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중독을 사랑해 - 환상적 욕망과 가난한 현실 사이 달콤한 선택지
도우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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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류는 오랜 시간 궁핍의 시대를 살아왔다. 오죽하면 근대 인구학자 멜서스는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인류의 증가폭은 기하급수적이기에 필연적으로 기근에 시달린다고 예측했을까. 하지만 그가 예측하지 못했던 녹색혁명, 나아가 2, 3, 4차 산업혁명은 우리를 풍요의 한 가운데로 몰아넣었다. 심지어는 공급과잉으로 인한 풍요가 1930년대 대공황을 가져왔다는 세계경제사적 아이러니를 마주한다. 이러한 풍요의 시대는 과잉으로 이어졌고, 과잉은 중독을 낳았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어딘가에 중독되어 있다. 너무도 무의식적인 중독이라 인지하지 못할 뿐, 중독은 우리 삶에 아주 밀접하게 닿아있다. 도우리는 2022년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중독을 절묘하게 파고든다.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언어로 중독을 탐구하지 않고, 아주 일상적인 방식으로 다가선다. 배달의민족과 오늘의집, 당근마켓처럼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린 서비스와 함께, MBTI와 사주풀이, '갓생'처럼 온라인 세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트렌드로 우리의 중독을 간파한다. <우리는 중독을 사랑해>를 읽다보면 우리의 일상이 어쩌면 중독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될 수밖에 없다.


#2.

특히나 눈길이 갔던 건 [방꾸미기]를 다룬 제3장이다. "누군가의 집에 초대되고 나서야 볼 수 있는 내밀한 광경"을 "플랫폼 내에서 클릭 한 번만으로 낯선 사람들의 집 사진을 몇만 장 이상으로, 그것도 커튼이나 조명 하나하나의 가격까지 클로즈업해서 끊임없이 볼 수 있게"(p65) 된 시대에, 집은 개인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다. 그럴듯한 의생활과 폼나는 식생활만 챙기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감성적인 주생활까지 만천하에 공개된다. 폭등하는 주택가격과 비좁은 면적, 주거라는 의미보다 주택이라는 재산의 가치에 중점을 두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청년(뿐만 아니라 수많은 시민)들의 주거환경은 점점 더 열악해진다. 하지만 감성과 손재주를 가진 유저들은 자신들의 기발함으로 이 문제를 멋지게 극복한 삶의 공간을 구축한다. 그러나 그들이 꾸며놓은 공간의 근사함 속에 앞서 언급했던 문제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 "디자인은 디자인의 값을 지불할 있는 사람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한 일"(p73)이라는 1919년 북유럽의 노조위원장의 선언은 2022년에 비로소 실현되었지만, 결국 그것은 또다른 중독을 가져왔다. 또한 집이라는 공간을 나를 중심으로 한 우주로 설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타인과 다른 존재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조물주적 시선을 갖게 된다. 이를테면 "식물은 플랜테리어라는 마케팅을 거쳐 기르고 돌보는 생명체나 생태계라기보다 소품, 그러니까 무생물이 됐다."(p76) 삶의 터전을 가꾸며 삶의 질을 높여보자는 사회적 흐름은 매우 주목할 만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가, 그리고 그 뒤에는 어떠한 욕망들이 가려져 있는가를 고민해야할 때다.


#3.

