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 홈즈 - Sherlock Holme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나는 어릴 적 비교적 풍족하게 자랐기 때문에 남을 부러워해 본 기억은 별로 없다. 아, 딱 하나 있다. 취학 전에 잠깐 고모네 집 근처에서 산 적이 있는데, 그 집엘 가보면 빽빽한 책꽂이에 동화책이 하나 가득 꽂혀 있었다. 딸 둘밖에 없는 우리 집과는 달리 그 집은 형제가 셋이었고, 따로 친구를 부르지 않아도 집 안은 늘 아이들로 북적거렸다. 아이들이 나이를 먹을수록 책꽂이에 꽂힌 책의 종류도 조금씩 바뀌었다. 내가 그중 가장 좋아했던 책은 낡고 작은 판형의 셜록 홈즈 시리즈였다. 언니들이 놀자고 불러도 책꽂이 옆을 지키고 앉아 정신없이 책장을 넘겼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이번에 셜록 홈즈를 영화화한다고 한다. 옛날만큼의 열정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어릴 적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는 듯한 막연한 반가움 정도는 있었다. 그런데 예고편을 봤더니 웬걸, 무슨 근육질 셜록 홈즈가 액션을 벌이고 세계를 구한다냐? 이건 아니다, 싶어 일찌감치 엔트리에서 뺐다. 그런데 남편이 퇴근하고 와서 난데 없이 셜록 홈즈 영화 보러 가잔다. 자기도 처음엔 좀 염려스러웠는데 보고 온 사람들이 재밌다고 했단다.

In my opinion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 살펴본 관객들의 반응은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런데 정작 셜로키언이라 불리는 홈즈의 팬들은 영화에 실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셜로키언은커녕 작품 내용조차도 많이 까먹은 나로서는 무슨 소린지 그저 의아할 뿐이다. 그 사람들이 영화 보고 실망했다는 내용은 아마 내 첫인상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그저 짐작만 해볼 뿐이다.    

이번 영화에서 가장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근육질 육식남” 이미지로 탈바꿈한 주인공일 것이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영국에서 제작한 [셜록 홈즈 시리즈]를 본 적이 있다. 거기에 등장하는 홈즈는 말쑥한 신사정장을 차려 입고 주먹질이라고는 생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듯한 예의 바른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기억에 의하면 홈즈의 공인 조수 왓슨 박사에게는 “셜록 홈즈의 능력 일람표”라고 해서 자신의 특이한 친구에 대한 스펙을 따로 정리해 놓은 게 있다. 이 일람표를 보면 셜록 홈즈가 의외로 다양한 방면에 재능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초반에 나온 권투 장면도 이 일람표에 표시되어 있는 것이다. 홈즈는 권투, 유도 등 격투기에도 일가견이 있었으며, 심지어 약간의 약물 중독 증세도 갖고 있었다. 아마 실제로 보는 홈즈의 모습은 드라마의 정중하고 매사 냉철한 모습보다는 영화에서의 다소 흐트러진 모습에 더 가까우리라 생각된다. 어떤 사건이든 해결하는 천재지만 그만큼 괴벽스럽기도 한 셜록 홈즈를 연기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캐릭터 표현은 사실 본질에 꽤 근접한 것이다.

새침한 영국 신사 셜록 홈즈를 완전히 변신시켜 버린 데 이어, 영화는 보는 내내 비딱한 관점을 유지한다. 영화 속의 홈즈는 그저 민폐덩어리에 구박데기다. 자기 신변의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아 왔을 뿐 아니라 켜고 나온 스토브까지 알뜰하게 꺼주는 편리한 파트너는 난데 없이 장가 갈 테니까 독립하겠다고 난리다. 제대로 된 집도 없이 하숙집에 얹혀사는 신세인 데다 맘에 내키는 실험 한번 하자면 주인집이며 이웃에게 듣는 온갖 잔소리에 치를 떨어야 한다. 기껏 맘에 든 여자는 범죄자다. 사는 게 고달파 죽겠는데 이 와중에 왠 미친놈이 세계정복 하잔다. 영화 보는 내내 관객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저 양반 그대로 놔둬도 돼? 우리가 보고 있는 게 세계 최고의 명성이 자자한 명탐정이라면 또 모른다. 저건 완전히 미스터 빈이잖아!

감상 포인트 1. 세상을 구하는 영웅 홈즈와 마술을 부리는 악당?  

홈즈가 언제 세상을 구했는데? 하고 되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가 아니라 헐리우드형 블록버스터다. 영웅이 있으면 당연히 그를 방해하는 악당이 있다. 그 단순한 구도에 셜록 홈즈가 잠깐 끼는 것도 어렵지는 않을 터다. 그러나 영화가 베이스로 삼은 것은 엄연히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다. 블랙우드 경의 신비롭고 마술적인 범행을 홈즈는 그만의 냉철한 이성과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시원하게 까발린다.

감상 포인트 2. 영화로 만나는 홈즈의 로맨스
원작의 홈즈는 연애와는 전혀 인연이 없다. 조수 왓슨이 몇 번의 결혼을 거듭하는 사이 이 양반은 그 흔한 여자친구 하나 없이 곱게도 늙어 갔다. 혹시라도 이런 사실에 아쉬움을 느낀 팬이 있다면 영화를 통해 대리만족을 해도 될 듯 싶다. 영화 속 홈즈와 아이린의 관계는 아슬아슬한 곡예를 방불케 한다. 아름답고 적극적이지만 무슨 꿍꿍인지 알 수 없는 아이린과 그녀를 사랑하지만 늘 당하기만 하는 홈즈의 로맨스는 사진 한 장 벗삼아 파이프를 피우는 늙은 탐정의 낭만과는 또 다른 맛이 있다.

감상 포인트 3. 원작의 컨셉을 그대로 살린 홈즈와 왓슨의 콤비플레이
홈즈가 결정적인 순간에 권총을 두고 나오는 얼빠진 인사라면, 뒤에서 달겨드는 범인에게 피스톨을 갈기는 것이 왓슨 박사다. 영화 속의 홈즈와 왓슨은 실제로 두 사람이 실재했더라면 저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원작의 느낌을 잘 살렸다. 뭘 잊었네, 뭘 두고 나왔네 하면서 챙겨 주는 모습이라든가, 조수 장가 가는 게 아쉬워 약혼녀에게 시비를 거는 홈즈의 모습은 코믹스럽기까지 하다. 미남배우 주드 로의 시원시원한 생김은 보너스랄까.

영화의 결말을 봐서는 내년쯤 다음 시리즈가 나올 모양이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지만 홈즈의 숙적 모리어티 교수 역에는 브래드 피트가 낙점이란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지극히 영국적인 셜록 홈즈의 캐릭터를 깨고 그만의 홈즈를 창조해 냈듯, 제작진의 노력에 힘입어 브래드 피트가 연기할 모리어티 교수 역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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