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람 - Wat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옛날 옛적에 [시티 오브 조이]라는 영화가 있었답니다. 너무 어릴 때 봐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작고한 패트릭 스웨이지가 출연했던 게 생각이 나네요. 지금도 각종 영화나 만화, TV에서 패러디의 단골 소재로 삼는 [사랑과 영혼]의 주인공 말입니다. 늦게나마 별세하신 패트릭 스웨이지 씨께 명복을 빕니다.

이 영화를 얘기할 때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소재가 있습니다. 바로 신부가 시집갈 때 갖춰야 할 [지참금]이라는 제도입니다. "지참금 없는 자, 결혼도 없다" 가 지참금 제도의 요지죠. 참 불합리한 제도이지만 아랍권 국가에서는 지금도 당연하게 통용되는 제도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가 나온 게 1993년입니다. 정말 옛날 얘기처럼 들리지만,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이들 국가에서 여성 인권이라는 개념의 진전은 별로 바랄 수 없을 듯합니다. [아쉬람]이 무려 2010년 올해에 출시된 작품이니까요. 

[아쉬람]은 인도에서 여성이 남편을 잃었을 때 강제적으로 수용되는 곳을 말합니다. [아쉬람]에 수용된 과부들은 이 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면서 남편의 명복을 기원한답니다. 이 곳에 들어선 순간 여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권리, 인권은 박탈당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어찌 보면 인권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곳에 8세 소녀 "쭈이야"가 들어오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8세에 갓 결혼한 어린 새댁 쭈이야, 8살에 결혼한 것도 서러운데 결혼식 다음날 남편이 죽어 버립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쭈이야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과부들의 쉼터 "아쉬람"으로 오게 되죠.  

영화는 쭈이야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여줍니다. 수천 년 동안 지속된 관습은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합니다. 8살 어린이가 과부가 되어 평생 동안 골방에 갇혀 살아야 한다는 잔인한 현실도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관습 앞에서는 전혀 불합리한 것이 아닌,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인습에 눈이 먼 어른들 앞에서도 쭈이야는 어찌나 천진난만한지 모릅니다. 튀김과자 하나만 먹어 보고 싶다는 할머니에게 쭈이야는 노점에서 파는 튀김과자를 자신이 먹지 않고 할머니께 싸다 드립니다. 튀김과자를 먹고 나서 할머니는 돌아가셨지만 말입니다. 때묻지 않은 소녀의 천진함과 인도판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구경하고 싶으신가요? 이 영화 강추입니다. 



왜 이 영화가 인도판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냐고요? 이 훈남훈녀를 이어주는 메신저 역할을 바로 "쭈이야"가 도맡았기 때문입니다. 18살 소녀와 신지식으로 무장한 도련님의 풋풋한 사랑은 [아쉬람]의 과부라는 이유로 좌절됩니다. 아참, 이 도련님 영화에서 보면 되게 멋있습니다. 아랍권에 미남 미녀가 많다는데 진짠가봐요. 



이런 아이가 골방에 갇혀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게 믿어지십니까? 이 나라의 관습으로 보면 그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보편적인 인류의 윤리로 봤을 때는 절대로 그게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왜 영화 속의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눈앞에 보고서도 그걸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동화 속 주인공인 [벌거벗은 임금님]을 떠올렸습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은 어린이용 동화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철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인식론의 한 부분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8살 어린이가 과부가 되어 쉼터에서 평생을 마쳐야 한다는 것"이라는 현실에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그 현실은 아무런 재제 없이 그대로 이어질 것입니다. 과연 그게 타당한 일일까요?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 "저 임금님 벌거벗었어!"하고 외쳐준 아이가 없었다면, 임금님은 그대로 자신이 정말로 옷을 입었다고 믿고서 온 나라를 돌아다녔을지도 모릅니다. 



예쁘죠?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깔랴니입니다. 아쉬람의 관습을 이겨내고 사랑을 쟁취할 뻔... 했지만, 반전이 있습니다. 영화에서 확인하세요. 

 

깔랴니의 혼인을 축하하면서 아쉬람에서 벌어진 잔치, 쭈이야의 환한 웃음이 애처롭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기뻐했던 깔랴니의 결혼식은 취소되고, 아무리 발버둥쳐 봤자 아쉬람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은 깔랴니는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둔 채 이승에서의 슬픈 삶을 스스로 끊습니다. 이 애처로운 이들에게 희망은 없는 것일까요? 이 영화에는 두 사람의 주인공이 있습니다. 18살의 꽃다운 소녀 깔랴니와 8살 철모르는 과부 쭈이야는 나이를 초월한 친구가 되지만, 두 사람이 맞이한 미래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깔랴니는 좌절을 의미하는 캐릭터입니다. 물론 그녀에게도 나라얀이라는 구원자가 있었지만, 구원자는 결국 현실의 거대한 벽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쭈이야는 어떨까요? 쭈이야 역시 깔랴니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아쉬람에 수용되었고, 생계를 위해 남성들의 성노리개로 보내집니다. 그러나 쭈이야의 구원자는 돈이 많지도 않고 신지식으로 무장한 인텔리도 아닌, 아쉬람에서 반생을 보내온 중년의 과부 사꾼딸라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쭈이야를 구원하는 데 성공합니다. 마하트마 간디가 탄 기차를 향해 큰 소리로 외치는 사꾼딸라, 그녀의 외침은 이 영화가 세상에 알리고 싶은 메시지이자,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 그 자체입니다. 

"도와주세요! 이 어린 것이 과부라구요!" 

이 대사가 의의를 가지는 이유는 드디어 현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등장했다는 것 때문입니다. 아무도 쭈이야가 과부라는 사실에 의문을 갖거나 부정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부수지 못했던 관습이라는 거대한 벽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상류층 인텔리 나라얀이 아닌 평범한 아줌마인 사꾼딸라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감독의 의도는 아직도 잔존하고 있는 아쉬람 제도 뿐 아니라 그에 못지 않은 전근대적 관습들을 그만 버리자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감독이 바라는 혁명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명백합니다. 그는 특별한 사람이 아닌 평범한 대중들이 스스로 이러한 담론에 참가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영화는 간디가 타고 있던 기차에 우연히 동승한 깔랴니의 약혼자 나라얀이 사꾼딸라의 품에 안긴 쭈이야를 힘차게 끌어안는 것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과연 인도라는 거대한 벌거벗은 임금님은 사꾼딸라가 외친 자그마한 목소리를 들었을까요? 감독은 엔딩에 작은 멘트를 덧붙였습니다. 아직도 아쉬람 제도는 인도 곳곳에 성행하고 있고, 수많은 여성들이 그곳에 수용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이 영화는 상영된지 좀 지난 영화입니다. 그러나 IPTV를 이용하면 언제든지 보실 수는 있습니다. 저는 LG텔레콤을 이용합니다. COOK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이 영화 말고도 아랍권 여성에 대한 책에는 이번에 들녘에서 나온 이런 책도 있습니다. [페르시아의 신부] [아쉬람]의 울적한 분위기와는 달리 아줌마들의 생기 넘치는 수다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인터넷 서점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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