중독에 대한 도우리의 치밀한 탐구를 따라가다보면 그 끝에서는 대부분(이라고 하지만 실은 언제나) 노동의 문제와 마주한다. 사람들을 열광하게 하는 심리 테스트 결과에 대한 해설은 "모두 노동자에 대한 캐릭터 묘사"(p170)이며, '배민맛'은 노동시간에 치여 사는 "도시 노동자의 퇴근 후 휴식 때뿐 아니라 점심시간의 필수재"(pp.48-49)다. 특히나 우리의 노동에 인정투쟁이 더해질 때, 그것은 비로소 엄청난 중독의 파워를 갖는다. "대부분 생산성 앱 혹은 인스타그램에 인증샷을 올리거나 트위터에서 '#갓생프로젝트', '#오늘부터갓생1일' 등의 해시태그와 함께 게시글을 올리는 것으로 완성"(p22)되는 갓생도, "현실의 노동 공간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노동의 수고로움을 인정받음으로써 위로받"(p216)는 노동자들의 브이로그도 그러하다. 노동으로 인한 중독은 더 많은 노동을 유발한다. "자기 연출이라는 직무가 분리되어 있던" 전통적인 셀럽과 달리 오늘날의 인플루언서 노동자들은 "자기 연출, 영업, 홍보를 모두 책임"지는 "나에 대한 사용자이자 노동자"가 되었다(p204). 자본주의적 구조 하에서, 시스템은 언제나 개개인에게 더 많은 노동을 통해 최대의 이익을 산출하고자 하고 '중독'이라는 방식을 통해 노동자들을 이 체계에 순응하게 만든다. 우리는 언제쯤 이 중독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노동의 삶을 꿈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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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된 리뷰입니다.

패션은 길거리에 널려 있지만, 인테리어라는 건 누군가의 집에 초대되고 나서야 볼 수 있는 내밀한 광경이다. 그때만 해도 가장 잘 꾸민 집에 대한 상상력은 드라마 속 재벌 집까지였다. 그조차 대체로 미적이라기보다 규모에 관한 것이었다. (…) 이걸 오늘의 집이 바꿨다. 예를 들면, 플랫폼 내에서 클릭 한 번만으로 낯선 사람들의 집 사진을 몇만 장 이상으로, 그것도 커튼이나 조명 하나하나의 가격까지 클로즈업해서 끊임없이 볼 수 있게 됐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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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생존자입니다 - 삶을 가두는 트라우마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한 31가지 연습
허심양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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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인이 겪는 모든 문제가 자신의 탓은 아니지만, 그 문제는 우리가 직접 해결해야"(p107) 한다. 그래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트라우마는 개인의 마음 안에서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 외부에서 발생하여 당사자에게 침투한 것"(p218)이기에, 그 원인과 방법을 알 수 없어 트라우마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곤 한다. <우리는 모두 생존자입니다>는 트라우마에 휩싸인 모든 이들을 위한 책이다. 트라우마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기억에 흔적을 남기는지를 이야기한다. "'살아남는' 데 급급했"던 "회복의 과정을 지나 '살아가는' 데 초점을 두"(p183)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일상을 이어가고 마음을 챙겨야할지를 조언한다. 단순히 조언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조언 곳곳에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겨낼 수 있다는 위기와 격려가 묻어있다. 트라우마를 딛고 조금씩 나아가는 삶을 위한 노력을 돕는 페이스메이커가 되어줄 책이라고 생각한다.


#2.

심리상담이나 정신건강의학과 치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과거에 비해 많이 나아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곳에서 정신적인 치료를 받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런 두려움과 불안감을 가진 이들에게 이 책은 심리적 문턱을 낮춰주고, 일상 속에서부터 실천할 수 있는 치유의 방법론을 제시한다. 물론 이 책을 읽고 혼자서 행하는 것이 트라우마를 완전히 해소해준다거나 치료를 완벽히 대체할 수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치료의 전 단계까지의 준비운동과 일상에서의 회복을 위한 습관들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치료 못지 않게 큰 도움이 되는 책이다. "그 자체로 해결책이 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 다른 해결책을 시도하기 전에 에너지를 모으기 위한 준비 과정"을 안내하는 것, 벙커에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다시 삶이라는 전쟁터로 나아갈 힘을 기르는 것"(p86)을 도와줄 것이다.


#3.

