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10일이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서점을 뒤지던 때도 있었건만, 요즘 라이트노벨 시장엔 한마디로 물건이 별로 없다. 애 보기에 바쁜 나 대신 라노베를 공급해 주는 건 주로 남편과 그 친구였다. 매번 고맙게 받기는 하지만, 남이 골라 주는 거랑 내가 직접 나서서 고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게다가 골라다 주는 건 왜 하나같이 남성향이냔 말이다.  

다행히 요 몇년간은 달님공주도 제 생활리듬을 만들어 준 탓에 나에게도 짬짬이 노는 시간이 생겼다. 비는 시간엔 공부하고, 애보고, 이력서 쓰고 떨어지는 영양가 없는 일과를 반복해 오는 동안 없던 짜증이 솟는다. 젠장, 책이라도 마음껏 사보자. 이왕이면 내 취향에 맞는, 닭살이 돋다 못해 하늘로 날아갈 듯한 소녀 취향도 좋고, 심장 떨리는 추리괴기물도 좋다. 내용 하나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낄낄 웃음만 삐져나오는 코믹물도 대환영이다. 내는 이력서마다 줄줄이 떨어지는 이 우울한 일상을 잊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골랐다. 완벽하게 내 취향으로. 

항설백물어, 교고쿠 나츠히코, 비채, 2009 

내 생각에 이 양반은 독자 골탕 먹이는 게 취미인 것 같다. [우부메의 여름]을 보려면 몇십 장에 걸치는 주인공의 수다를 다 읽어야 한다. [망량의 상자]나 [광골의 꿈]은 [우부메의 여름]의 분량의 딱 두배다. 마치 독자더러 "너네 어디까지 읽을 수 있는지 한번 보자" 하고 놀리는 것 같다. [항설백물어]의 경우도 한숨 나오는 분량이지만, 서로 다른 에피소드로 나뉘어 있는 방식이라 읽는 데 어렵지는 않았다. 첫머리에 귀신 얘기부터 나온다고 기죽지 말자. 이 양반은 독자 겁줘 놓고 "쟤네 놀랜다, 쟤네 놀랬어!" 하고 뒤에서 박장대소하는 타입이다. 오기를 갖고 끝까지 읽다 보면 귀신보다 더 무서운 건 작가 당신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애니메이션 제작도 되었다고 한다. 한번 보고는 싶은데 무서워서 볼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우부메의 여름]도 영화화 되었다는 소식은 벌써 들었는데 보지는 못했다. 에노키즈 역에 무려 아베 히로시가 캐스팅됐는데!  

대역 백작 시리즈, 세이케 미모리, 학산문화사, 2009 

오랜만에 화려하고 달달한 소녀 취향 책을 골라 보겠노라는 일념 하에 고르고 고른 회심의 주문품목.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지만 남주인공이 바라던 만큼의 훈남이라 읽는 보람은 있었다. 왕자에, 괴도에, 쌍둥이 오빠에, 보기만 해도 마음이 흐뭇해지는 남자들이 아름다운 왕궁을 거닐고 있는 걸 보자면 그 동안 남성향 하렘물에 황폐해졌던 마음이 정화되는 듯한 기분이다. 오랜만에 끈적한 러브씬이 별로 없는 것도 마음에 든다. 걸핏하면 물핧빨로 돌입하는 러브물만 봐 와서 그런지 이렇게 다가갈 듯 말 듯하는 관계도 산뜻하니 좋다. 철모를 시절엔 이런 관계 설정이 답답할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이런 설정 자체가 십대물의 정석이라는 걸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주인공들끼리 뽀뽀하는 건 줄창 그려대도 베드씬은 절대 안 그리겠다는 작가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이해가 간다. 소녀만화는 자고로 감질나게 그리는 게 정석이라니까. 어, 그러고 보니 이거 요새 신간 나오지 않았나? 

어느 비공사에 대한 추억, 이누무라 코로쿠, 서울문화사, 2009 

이건 내가 고른 게 아니고 남편이 회사 연수 갔다가 재밌다면서 준 책인데 읽는 데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 아 씨 이거 누가 썼어, 누군진 몰라도 내 취향을 완전 찔렀네? 주인공이 남자고 히로인이 청순가련 공주님이길래 또 남성향이려니, 했다. 그런데 작가를 보니 자극적인 설정으로 독자를 완전 홀딱 녹여 놓고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악하악하게 만들다가 깔끔하게 한권으로 마무리지을 줄 아는 포스의 소유자다. 애엄마인 나를, 그것도 아침 새벽바람부터 일어나 남편 밥 차려줘야 하는 초보엄마에 쓰는 이력서마다 줄줄이 떨어지는 고달픈 취업준비생인 이 나에게 날밤을 새게 만들다니, 제법이군 작가! 이번에 신간이 나왔다는데 사주지 않으면 이건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고로 이번 연가 시리즈는 꼭 사야 하는데, 이번 달 생활비를 꼽아보니 입에 당장 풀칠할 게 없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 오늘 알라딘 계정을 아무 생각 없이 열어 보니 난데없는 3만원이 적립되어 있다. 이번주 영화 리뷰 당선 축하금이란다. 크흑, 고맙다, 알라딘! 그런데 내 이력서는 왜 떨어뜨리니.   

책을 사 놓으니까 저녁 시간을 재미나게 보낼 수 있어서 좋다. 그런데 문제는 내 독서 방식에 있다. 재밌다고 한꺼번에 한권씩 읽어 버리면 대체 며칠을 버티려고? 결국 지난번에 사 놓은 책은 다 읽어 버리고 이젠 읽을 게 없다. 이번에 적립금이 나와 줘서 다행이다. 3만원 갖고 무슨 책을 살까나, 흥흥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