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지 않다
최다혜 지음 / 씨네21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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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지현, 강은영, 이지은. 세 여성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세 명 다 미술을 공부했고 여전히 관련된 분야에서 일을 한다. 지현은 일러스트레이터로, 은영은 시간강사로, 지은은 화가로 활동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전공(혹은 기술)으로 먹고 살고 있지만 누군가는 그렇지 못하며, 누군가는 그렇게 말하기 참으로 애매하다. 어쨌든 다들 '전공 언저리'에서 살아가며 미술과 연결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고학력-여성-서민출신-예술가의 삶이란 녹록지 않다. 작가의 말을 보니 이 세 사람의 이야기는 모두 작가 자신의 이야기로 귀결되는 것 같아 더 씁쓸했다. 


#2.

예술가의 모든 창작과정은 본질적으로 인정투쟁이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상당 부분 동의한다. 대중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그 예술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과 별개로 모든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이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기를 원한다. 누군가에겐 그 대상이 대중이며, 누군가에겐 평단이고, 누군가에겐 소수의 사람들이 그 인정의 대상이다. 인정받고자 하는 대상은 자기가 선택하지만, 어쨌든 예술은 그 대상에 대해 자신이 인정받고자 하는 지속적인 투쟁의 과정이다. 이 책 속 세 명의 예술가(혹은 지식노동자)의 삶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계속해서 투쟁한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벽에 막혀 있기에 그들의 투쟁은 더욱 고달프다. 투쟁 없는 '인정'을 그대로 얻을 수 있는 이들이 추월차선처럼 그들의 옆을 지나가지만 그들은 요행을 바랄 수 없다. 계속해서 투쟁이 답이라고 생각하며 오늘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다.


#3.

계층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사회문제가 있겠냐만은, 예술대학에 다니다보면 특히 계층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예술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의 평균적인 가정환경은 다른 분야 전공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높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평균이다. 평균에는 언제나 함정이 존재하듯 최댓값과 최솟값의 가능성이란 것이 내재한다. 특히나 평균치가 높아지면 그 문제가 더 극명하게 나타난다. 마치 다른 분야에서는 부유한 삶이 'someone special' 같이 여겨진다면, 그곳에선 그렇지 않은 이들이 계속해서 추월당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다. 지현과 은영, 지은이 부모를 원망하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한다. 부모님이 지원해준 건 별로 없지만, 그래도 꿈을 지지하긴 했으니까. 반대하진 않았으니까 이런 식으로 원망으로부터 멀어질 구석을 찾아보지만 역부족이다. 가정환경으로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앞서나가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이 자신의 부모에 대한 미움과 가정환경에 대한 억울함이 은연 중에 솟구친다. 분명 부모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구조 탓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묻고 싶지만 답은 찾을 수 없다.

-

*하니포터 2기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계속 회사를 다녔아야 했을까? 그랬다면 매달 월급도 받고, 사람구실은 하면서 살았겠지? 계속 그림을 그리는게 맞나? 할 수 있는 것들도 점점 없어지는데... 이렇다 할 성과도 안 보이고. 돈도 없으면서 무슨 생각으로 그림을 그리겠다고 한건지 모르겠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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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달리기
조우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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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몇 년전부터 메일링서비스가 대세다. 물론 뉴스레터나 웹진, '고도원의 아침편지' 같은 컨텐츠들이 존재했지만, 본격적인 대세로 자리잡기 시작한 건 몇 년 전부터다. 특히 기존에 문단이 외면했던 젊은 여성 작가들이 메일링서비스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독자들과 나누기 시작했고, 독자들은 열광했다. 그렇게 한국문학의 판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이른바 '경장편'으로 불리던 장르들이 소위 중년 남성 작가 중심의 '순문학'이라는 견고한 장을 깨고 들어왔다. 찬란하게 빛나는 여성 작가들은 한국 문학의 미래이자 현재가 되었다. 이러한 혁명적 변화가 메일링(mail-ing), 즉 편지-하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참 흥미롭다. 새로운 지면을 만들기 위해, 여성 창작자들은 새롭지만 가장 고전적인 방식의 '편지쓰기'라는 방식을 택했다. 메일링은 독자와 작가 사이의 연결의 감각을 깨워냈고, 이들의 관계는 연대하고 협력하는, 동시대를 살아가며 함께 응원하는 '동지'로 자리매김한다.