트라우마를 가진 이들뿐만 아니라, 트라우마로 힘들어하는 이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아주 도움이 되는 책이다. 상대방의 상처가 얼마나 크고 힘든지 알기에, 우리는 그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대처해야할지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때로 돕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서 트라우마 생존자에게 충분한 힘이 있다는 사실을 잊게"(p218)되고, 마음을 다해 건넨 위로와 노력이 더 큰 상처로 남기도 한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하지, 어떻게 해야 내가 진정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거지하며 고민하게 된다. 이 책은 그런 이들을 위한 지침서이기도 하다. 트라우마를 겪는 '나'뿐만 아니라 '너'를 위한 마음가짐을 배우고, 그것을 통해 행복한 '우리'를 꿈꾸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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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된 리뷰입니다.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 경험은 위에서 말한 일반 경험과는 다르게 뇌에 저장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음식을 급하게 먹거나 소화가 잘 안 되는 음식을 먹으면 토합니다. 몸 안에서 음식물을 흡수하지 못한 채 다시 게워내는 것처럼, 뇌에서 처리하고 저장할 수 있는 정보가 아닐 때는 정리되지 않은 채로 흩어져서 뇌 전체에 흔적이 남게 됩니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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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이면 을유세계문학전집 122
씨부라파 지음, 신근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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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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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태국 로맨스물이 꽤 핫하다. 아주 대중적인 취향에 속하거나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탄탄한 마니아층을 확보하며 그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몇년 전 개봉했던 <선생님의 일기>는 물론 좋은 평가를 받은 퀴어영화 <러브 오브 시암>, 나아가 최근 국내 커뮤니티들에서 회자되고 있는 각종 BL웹드라마들까지. 한국의 콘텐츠가 전 세계를 호령하고 있는 이 시기에도, 태국은 한국의 콘텐츠시장 곳곳을 파고들어 여러 대중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그림의 이면>은 이러한 로맨스 강국 태국의 시작을 보여주는 작품인 듯하다. 무려 49쇄를 기록할 만한 태국 독자들의 열광적인 지지가 이러한 사실을 반증한다. 그래서일까, 직설적이지 않지만 완곡하고 은유로 넘치는 언어들 속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대사와 문장들에 눈길이 간다. 닿을 듯 말 듯, 독자를 애타게 하는 놉펀과 끼라띠 여사의 사랑은 2022년까지도 유효한 로맨스의 법칙들을 아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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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그림의 이면>이라는 제목처럼 그림이 주요한 오브제여서일까, 끼라띠 여사의 대사 속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 만큼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가 곳곳에 묻어있다. 끼라띠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놉펀과 그가 가진 젊음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끼라띠의 대화. 세상의 모든 순간들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자 하는 끼라띠의 태도까지. 작가는 아름다움에 대한 자신의 다층적인 견해들을 풀어낸다. 특히나 20세기 초 태국인들에게 비춰진 일본의 모습에 대한 묘사는 그 아름다움에 한층 깊이를 더한다. 현대사의 묘한 운명 속에서 제국주의의 식민지배를 피해간 태국인들이 바라본 제국주의국가의 부흥은 이런 모습이었겠구나 하는 생각들이 문득문득 떠오르곤 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결국 제국주의 위에 세워진 점을 상기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무상한가를 떠올리게 된다. 마치, 그림 한 점만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버린 끼라띠와 놉펀의 사랑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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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이 작품은 비련의 로맨스에서 기대하는 다양한 규칙들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작품이다. 2022년의 우리에겐 다소 기시감이 드는 전개일 수 있지만, 이것이 수십년 전의 작품임을 고려하면 이국적인 배경들 속에서 익숙하지만 낯선 스토리를 전개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특히나 "단 일주일 만에 일본에 머물고 있는 거의 모든 태국인이 두 분과 만났다"(p21)고 말할 정도로 일본과 태국의 교류가 극히 드물던 시절, <그림의 이면>이 로맨스의 규칙과 함께 이국의 풍경들을 함께 전해주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도 당연지사였던 듯하다. 최근 8-90년대 드라마가 유튜브에서 다시 업로드되고 있다. 그 시기의 로맨스물만이 가졌던 감성이 그리운 사람이라면 한번쯤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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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집으로 돌아와 몸을 뉘었을 때 나는 자문했다. 무슨 이유로 나는 끼라띠 여사의 사생활을 골똘이 고민하고 있는가? 그 문제를 반드시 풀어야 할 어떤 의무나 필요성이 내게 있는가? (...) 스스로에게 이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떨쳐 내어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이는 상당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 P40

