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번째 증언 - 2009년 3월 7일, 그 후 10년
윤지오 지음 / 가연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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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째 잘 싸우셨습니다. 정말 고생 많았고요~책 받아보고 바로 다 읽었네요!!! 용기에 계속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위해. 피해자가 회복되고,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할 그 날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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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보듬 홈스쿨 - 아이의 행복한 오늘을 위한 선택 바른 교육 시리즈 1
누리보듬(한진희) 지음 / 서사원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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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중 누리보듬 홈스쿨 중 '누리보듬이 뭘까?' 홈스쿨은 알겠다.

나도 홈스쿨을 한다. 우리 가정은 홈스쿨로 양육한다.

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 가정은 종교적 이유로 홈스쿨을 교육으로 택했다.

아이의 행복은 그 다음이었다.​

우선 이 책의 부제 '아이의 행복한 오늘을 위한 선택'이란 부제는

어느 정도 맘에 들기도 하고 맘에 들지 않기도 하다.​

진짜 행복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아이들이 행복하려면 홈스쿨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느껴진다(맞다! 조금은 오바한 것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왜 홈스쿨을 했나? 우리 가정은 왜 홈스쿨을 해야 했나?

아이가 커 가면서 형편상 방과후 홈스쿨로 홈스쿨을 다져갔고

이제 큰 아이는 중2가 된다. 막내는 초2가 되고.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간 홈스쿨에 대해 질문하게 되었다.

그렇다. 다시금 질묺하게 되었다.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닌지?

 

나는 목회자다.

그렇다보니 나로 인해 가족들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목회자 가정의 구성원이 되었다.

어떻게 하면 다음세대의 아이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가르칠 수 있을까 고민했었다.​

그래서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 홈스쿨에 대해 알아봤고 하기고 마음 먹었다. 그때가 2004년!

그런데 여러 이유로 늦게 늦게 시작하여 이제 열심이다.

그러면서 다시 생각해 본다. 무슨 이유로 홈스쿨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나는 종교적 이유로 홈스쿨을 시작했다.

대학에 안 보내도 좋았다. 당시에 나는 대학에 보내는 것이 중요한 목표였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 노는 것도 중요했다. 하고 싶은 것을 신나게 하는 것도 그렇고!

그런데 진짜 이유는 바로 아이들의 신앙심 때문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신앙으로 잘 양육할 자신이 없었다.

내가 자라왔던 학교가 그러했고,

막상 아이가 태어나고 학교에 보내려니

내가 자라왔던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책 한진희씨의 학교에 관한 이야기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적어도 홈스쿨을 하겠다고 생각하는 부모 중에

크리스천이라면 또 다른 렌즈를 장착했으면 한다.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내 자녀에 관한 교육 방법' 중 하나님이 어떤 것을 기쁘게 여기실지.

나는 학교에 보내는 것보다 가정에서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 주신 자녀를 잘 양육하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이 나에게는 홈스쿨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홈스쿨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나는 홈스쿨에 직접 참여할 기회를 늦게 얻게 되었고, 아내가 그 자리를 전적으로 차지하였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신앙을 가지고 계신 크리스천이라면 아이의 행복뿐만 아니라

나에게 선물로 자녀를 주신 하나님께서 나의 자녀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자녀의 기질로 보아 가장 하나님을 잘 배우고 예배하고 자라게 할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그 결과 홈스쿨이 최적이라는 선택을 했으면 한다.

여기서 학교 교육에 대한 나의 입장을 밝히고 싶다.

크리스천이라면 학교 가면 안 된다는 것도 아니고,

크리스천이라면 홈스쿨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학교는 학교다. 가르침이 오고 가는 자리이다.

그러나 내가 배우고 자란 학교는 가르침이 오고 가지는 못했던 것 같다.

가르침이 왔고, 그 가르침은 나를 딱딱하게 만들었다.

학교에 가지 않으면 사회성이 없다고 한다.

학교에서 단체 생활을 하지 않으면 사회성이 결여된다고 말하며

학교에 아이를 꼭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서도 이러한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라 확정하며

학교 교육에 대한 입장을 다시 밝힌다.

학교에 가도 사회성이 결여되고

학교에 안 가도 사회성이 좋아질 수 있다.

오히려 지금의 학교라는 공간에 갇혀 공부만 하는 것이야 말로

사회성의 결여를 불러 일으키기에 딱 좋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자의 책 92~95쪽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저자의 학교에 대한 생각에는 전반적으로 동의하면서 한편으로는

일선 학교 현장에서 묵묵히 자신의 사명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정말 이 책에서 말하는 학교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들에 대해 말 그대로 동의하는지?

너무나도 궁금한 지점이다. 그래서 학교 선생님들과의 대화의 시간과 만남의 시간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제안해 본다. '<누리보듬 홈스쿨>을 책을 읽고 반론을  

펴실 선생님들과의 만남의 시간' 

특히 학교 교육 관련해서는 이 책의 87쪽을 갖고 선생님들과 이야기하면 좋겠다.

학교에서부터 지식의 개념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어떡할 것인지?(89쪽 참조)

달라졌다고 하지만 그저 흉내내기식 전환만 있는 것은 아닌지?

