인상적이다. 마지막 장면은 역시 여운을 남긴다. <우리에게는 한 점의 육신도 없다>은 두개골 하나를 주워 온 후 칼라베라란 이름을 붙이고 장식하는 화자 이야기다. 화자는 뚱뚱한 남자 친구보다 베라에게 더 신경을 쓴다. 이 과도한 몰입과 애정이 의미하는 바를 열심히 생각해보는데 쉽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거식증이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가 더 있을 것 같다.

 

<이웃집 마당>은 운 좋게 좋은 집을 구해 이사 온 후 이야기다. 화자는 이웃집 마당에서 발목에 쇠사슬이 묶여 감금된 남자 아이를 발견한다. 환상일까? 사회복지사였다가 해고된 후 정신과 치료를 받는데 해고 사유가 나온다. 이것과 관계 있을까? 실제 그 집안으로 들어간 후 일어나는 일들은 스산한 느낌을 준다. <검은 물속>은 부패 경찰관들이 소년 두 명을 강물에 빠트려 죽인 사건으로 시작한다. 오염된 강물에서 소년 한 명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사실이 알려진 것도. 기소 준비를 하게 된 것도 이 경찰관들이 동료들에게 자랑했기 때문이다. 이런 부패한 경찰관들이 있다니 놀랍다. 그러다 그 소년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빈민가로 들어간다. 그곳이 얼마나 부패하고 무서운 곳인지 그곳에 거주하는 신부님의 행동으로 보여준다.

 

<초록색 빨간색 오렌지색>은 아르헨티나 히키코모리 이야기다. 남자 친구 마르코가 방안으로 들어간 후 유일한 대화 공간은 인터넷 채팅창이다. 마르코가 들려주는 일본 귀신과 히키코모리 이야기가 왠지 낯익다. 표제작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실제 일어난 방화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고 한다. 작가는 이 현실을 좀더 극단으로 몰고 가 하나의 현상처럼 만들고, 이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저항은 스스로 분신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이 의식마저 공권력은 못하게 막는다. 소설 자체만으로도 끔찍하다. 아르헨티나 사회나 문화를 좀더 안다면 더 이해가 깊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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