"나는 아름다움을 사랑해.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결점과 시듦이 없는 상쾌한 감정을 발생시키기 때문이지." - P48

나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건이 다른 한 사람의 인생에서는 가장 의미 있는 것임에 내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가련하도다, 인생이여!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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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사 1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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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각보다 훨씬 본격적인 추리소설이라 놀랍고 반가웠다. 한때 일본 추리소설에 내 청소년기를 바친 사람으로써, 한국에서는 정통 추리문학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는데 이 책이 그런 아쉬움을 조금은 날려주는 책인 것 같다. 형사물이 따라가야 하는 기본적인 규칙들은 그대로 가져오되, 장강명 작가가 기존작에서 보여왔던 미묘한 위트와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의식은 곳곳에 미묘하게 흔적을 남겼다. 그야말로 '장강명식' 정통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직 1권만 읽은 상태라 어떤 전개가 이어지게 될 지 조금 더 지켜봐야 겠지만, 절반이 지난 시점에서 나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나처럼 일본 추리문학과 함께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보면 흡족해 할만한 책이다.


#2.

기본적인 형사물의 전개를 따라가지만, 안전한 방식을 택한 것만은 아니다. 일단 현재의 사건이 아니라 20년 전의 미제 사건을 추적한다. 누렇게 바랜 수사자료만큼이나 희미한 흔적들을 찾아가는 형사들의 고군분투가 한편으로는 안쓰럽지만서도 흥미를 돋운다. 사건의 전개가 지지부진함에도 그들이 안간힘을 쓰는 모습에 빠른 속도감을 보여준다. 추리소설의 생명은 역시 속도감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빠르게 읽어내려가기에는 정말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순행적 서사를 따라가면서도 다양한 시간적 감각이 교차한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1970년대에 태어난 1990년대 학번 대학생이, 2000년대에 살해당했으며 2020년대가 되서야 수사를 하는 이야기이다. 또한 이 1990년대 학번 대학생들은 1980년대 학번들과의 가치 충돌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가는데, 한국 현대사의 급변하는 이 모든 시기가 하나의 사건을 통해 계속해서 응집되고 또 다시 견고하게 얽혀들어간다. 언뜻 보면 작가의 욕심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장강명 작가는 이 모든 시간의 감각들을 성공적으로 엮어낸다.


#3.

이 작품은 현재 시점의 두 가지 시선이 공존한다. 사건을 조사하는 형사 지혜의 서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범인의 자기고백적 묵시록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묶어내는 것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적 세계다. 범인은 중간중간 도스토예프스키와 수많은 철학자들을 언급하며 자신의 살인을 정당화하고 현학적 말을 내뱉는다. 하지만 이 관념적인 말들이 사건을 수사하는 지혜의 행적 곳곳에서 발견될 때면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실감나게 한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로 귀결되는 용의자들의 관계 속에서, 다들 정체를 알 수 없는 범인과의 접점이 발견될 때마다 의심의 눈초리를 세우게 된다. 어느 한 사람도 안심해서 볼 수 없는 노릇이다. 개인적으로는 유력한 범인으로 추정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 사람이 진짜 범인인지는 2권이 되어서야 알 수 있겠지. 현실을 살아가는 형사와 관념 속에 파묻힌 범인. 진실을 쫓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형사와 윤리학적 멘트들을 내뱉으며 고고하게 자리를 지키는 범인. 선과 악이 모두 뒤엉켜버린 문장들 속에서 장강명 작가는 우리를 어떤 결말로 이끌어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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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출판사로부터 가제본을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된 리뷰입니다.