#2.

조우리 작가의 <이어달리기>는 메일링을 통해 연재되었던 이야기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 자체도 서로 다른 이들에게 전달된 장례식 초대장 편지로부터 출발한다. 편지는 책과 사뭇 다르다. 책은 그것을 구입하고 선택하는 독자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편지는 그것을 보내는 작가의 행위에 집중한다. 존재하는 이야기를 발견하기 전에 그 이야기로 먼저 다가가는 점에서 훨씬 더 적극적이고 다정하다. 그리고 이 소설은 그 메일링서비스와 편지라는 스토리, 두 겹의 편지가 만나 더욱 다정한 매력을 뽐낸다. 살아서 하는 장례식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기상천외한 행사에 초대한다는 설정은 이런 다정함에 경쾌함을 더해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내가 이런 편지를 받으면 어떤 느낌일까? 나는 그 장례식에 참석할까?" "내가 이런 편지를 보내려면 누구에게 써야할까? 편지를 보내면 몇 명이나 참석해줄까?"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3.

<이어달리기>는 하나의 편지를 둘러싼 서로 다른 인물의 이야기를 담은 연작소설이다. 하나인 듯 하나가 아닌, 하나 같은 작품이라는 점이 연작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다. 사실 연작소설을 볼 때면 처음 했던 생각은 '장편이면 장편이고 단편이면 단편이지, 연작은 뭐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의 짧았던 생각에 부끄러움이 앞선다. 때로는 장편같고 어떤 면에서는 단편같은 연작은 어쩌면 우리의 삶과 더 많이 닮아있는지 모른다. 나의 세계의 주인공은 나고, 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지만, 다른 이의 삶은 그 사람의 시선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지구상의 인구가 70억 쯤 되니 70억명이 각자 자신이 주인공인 이야기 속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서로가 서로의 주연이 되고, 조연이 되며, 악역이 된다. 이렇게 층층이 쌓인 이야기의 겹들이 마침내 세상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연작소설을 만들어내는 듯 하다. 지금은 내가 주인공이지만 누군가의 이야기에선 그저 스처지나가는 단역이 될 수 있다는 삶의 진리. 연작소설은 그 진리를 담아낸다.


"이모, 나 미션 완료했어."
"그래? 어떤 보상을 주면 좋을까. 원하는 걸 말해봐."
아름은 기꺼이 대답했다.
"이모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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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산문
강지희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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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세이가 대세다. 평소 에세이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요즘은 다른 분야의 글쓰기를 하는 작가님들도 에세이 책을 출간하시는 경우가 많다보니, 평소 관심있던 작가분들의 에세이가 출간하면 찾아서 읽어보는 편이다. 에세이에 조금씩 관심이 가는 중이다. 누군가의 취향과 세상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라 즐겁다. 그 사람의 취향을 모방해보기도 하고, 나의 세상과 비교해보기도 하며 새로운 활자 친구를 사귀는 느낌을 받는다. <점심 산문>에서는 요즘 핫한 작가들의 산문이 가득하다. 나의 점심시간과 그들의 점심시간은 어떻게 다를까라는 생각과 함께, 홀로 있는 점심시간을 사랑하는 이들이 이렇게 만다는 생각에 웃음이 난다.

