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미루고 미룬 뉴문을 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미 간판 내리고 없단다. 그래서 선택한 영화 나인(Nine), [시카고] 롭 마샬 감독의 신작이라길래 기대 많이 하고 갔다. 그리고 영화관을 나오고 나서 나와 남편의 평가는 서로 엇갈렸다. 남편은 DVD를 따로 사서 소장하고 싶다고 했고, 나는 [시카고]보다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대체 뭐가 그리 맘에 들지 않았을까?
희대의 카사노바이자, 천재 영화 감독인 ‘귀도’는 자신의 아홉 번째 작품을 준비하던 중 머리를 식히기 위해 홀로 휴양 스파를 찾는다. 한숨 돌리며 작품을 구상하려 했지만, 아름다운 여배우 ‘클라우디아’와 유일한 안식처인 아내 ‘루이사’, 그리고 치명적인 매력의 요염한 정부 ‘칼라’를 비롯한 일곱 여인들의 아찔한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녀들로부터 점점 작품에 대한 특별한 영감을 얻게 되고, ‘귀도’는 창작의 욕구가 되살아 나기 시작하는데… 과연 귀도는 세기 최고의 작품을 성공해 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단 한 명의 여인은 누가 될 것인가?
감점 포인트 1. 인물들 간의 개연성이나 사건의 흐름이 매끄럽지 않은 느낌을 주었다.
[시카고]는 갈등이 분명한 영화다. 자극적인 살인 사건과 화려한 춤극으로 섬세하게 표현된 인물들의 심리묘사와 통렬한 사회 풍자가 있었다. [나인]은 그렇지 않다. 극의 흐름은 "귀도"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를 둘러싼 7명의 여인들은 "귀도"의 주변인물이자 그를 설명해 주는 단서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단서들이 설득력 있게 이어지지 못했다. 특히 "클라우디아"와 "귀도"의 관계가 나에게는 무척 모호한 부분이었는데, 마치 그들이 나온 부분만 잘려 나간 것 같은 생뚱맞은 느낌을 끝내 떨칠 수 없었다. 대체 뭘 말하고 싶었던 걸까?
감점 포인트 2. 결말이 시원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화려한 법정다툼이 승리로 끝났지만 록시에게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다. 새로운 이슈에 묻혀 그녀의 존재는 잊혀졌고 꼴난 무대 단역 자리 하나 얻을래도 하늘의 별 따기다. 그러나 마지막에서 록시와 벨마는 화려한 은빛 의상과 발랄한 노래로 시름을 털어버렸다. 그녀들의 지나간 과거도, 냄비처럼 끓었다가 쉽게 식어 버리는 대중의 관심에 대한 허무함도 "Nowaday"로 멋들어지게 불러제꼈다. 그런데 귀도의 앞에 펼쳐진 미래에는 이런 카타르시스가 없다. 그저 시작이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런 결말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같이 오락성을 기대하고 간 사람한테는 좀 김이 샜달까.
"일곱 여인들로 인해 권태에 젖어 있던 늙은 감독의 영감이 되살아나기 시작하는 극적인 스토리"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다. 단 [시카고]에서 그랬듯 인물의 심리를 화려한 쇼와 음악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감독의 실력은 여기서도 건재하다. 인물들은 담담한 채색의 화면과 화려한 무대를 오가며 자신들의 감정을 때로는 구슬프게, 때로는 관능적이고 파워풀하게 읊조린다.
누구나 삶에의 열정이 있고, 열정이 있으면 영광도 있고, 영광 뒤에는 모래같이 꺼끌꺼끌한 권태가 있다. "에잇 이까짓 거 때려 치울까" 싶어도, 쉽게 포기하기도 쉽지 않은 것이 인간이다. 여타 영화의 히어로들과는 달리 귀도가 가진 인간적인 면이 있다면 바로 이런 무기력함, 권태로움이다. 나이를 먹으며 밀물처럼 밀려들어오는 허무감, 과거의 영광에 비추어 높아만 가는 주위 사람들의 기대, "준비 다 됐어! 남은 건 자네 각본 뿐이야." 그런데 그게 안 되는 걸 어쩌라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영감이 안 떠올라. 그런데 난 아직 아무 것도 잃고 싶지 않아!
이 영화에서 가장 공감되는 것이 있다면 주인공 귀도 콘티니의 심리적 방황과 삶에의 쓰디쓴 허무이다. 극중 귀도는 어렸을 적 자신에게 잊지 못할 이미지를 심어 주었던 여인 사라기나를 떠올린다. 그녀의 퍼포먼스 주제는 모래이다. 사라기나는 귀도가 살던 마을의 떠돌아 다니던 창녀였다. 어린 귀도는 모래사장에서 그녀와 만났고, 그 일로 어른들에게 매를 맞는다. 모래로 점철된 사라기나의 군무는 귀도가 호소하는 허무함 그 자체다. 자신이 지금까지 가졌다고 생각했던 사랑, 명성, 모든 것들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 나가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희망을 말한다. 아내와의 이혼으로 절망에 빠져 있는 귀도 앞에 어린 귀도가 나타나 "준비 다 끝났어요." 하고 그에게 시작을 종용한다. 어린 자신을 품에 안고 귀도는 다시 무대 앞에 선다. 모든 인물이 제 자리에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잡고, 귀도의 새로운 영화가 시작되는 것으로 극은 끝을 맺는다.
영화의 특성상 내용을 좀 많이 뭉뚱그린 듯한 느낌을 준다. 때로는 편집이 거칠고, 설명도 좀 부족한 불친절한 영화지만 귀도가 말하는 희망과 함께 2010년 새해를 맞이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 남편이 DVD를 사온다면 나 역시 그 옆에서 "Cinema Italiano"를 감상하며 갑자칩을 씹을 생각이다. 2010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많이 늦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