그런데도 판사들은 피고가 깊이 반성하고 있다며 형을 깎아주기도 하고, 반대로 반성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며 형량을 높이기도 한다. 그러니 만약 어느 죄인이 정말로 자기 죄를 뉘우친다면, 재판장에서 아주 뻔뻔하게 죄를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바라던 대로 중벌을 받을 테니까.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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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민트 (양장)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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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원> 이후 백온유 작가의 신작을 간절히 기다려왔다. 올 초 창비 스위치를 통해 연재된 <경우 없는 세계> 소식만으로도 설렜는데, 예상을 깨고 완전히 다른 작품인 <페퍼민트>로 만날 수 있게 되어 너무 설렜다. 그리고 이 백온유 작가는 나의 설렘과 기대감을 넘어선 놀라움을 선사했다.

  <유원>과 닮은 듯 보이면서도 완전한 대척점에 서 있는 <페퍼민트>는 아주 극단의 상황 속에서 아주 일상적인 질문을 던진다. 나는 나의 삶을 살 수 있을까? 더 정확히는, 나의 삶을 선택할 용기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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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생의 모든 순간은 처음으로 맞이하는 순간이다. 아무리 동일한 일상이 반복된다 한들, 미묘한 차이가 쌓이며 변화를 가져오고 우리는 그 변화에 맞서면서 적응하고자 노력하지만 또 다시 새로운 상황과 마주하며 그 노력은 무용(無用)해진다.

  시안의 생활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간병인도 인정할 만큼 프로가 된 시안에게도 엄마의 수발을 드는 일은 여전히 힘들고 낯설다.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일이지만 텅 빈 것 같은 엄마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도, 시체와 다를 바 없는 엄마와 밤을 지새는 것도 언제나 두렵고 낯선 일이다.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시안의 엄마를 보고 충격을 받은 해원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린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해원의 그 충격은 시안이 매일같이 마주하는 감정일 테니까. 시안과 해원은 과거의 아픈 기억들을 마주하며 상처를 받지만, 아마 두 사람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는 것은 매일매일의 일상일 것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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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어진 무게를 떨쳐내고 나의 삶을 찾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엄마 곁에서 1분 1초도 떨어질 수 없었던 시안과 아빠는 똑같은 결심을 한다. 그것도 아주 급진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급진적이고 결연한 방법만이 지금 주어진 무게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안은 이 결심에 해원을 이용하려 했고, 계속해서 도망치던 해원은 자신이 가진 무게를 떨쳐버릴 수 있는 방식이 그것이라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기 직전까지 가지만 결국엔 실패했다.

  세 사람의 결심은 모두 실패했지만, 족쇄와 같은 무게감과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은 전문 간병인의 제안에 의해 생각보다 간단하게 마무리된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겨버렸을 때,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 거대하고 엄청난 희생이라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의외로 아주 가볍고 홀가분하게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은 언제나 존재하는 듯하다. 물론 그것이 완벽히 해방시켜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도망치기 위해 선택한 급진적인 길은 또 다른 무게감과 죄책감, 트라우마를 가져올 수 있다. 그 실행에 가장 근접해서 처벌을 받는 시안의 아버지처럼 말이다.

  일상을 추동하는 힘이 결국엔 가장 홀가분한 해방에 근접할 수 있도록 만든다. '산 사람은 살아야 된다'며 장례식장에서 유족들에게 식사를 권하는 어르신들의 말이 그저 위로의 표시일 뿐만 아니라, 그 상황을 타개하고 돌파하는 진리가 담겨 있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비로소 식사 시간을 확보하고 서로를 만나기 위해 난생 처음 지각을 선택한 시안과 해원의 진심 어린 미소가 그것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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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빠는 내게 웃어 보였다. 그런 표정으로 애써 나를 달랬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나았다.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책임감을 가지라고. - P110

"그거 알아? 우리는 견디고 있어. 이 악취를, 시린 소독 냄새를, 좁은 침대를. 엄마는 뭘 견디고 있어?" - P121

"알아. 어쨌든 네가 나에게 엄마를 완전히 맡기고 하루에 단 몇 시간이라도 네 시간을 보내는 게 좋았어."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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