#2.
혼자 점심을 먹는다는 것은 내면의 수많은 생각과 고민을 허락한다는 뜻이다. 업무의 시간에는 일에 치여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점심시간이 되면 머릿속에 맴돌기 시작한다. 작가들인 이렇게 맴도는 생각을 글로써 풀어낸다. '점심' 그 자체를 소재로 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충분히 점심시간의 글이라는 느낌을 주는 이유다. 근로기준법 상으로 근무시간 중 시급 책정이 되지 않는 1시간이지만, 어쩔때는 이 시간에 가장 생산성이 높아지는 것 같다. 점심시간을 소재로 한 작가들의 글이 이렇게나 다채롭고 생기가 넘치는 것만 봐도 그렇다.

#3.
혼자 점심 먹는 걸 좋아한다. 가끔 주변 동료들이 혼자 먹는 걸 안타까워하며 같이 먹겠냐고 제안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 꽤나 곤란하다. 그들이 싫다거나 불편해서가 아니다. 그냥, 점심시간에는 혼자가 되고 싶을 뿐이다. 점심시간을 제외하면 나는 출근시간부터 퇴근시간까지 혼자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점심시간은 자발적으로 혼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물론 왁자지껄 화기애애한 점심시간도 그 나름대로의 재미와 따뜻함이 있지만, 때로는 차갑고 외로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기에 언제나 혼자 점심을 즐기는 것 같다. '사회생활'을 하는 인간에게 허락된 유일한 고독, 그 고독은 오늘도 하루를 살게 한다.

"어?! 선배! 어디 가세요?"
"어! 안녕! 나는 어...... 스타벅스."
"커피 사려고요? 저도 같이 가요."
"앗. 그, 그래."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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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시집
강혜빈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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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즘 들어 시집을 읽으려고 노력한다. 시를 잘 읽는 편은 아니었는데, 현존하는 가장 다채롭고 아름다운 언어를 만나는 방법이 바로 시를 읽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아직 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활자 하나하나를 곱씹어가면 내 감정대로 느껴보려 애쓰는 중이다.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시집>을 통해 요즘 핫한 시인들의 가장 트렌디한 글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제 막 시집에 손길이 가기 시작한 나에게 다양한 맛보기를 선사해준, 시의 재미에 한발짝 더 다가가게 해준 책이다.

#2.
점심 시집이라고 해서, 수록된 모든 시가 점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먹고 사는 문제나 점심에 대해 말하는 시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시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들마저 묘하게 점심과 어울린다. 점심을 표현하지 않았는데, 점심과 어울리는 언어라니. 이게 바로 시인이 가진 능력이 아닐까 싶다. 그야말로 언어의 연금술 아닐까. 자신이 가진 모든 언어를 끌어내 무관한 언어들의 나열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 내는 것. 시인들의 감각이 경이로울 따름이다.

#3.
요즘 나는 혼자 점심을 먹는다. 도시락을 싸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하고 있는 곳에서도 코로나 문제로 가급적 식사를 따로할 것을 권하고 있는 탓이다. 지금 맡고 있는 업무 자체가 다양한 협업을 요하는 업무는 아니지만, 어쨌든 점심시간만큼은 온전히 혼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진다. 점심시간마저 없다면 출근 후의 시간들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고작 1시간, 실제로 밥먹는 시간을 제하면 남는 시간은 30-40분 정도지만, 그 안에 산책도 하고 최대한 호흡과 이완을 하고자 안간힘을 쓴다. 안간힘을 쓰며 이완한다는 게 아이러니 하지만, 정말이다. 근로기준법이 허락한 1시간의 휴식. 법조항이 감사해지는 시간이다.

우리는 버려진 것을 보고도 버려진 것인지 몰라요. 누군가 두고 갔다고 생각해요. 비참과 희망은 왜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까요. 시 이야기만 했는데 생활을 알게 되는 것처럼요. 식물의 웃자란 줄기를 보며 잘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요. 그러나 점심에 보면 다 달라 보여요. 점심에 만나요. 환해져요.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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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살았던 날들 - 죽음 뒤에도 반드시 살아남는 것들에 관하여
델핀 오르빌뢰르 지음, 김두리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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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보다, 죽음 이후

  우리는 죽음을 직설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꺼린다. '돌아가셨다'와 같이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그것이 죽은 자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마주하는 것은 엄청난 공포를 주기에, 산 자들은 죽음에 대한 언급을 더더욱 회피한다. 

