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기도
셰인 클레어본 & 조너선 윌슨하트그로브 지음, 이지혜 옮김 / IVP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행동하는 기도를 읽고 나름 의미있게 다가온 부분 중 일부를 요약 발췌 정리했다.

-‘기독교는 원래 그런 것이었다’(75쪽에서 밑줄 친 말)-

 

 

1. 새로운 가족의 비밀

 

 

32~33쪽

복음서에 등장하는 다음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족의 비밀을 알려 주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첫째가 꼴지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막 10:29~31)

 

 

-> 예수님은 우리가 재산과 가족을 포기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충성하면 더 풍성한 새 가족을 맞게 된다고 말씀해 주신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의 흡사한 앞뒤 목록에 차이가 있다. 뒤의 목록에는 추가 보너스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박해다. 세상과 다른 경제 질서를 취하는 사람들에게는 박해가 따를 것이다.

 

-> 그런가 하면 뒤의 목록에서 빠진 것도 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다. 우리는 다시 태어나면서 생물학적 가족을 떠나게 된다. 이제 우리에게는 전 세계에 형제 자매와 어머니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마가가 아버지를 빠뜨린 것은 매우 의도적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마 23:9에 “또 너희는 땅에서 아무도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 한 분뿐이시다.”

 

2. 초기 어느 그리스도인의 말처럼, “우리에게 집은 없지만 가정은 많다.”

 

34쪽

 

예수님은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들고 가지 말라고 명령하시면서 가정이 많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짐을 싸지 말라는 것은 곧 어딜 가나 그것들을 어느 정도 구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제자들은 금욕주의자들처럼 가난을 실천했다기보다 상호 의존이라는 새로운 비전을 품고 하나님이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을 신뢰하며 길을 떠난 것이다.

교회는 손대접을 실천하는 곳일 뿐 아니라 손 대접을 받는 곳이기도 했다. 교회는 ‘우리’와 ‘남’의 경계가 무너지는 곳이었다.

 

셰인이 아는 영국인 부부는 기억할 만한 좋은 예이다. 이들은 자녀가 없었다. 그래서 제인이라는 임신 6개월째 된 여성을 만났는데, 갈 곳 없는 신세였다. 부부는 제인에게 함께 지나고자 제안했다. 뒤의 얘기는 책을 참고하시길!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가정이 있음을 보여주는 한 예다. 우리도 이렇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나도.

 

3. 가족 가치관의 확장

 

36쪽

 

마가복음 3:31~35을 보라.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예수님은 가족을 미워하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고도 하신다(눅 14:26).

 

->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가족 사랑의 한계를 재정의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일 한 가지는 친 어머니께 새 아들(요한)을 소개하고, 요한에게 새 어머니를 소개하신 것이다.

 

37쪽

 

‘나의 아버지’라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 아버지’에 대한 배신이다. 우리가 같은 형제 자매들을 부인한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거듭남의 문제가 되기 시작한다. 알다시피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는 끔찍한 역기능 가정이라서, 음식을 쟁여 두고 사는 자녀들이 있는가 하면, 굶어 죽는 자녀들도 있다. 어떤 사람은 집에 방이 남아도는 반면, 노숙을 하는 사람도 있다. 가족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일들이 서슴없이 자행되고 있는 형편이다.

 

4. 기독교 공동체는 하나님의 이름에 걸맞게 살도록 주어지는 선물이다.

 

47쪽

 

우리는 우리 요청, 즉 지금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오게 하며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 달라는 요청에 응답이 되는 공동체로 변해 간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포함하는 확대 가족에 소속되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희생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주는 법을 배우고 있는 다른 이들의 공동체를 얻게 된다.

 

71쪽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은 다 위선자야라고 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참나, 당연하지, 공동체로 모일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이 필요한 약골이자 위선자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거라고. 우리는 절대 혼자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데, 혼자 살지 않아도 된다니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5.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경제

 

49쪽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면서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데서 하나님의 경제를 구하는 것으로 곧바로 넘어가신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빚진 사람의 빚을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빚을 탕감하여) 주시고.”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삶의 방식을 구한다면 돈 문제를 반드시 다뤄야 한다는 것을 아신다.

