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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은 길 - 미국 대표시선 ㅣ 창비세계문학 32
로버트 프로스트 외 지음, 손혜숙 .엮고옮김 / 창비 / 2014년 6월
평점 :
언젠가부터, 시집을 읽게 되었다. 사실 그 전에는, 시에 관심이 간다고 해봐야 국어시간에 만난 시들 중, 간혹 가다 눈에 띄는 작품들이 있을 때, 빠르게 지문을 읽어내려가야만 했던 수험생의 부담감을 잠시 내려놓고, 천천히 글을 읽어가는 것의 즐거움을 느끼는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시집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치열하게, 무언가를 얻기 위해 글자를 읽어 내려갔던 나의 독서 습관과 달리, 시집은 무언가 '숨을 쉬어가는 듯한' 독서를 할 수 있었고, 그런 호흡이 마음에 들었다. 글을 읽으며 숨을 쉰다는 기분을 느끼니, 그전까지의 읽기와는 다른 새로운 매력에 끌리게 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영시(英詩)를 읽고 있다. 누군가는 '모든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처럼 언어 자체의 맛이 중요한 시는 번역을 하는 순간 그 감동과 미학이 변질된다면서 번역된 영시를 읽는 것을 꺼리기도 하겠지만, 나는 번역된 시도 나름대로 너무 좋다. 특히, 함축된 언어로 표출된 시인의 감각에 더해, 그 언어를 어떻게 하면 더 잘 전달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했을 번역자의 열정이 더해져, 더 강렬하게 나에게 다가오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다양한 주석과 각주로 가득찬 이 책의 번역은, 더 좋은 번역을 위해 번역자가 얼마나 열정을 바쳤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가지 않은 길>에서는 여러 시인들의 시를 한 번에 만나볼 수 있다. 시인 한 사람의 시집만을 읽었던 나에게는 이 또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일반적인 서정시부터 산문시, 연작시와 서사시까지, 다양한 시들을 한 번에 만나면서 다양한 호흡으로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책에 실린 시인들의 시 전부, 생경하고도 새로운 느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나에게 와닿는 것은 아무래도, 에드거 앨런 포, 그리고 에밀리 디킨슨인 것 같다. 둘의 시는 너무도 상반되는 느낌을 준다. 포의 시는 뭔가 빽빽하게 지면에 들어찬 활자가 내 눈안에 가득차지만, 그런 모습과 달리 왠지 모를 공허함과 외로움이 느껴진다. 빽빽한 글자 속의 여백이 유난히도 커보인다. 반면, 디킨슨의 시는 뭔가 여백과 하이픈이 자주 보이는, 빈틈이 많아 보이는 글이지만, 무언가 가득찬 열정과 에너지가 느껴지는 듯 하다. 이런 역설적인 느낌이 시를 읽게 하는 매력이 아닐까. 단순한 활자가 아닌, 활자의 밀도와 배열, 단어 선택 하나하나가 말을 거는 듯한 느낌. 그리고 언어 너머에서 나에게 전달되는 에너지는 계속해서 시집을 찾게 만든다.
특히 영시를 읽다보면 '하이픈'을 자주 만날 수 있다. 특히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거의 모든 시에 하이픈이 존재한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고 '낯선' 느낌의 첫인상이었지만, 계속해서 보다보니, 왠지 모르게 눈길이 간다. 언어로만 표현되는 '시'라는 장르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미학적이고 시각적으로 아름답다는 느낌마저 주었다. 길지 않은 몇 센티미터 안에, 작가는 얼마나 많은 뜻을 담아두었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시를 읽는 것이 단순히 활자를 눈에 담고 머릿속으로 읽어내려가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펜이 종이 위를 스치는 그 순간의 호흡으로 함께 숨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다른 글을 읽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짜릿함"이 느껴진다.
내 위엔- 영원이 내려앉고- 내 앞엔- 불멸이 내려앉네- 나는- 그 사이에 낀 기간- 죽음은 동녘 잿빛으로 날려 서녘이 시작되기 전 예명으로 녹아 흩어지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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