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살았던 날들 - 죽음 뒤에도 반드시 살아남는 것들에 관하여
델핀 오르빌뢰르 지음, 김두리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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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보다, 죽음 이후

  우리는 죽음을 직설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꺼린다. '돌아가셨다'와 같이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그것이 죽은 자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마주하는 것은 엄청난 공포를 주기에, 산 자들은 죽음에 대한 언급을 더더욱 회피한다. 

  이러한 우리의 일상과 달리 종교는 계속해서 죽음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며 언어로써 정의한다. 유대교 랍비 오르빌뢰르는 앙드레 말로를 인용하며 "죽음의 비극은 죽음이 삶을 운명으로 바꾸어놓는 데 있다"(p56)고 말한다. 죽음 그 자체보다 죽음 이후 산 사람들이 마주하게 될 감정들이 죽음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 또한 산 사람을 위한 일이며, 종교는 이를 함께한다.

  작가는 공포의 감정을 "매우 강력한 버림받음의 감정으로, 사람들이 '당신'의 이야기에 관해서 당신에게 말해주지 않은 무언가를 되살아나게"(p80)한다고 정의한다. 종교를 통해 죽음의 공표와 직면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본질과 마주하는 일이다.


죽음의 언어가 필요한 이유

  고아, 과부, 홀아비와 달리 자녀 잃은 부모를 뜻하는 말은 없다. 자식을 잃은 슬픔만큼 아픈 고통이 없다면서도, 그 슬픔을 정의할 언어를 만들지 않았다. 반면 히브리어는 이들을 '샤쿨(Shakoul)'이라 부른다. 작가는 샤쿨의 슬픔이 "동일한 경험을 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방문할 수 없는 땅으로 추방되는 것"(p136-137)이고, "그곳에서는 이민자들처럼 새로운 언어를 발견해야 하고, 그 언어로 더듬더듬 말하게"되며, "당신이 알던 어떤 말로도 이제부터 당신이 살아야 할 경험을 입에 담을 수 없"(p137)다고 말한다.

  죽음에 대한 회피는 죽음의 언어를 부족하게 만든다. 하지만 더 온전한 슬픔을 위해선 죽음의 언어가 필요하다. 죽음의 언어는 위로와 애도를 건네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된다. 또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본질에 다가가는 것이기에, 언어를 통해 죽음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은 인간의 정체성에 접근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죽음의 언어'가 필요하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도시에선 죽음이 보이지 않는다. 일상과 분리된 병원이나 장례식장에서만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코로나는 격리되었던 죽음을 직접 마주하게 했다. 매일 사망자 수가 브리핑되고, 사망소식을 직간접적으로 접했다. 그런 점에서, "항상 벽에 작은 틈 하나를 남기고, 칸막이의 한 면을 칠하지 않거나 바닥 한구석에 작은 타일 하나를 비우도록"(p267) 하여 불완전한 상태로 집을 유지하는 유대 전통은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삶엔 죽음이라는 종말이 있기에 항상 불완전하다. 집의 결함은 불완전한 인간의 삶을 상기시키고, 죽음이 언제나 곁에 있음을 잊지 않도록 만든다.

  오르빌뢰르는 이 책을 통해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우리는 앞선 시간을 살아간 죽은 자들의 흔적 위에서 살아가는 것이며, 죽음은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 죽은 자의 뒤를 살아갈 이들에게 흔적을 남기는 일이라고. "우리에게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우리가 앞서 존재했기 때문에 훗날 다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잘 만들고, 잘 말하고, 잘 이야기할 무언가가 있다고"(p222) 말이다.

모순되는 은유를 들어 고인을 땅과 하늘에 동시에 안식시키면서, 우리는 죽음을 언급하지 않는 저 모든 말들도 도대체 무엇을 감추고 있는 걸까? 우리는 어린 왕자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양을 왜 이토록 그려주길 거부하는 걸까? 랍비라는 내 직업을 통해서 나는 자주 언어의 무력(無力)을 의식했고, 그래서 속엣말을 털어놓아야만 한다. 나는 간혹 내 동료들 일부를 질투했다. 무엇보다 그들의 교리에 죽음에 관한 확고하고 확실한 언어가 있는 동료들을 부러워했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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