 

93쪽

 

공동체에서 함께 살면 사람들을 잘 알게 되어 그들이 기본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하는 일이 뭔지 볼 수 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들을 위해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공동체다.

 

6. 가난이 끝났다.

 

55쪽

 

초대교회 사람들은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을 새로운 공동체의 경제 나눔에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계속해서 사도행전은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행 4:34). 그들은 빈곤을 종식시켰다. 교회 탄생일인 오순절의 한 가지 표적은 가난이 끝났다는 것이다. 서로 형제자매가 되어 사랑하는 법을 배운 하나님의 자녀들은 공동체에서 가난을 몰아냈다.

 

7. 자선 단체

 

58~59쪽

 

사람들은 자선 단체에 기부를 한다. 자선단체는 우리와 가난한 사람을 연결해 주는 브로커 역할을 한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가난한 사람들과 친구가 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굶주린 형제자매들과 나란히 앉아서 밥 먹을 일이 없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없다.

… 함께 살아남는 법을 배우던지, 홀로 바닷 속으로 가라앉든지 둘 중 하나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이 바로 교회의 경제다.

 

8. 교회의 유혹

 

72~73쪽

 

콘스탄티누스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회도 늘 유혹에 맞서 왔다. … 개혁주의자든 교회 전략가든 큰일에 혹하기는 쉽다. 개혁이나 운동과 무조건 사랑에 빠져서도 안 된다. 교회 성장과 공동체 또는 사회 정의의 비전에 경도된 나머지 주변 사람들을 돌보는 것 같은 작은 일에 소홀하기가 얼마나 쉬운가.

 

본회퍼는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공동체라는 꿈을 사랑하는 사람은 공동체를 파괴하지만,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고 말한다. 교회의 사명과 비전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회의나 모임에서는 심하게 분열되는 교회가 많다.

 

74~75쪽

 

어느 공동체 중산층 학부모의 작은 실험. 각종 연장과 잔디 깎는 기계를 공유하고 같은 세탁기로 함께 빨래를 하기. 빨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재밌는지 몰랐다. 오래지 않아 공동 정원을 만들고, 공동 육아를 하기 위한 기초 작업도 마쳤다. 그 중에는 함께 살려고 살림을 합친 사람들도 있었는데.

하나님 나라가 급진적으로 보인다면, 우리가 안주하고 있는 기독교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표시가 분명하다. 굶주린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고, 노숙자들에게 집을 열어 주고, 원수와 화해하는 것, 기독교는 원래 그런 것이었다.

 

예수님이 “악을 멸하라” 거나 “이 세상에서 악행자를 몰아내라”고 하지 않으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라고 하신 점이 눈길을 끈다. 불편한 이웃들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짐이다.

 

9. 교회가 끝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85쪽

 

낙태를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일관성 있게 생명을 존중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오늘날 교회에 가장 중요한 질문은 기독교가 정치적인지 아닌지 여부가 아니라, 기독교가 어떻게 정치적인지다.

 

87~88쪽

 

예수님의 데뷔 설교보다 고별 설교가 훨씬 더 긴 이유가 있다. 요한복음 17장에 이르러서 때가 이르렀다는 말씀으로 기도를 시작하신다. 예수님이 자기 때라고 하신 것은 바로 온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보여줄 수 있는 순간을 말한 것이다.

 

93~96쪽 : 다린과 미건의 이야기.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귄 할머니와 함께 산 이야기. 다린과 미건은 결국 그들의 기도에 그들이 응답이 되기로 했다.

 

97쪽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획기적인 일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날마다, 되풀이 되는 실수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혁명을 부르짖지만, 설거지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10. 독특한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는 공동체

 

104쪽

 

성 프란체스코는 십자군 전쟁 기간 동안에 무슬림들을 방문하고, 태양을 향해 찬송가를 불렀다.

 

108쪽

 

하나님은 교회라는 특별한 백성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려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중요.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리시려는 계획이 있다.(엡 3:10)

 

109쪽

 

예수님은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않기로 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 교회 역사에 기록된 아름다운 수도사들은 문화 난민이었다. 그들이 사막으로 간 까닭은 세사에서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세상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