인코딩이 지금 당장 초등학생에게 왜 필요한지,

왜 모두들 유튜버가 되어야 하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도 홈스쿨을 하고 있구요,

혹 홈스쿨을 하고 싶으시다면 이 책의 이 부분을 읽어 보시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저처럼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할지라도

홈스쿨을 하실 이유가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Part 3.", "Part 5", "Part 7"

홈스쿨을 하고자 하는 방향성이 있는데,

고민이 있다면 위의 세 파트를 읽어보시길 권한다.

 

세 파트 가운데 특별히 3장면이 기억난다.

하나는 취학 전 반디가 어렸을 때 대전 시대를 교육의 현장을 삼았던 것.

두번째는 친구들이 학업에 찌들어 있을 때 반디는 열심히 축구를 했다는 것.

그리고 한자리 차지한 디지털 피아노(다른 친구들은 이런 호강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세번째는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빠르기와 속도로 공부를 이어 나간 것이다(인문학과 관련하여 폭넓은 독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나도 공감한다. "Part 7" 참조).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반디와 함께 하는 유학생활이 등장한다.

여기에서는 통괘함을 느꼈다.

엄마표로 공부해 왔던 반디가 성장하여 오히려 엄마 누리보듬을 도와주고 역전이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형화된 틀에 갇혀 공부하는 학생들과 대조는 한편으로는 기쁜 일이었고

한편으로는 서글푼 일이 되었다.


그렇다고 모든 홈스쿨러들에게 이런 꿈같은 결과가 있는 것은 아닐터,

처음에 먹었던 그 마음대로 나는 왜 홈스쿨을 하는가?

바로 하나님 형상 닮은 자녀로 양육하는 것 그것이 목표이기에.

나는 오늘도 홈스쿨을 하려 한다.

아무쪼록 이 책의 결과에 훅하고 빠져서 홈스쿨을 결심하질 않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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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마로 카르마를 구원하자!

리더가 스스로 고통을 짊어지려 하지 않으면 따르는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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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워크의 배신
토마스 바셰크 지음, 장혜경 옮김 / 모멘텀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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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래 전에 읽고 이제야 글을 남긴다. 제목 팀워크의 배신.

그런데 제목 위에 날린 글이 이목을 끌었다.
"몰리다니면서 성공한 사람은 없다."

몰려다니면서 성공한 사람은 없다란 표지의 짧은 글.
맞는 말이기는 하다.
하지만 몰려다니면 왜 안 된다는 말인가?

책을 읽어 나갔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한국적인 상황에서 무조건 공동체와 조직에 순응하라는 것.
그것에 대항하라는 말이었다.

몰려다닌다는 것은 공동체와 조직의 뜻과 분위기가 중요하기에
그것을 따르라는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극구 그 명제에 반대한다.
몰려다니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을 성공과 결부시키며 여러 사례들을 꺼낸다.

이를테면 이런 말이다.
역사 속에서 성공한 사람은
타인과 함께 몰려다니거나 끌려다닌 게 아니라
독창적인 사고와 행동을 삶 속에서 이끌어 내었고,
그러한 과정에서는 갈등과 충돌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과 충돌을 피하지 말라는 것.
그것이 이 책의 요지.

나는 공동체도 중요하다고 본다.
개인의 창의성과 독창성으로 인해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도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소수라 할지라도 갈등과 충돌을 통해서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도 좋겠지만,
차라리 충돌로 인해 공동체의 아픔이 수반된다면
오히려 천천히 움직이며 나가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가난하게 살면 어떤가?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더 좋을진대...
물론 저자의 초점은 화목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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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교회는 예수님의 세족식을 왜곡했을까? - 우리가 외면해 왔던 성경 속 그 말씀들
오대식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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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하나.


신부님이나 승려들이 요즘 대세다.

대세라는 말에 권력을 싣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여기서 말하는 대세란 영향력이다.

신부님이나 승려들이 하는 말에는 영향력이 있다.

그말은 즉, 승려나 신부님의 말에 대중들이 공감을 한다는 것.


생각 둘.


목사들을 생각해 보자.

목사들만큼 말을 많이 하는 성직자도 없지 않다.

기본적으로 새벽 설교, 수요 설교, 금요 기도회, 주일 설교.

교회의 형편에 따라서 담임목사가 전담하기도 하고,

부교역자와 나누어서 하기도 한다.


생각 셋.


신부나 승려의 말에는 영향력과 공감력이 있다.

목사의 말(목사는 말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한다.)에는 영향력과 공감력이 없다. 

아니, 없다라는 말은 부정적이며 단정적이다. 이것을 객관화시켜 현상적으로 말하면,

목사의 설교는 대중들에게 영향력과 공감력을 주지 못한다.

여기서 대중들로 국한한다.

왜냐하면 교회 내 다수의 성도들에게는 영향력과 공감력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 넷.


이제 절망적인 수준에서 논해보자.

목사의 설교를 대중과 공감을 떠나

교인들만을 대상으로 하여 얼마나 설교(즉, 하나님의 말씀)를 

제대로 진실하게 대언(전달하는)하는지 그것이 문제다.


생각 다섯.


여기 왜 교회는 예수님의 세속식을 왜곡했을까?, 라는 책은

높은 뜻 정의교회 오대식 목사님의 설교를 모아 펴낸 것이다.

여기에 실린 설교문은 세상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읽을까 싶냐마는,

그러나 교회 내 교인들은 이 설교문을 읽고

진리의 말씀에 접근하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전달했다는 측면보다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목사님의 몸부림이라고 할까.

그것들을 우리가 읽고 같이 묵상해 본다면,

왜곡된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조금이라도 생기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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