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사 1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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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각보다 훨씬 본격적인 추리소설이라 놀랍고 반가웠다. 한때 일본 추리소설에 내 청소년기를 바친 사람으로써, 한국에서는 정통 추리문학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는데 이 책이 그런 아쉬움을 조금은 날려주는 책인 것 같다. 형사물이 따라가야 하는 기본적인 규칙들은 그대로 가져오되, 장강명 작가가 기존작에서 보여왔던 미묘한 위트와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의식은 곳곳에 미묘하게 흔적을 남겼다. 그야말로 '장강명식' 정통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직 1권만 읽은 상태라 어떤 전개가 이어지게 될 지 조금 더 지켜봐야 겠지만, 절반이 지난 시점에서 나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나처럼 일본 추리문학과 함께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보면 흡족해 할만한 책이다.


#2.

기본적인 형사물의 전개를 따라가지만, 안전한 방식을 택한 것만은 아니다. 일단 현재의 사건이 아니라 20년 전의 미제 사건을 추적한다. 누렇게 바랜 수사자료만큼이나 희미한 흔적들을 찾아가는 형사들의 고군분투가 한편으로는 안쓰럽지만서도 흥미를 돋운다. 사건의 전개가 지지부진함에도 그들이 안간힘을 쓰는 모습에 빠른 속도감을 보여준다. 추리소설의 생명은 역시 속도감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빠르게 읽어내려가기에는 정말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순행적 서사를 따라가면서도 다양한 시간적 감각이 교차한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1970년대에 태어난 1990년대 학번 대학생이, 2000년대에 살해당했으며 2020년대가 되서야 수사를 하는 이야기이다. 또한 이 1990년대 학번 대학생들은 1980년대 학번들과의 가치 충돌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가는데, 한국 현대사의 급변하는 이 모든 시기가 하나의 사건을 통해 계속해서 응집되고 또 다시 견고하게 얽혀들어간다. 언뜻 보면 작가의 욕심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장강명 작가는 이 모든 시간의 감각들을 성공적으로 엮어낸다.


#3.

이 작품은 현재 시점의 두 가지 시선이 공존한다. 사건을 조사하는 형사 지혜의 서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범인의 자기고백적 묵시록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묶어내는 것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적 세계다. 범인은 중간중간 도스토예프스키와 수많은 철학자들을 언급하며 자신의 살인을 정당화하고 현학적 말을 내뱉는다. 하지만 이 관념적인 말들이 사건을 수사하는 지혜의 행적 곳곳에서 발견될 때면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실감나게 한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로 귀결되는 용의자들의 관계 속에서, 다들 정체를 알 수 없는 범인과의 접점이 발견될 때마다 의심의 눈초리를 세우게 된다. 어느 한 사람도 안심해서 볼 수 없는 노릇이다. 개인적으로는 유력한 범인으로 추정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 사람이 진짜 범인인지는 2권이 되어서야 알 수 있겠지. 현실을 살아가는 형사와 관념 속에 파묻힌 범인. 진실을 쫓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형사와 윤리학적 멘트들을 내뱉으며 고고하게 자리를 지키는 범인. 선과 악이 모두 뒤엉켜버린 문장들 속에서 장강명 작가는 우리를 어떤 결말로 이끌어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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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출판사로부터 가제본을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된 리뷰입니다.

그런데도 판사들은 피고가 깊이 반성하고 있다며 형을 깎아주기도 하고, 반대로 반성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며 형량을 높이기도 한다. 그러니 만약 어느 죄인이 정말로 자기 죄를 뉘우친다면, 재판장에서 아주 뻔뻔하게 죄를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바라던 대로 중벌을 받을 테니까.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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