  이러한 우리의 일상과 달리 종교는 계속해서 죽음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며 언어로써 정의한다. 유대교 랍비 오르빌뢰르는 앙드레 말로를 인용하며 "죽음의 비극은 죽음이 삶을 운명으로 바꾸어놓는 데 있다"(p56)고 말한다. 죽음 그 자체보다 죽음 이후 산 사람들이 마주하게 될 감정들이 죽음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 또한 산 사람을 위한 일이며, 종교는 이를 함께한다.

  작가는 공포의 감정을 "매우 강력한 버림받음의 감정으로, 사람들이 '당신'의 이야기에 관해서 당신에게 말해주지 않은 무언가를 되살아나게"(p80)한다고 정의한다. 종교를 통해 죽음의 공표와 직면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본질과 마주하는 일이다.


죽음의 언어가 필요한 이유

  고아, 과부, 홀아비와 달리 자녀 잃은 부모를 뜻하는 말은 없다. 자식을 잃은 슬픔만큼 아픈 고통이 없다면서도, 그 슬픔을 정의할 언어를 만들지 않았다. 반면 히브리어는 이들을 '샤쿨(Shakoul)'이라 부른다. 작가는 샤쿨의 슬픔이 "동일한 경험을 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방문할 수 없는 땅으로 추방되는 것"(p136-137)이고, "그곳에서는 이민자들처럼 새로운 언어를 발견해야 하고, 그 언어로 더듬더듬 말하게"되며, "당신이 알던 어떤 말로도 이제부터 당신이 살아야 할 경험을 입에 담을 수 없"(p137)다고 말한다.

  죽음에 대한 회피는 죽음의 언어를 부족하게 만든다. 하지만 더 온전한 슬픔을 위해선 죽음의 언어가 필요하다. 죽음의 언어는 위로와 애도를 건네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된다. 또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본질에 다가가는 것이기에, 언어를 통해 죽음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은 인간의 정체성에 접근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죽음의 언어'가 필요하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도시에선 죽음이 보이지 않는다. 일상과 분리된 병원이나 장례식장에서만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코로나는 격리되었던 죽음을 직접 마주하게 했다. 매일 사망자 수가 브리핑되고, 사망소식을 직간접적으로 접했다. 그런 점에서, "항상 벽에 작은 틈 하나를 남기고, 칸막이의 한 면을 칠하지 않거나 바닥 한구석에 작은 타일 하나를 비우도록"(p267) 하여 불완전한 상태로 집을 유지하는 유대 전통은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삶엔 죽음이라는 종말이 있기에 항상 불완전하다. 집의 결함은 불완전한 인간의 삶을 상기시키고, 죽음이 언제나 곁에 있음을 잊지 않도록 만든다.

  오르빌뢰르는 이 책을 통해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우리는 앞선 시간을 살아간 죽은 자들의 흔적 위에서 살아가는 것이며, 죽음은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 죽은 자의 뒤를 살아갈 이들에게 흔적을 남기는 일이라고. "우리에게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우리가 앞서 존재했기 때문에 훗날 다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잘 만들고, 잘 말하고, 잘 이야기할 무언가가 있다고"(p222) 말이다.

모순되는 은유를 들어 고인을 땅과 하늘에 동시에 안식시키면서, 우리는 죽음을 언급하지 않는 저 모든 말들도 도대체 무엇을 감추고 있는 걸까? 우리는 어린 왕자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양을 왜 이토록 그려주길 거부하는 걸까? 랍비라는 내 직업을 통해서 나는 자주 언어의 무력(無力)을 의식했고, 그래서 속엣말을 털어놓아야만 한다. 나는 간혹 내 동료들 일부를 질투했다. 무엇보다 그들의 교리에 죽음에 관한 확고하고 확실한 언어가 있는 동료들을 부러워했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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