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 강의 - 미국 명문대 교수가 추적하는 뱀파이어의 세계
로렌스 A.릭켈스 지음, 정탄 옮김 / 루비박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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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후에 뱀파이어가 되는 후보군은 자살이나 무기에 의한 살해, 심장발작의 경우에서처럼 대개 즉사한 사람들이다. 부지 불식간에 일어나는 즉사 또는 급사(공격에 의한)는 살인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리고 의학적인 확인에 의해서도) 의심스러운 시체들은 실제로도 특히 겨울에 매장된 경우에는 당연히 매우 느리게 부패한다. 급사한 시체의 경우, 부패의 자연스러운 과정을 통해 가상적인 특수효과를 연출하기도 한다. 급사한 시체는 부패 과정에서 피가 입으로 몰리고 몸이 부풀며 외관상 피부가 싱싱해진 것으로 보인다.(이것은 피부와 손발톱의 속살이 드러나 사실을 피부가 유실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영(뱀피리즘의 출발점)의 측면에서, 때 이른 매장(프로이트가 섬뜩하다고 말하는 바로 그것)은 여전히 우리에겐 뱀파이어를 받아들이는 첫 번째 근거가 된다.  -<뱀파이어 강의>에서




때 이른 매장! 고통스러운 상상이다. 사후이면서 아직 '살아 있는'경험. 구부러진 손발톱에 혈을 뭍히고 관뚜껑을 향해 몸부림 쳤을 처절하게 뒤틀린 시체는 외관상으로는 공포이지만 '애도'의 관점에서는 비극이다.

뱀파이어. 비어있는 관 속에서의 칩거와 인혈을 찾기 위한 밤사냥을 여지없이 떠올리게 하는 공포 영화의 주인공. 하나같이 기구한 죽음의 사연을 지닌 그들의 이야기는 결국 행동 양식에 촛점이 맞춰져왔다. 약간 창백하거나 우울한 기질 뒤에 기괴하고 끔찍한 실제가 드러나는 양상으로 말이다. 

최근 <렛미인>이라는 영화가 뱀파이어 영화에 대한 신선한 감각을 내놓긴 했지만 어쨋거나 '뱀파이어'영화는 오락물에 불과했다. 공포와 미지를 맛보고 상상의 영역을 체험하는 정도면 만족스러울 그런 장르였다. 하지만 이 책<뱀파이어 강의>는 상상속의 흡혈귀를 밖으로 끌어내지 못해 안달이다. 샐 수도 없을만큼 많은 뱀파이어 영화들을 소개하고 분석하면서 프로이트, 마르크스, 니체까지 동원되고, 뱀파이어의 기원으로 모자라 잠재의식이나 정신분석학적 접근을 주로 한다.

영화출처; 네이버 영화검색

일단 시작된 강의는 26강까지 이어진다. 각 장에 부제라도 붙었다면 이해하기가 훨씬 좋았겠지만 이 책, 과히 친절하지 않다. 이미 10년이상 지속된 대학의 인기강의가 책으로 발간된 경우라니 주제의 참신함이나 깊이에 이끌려 묵묵히 읽는 수밖에 없다. 

치명적인 매력으로 영화의 문학의 주인공으로 발탁되는 뱀파이어에게는 도데체 어떤 학술적 가치가 있는 것일까. 솔직히 책을 읽고도 명쾌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안면식도 없는 영화나 문학의 인용과 해석이 장막을 만들고, 정신분석학적 접근 역시 체계적으로 표명된 기술방식이 아니었다. 바라건데 강의라면 재미있게 들었을법한 자유로운 서술이 이어진다.

거창할 듯한 뱀파이어의 기원이나 의미를 한데 모으기 보다는 영화속에, 문학속에, 학문속에 산재해 있는 뱀파이어를 산발적으로 만나야만 한다. 가령 프로이트는 죽음을 맞히하는 우리의 두 가지 상반된 모습(책에서는 양가성이라는 말을 쓴다)을 지적한다. 망자에 대한 예우에 반해 망자의 부활 역시 두려워하는 인간의 모습이 '애도'의 실상이라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애도'란 상당히 중요한 감정인데, 뱀파이어의 후보군에 포함되는 망자들은 모두 적절히 애도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오로지 정신분석만이 뱀피리즘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라고 공언한 저자는 둘 다 '죽었으나 죽지 않은 자에 관한 경쟁 과학'이라는 공통점을 향해간다.  

잘못된 사망판단이 산 자를 무덤에 집어넣었고, 뱀피리즘의 근거가 되었다고 해도 인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만큼 변하지 않는 원흉이 또 있을까. 

또 다른 뱀파이어에 담긴 상징 중 유년기의 어머니와의 결속문제가 등장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위해 어머니의 개인적 공간을 소비(젖)하고 침범하는 시기. 이 폐기되었어야 하는 단계가 귀환하면서 나타난 뱀피리즘이 보호본능을 야기하는 것일까. 확실이 뱀파이어들은 아이처럼 이기적이고 기생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반면 목표물에 대한 굉장한 파워를 보여주기도 한다.)

뱀파이어에 관한 밀착 접근은 이만하면 만족스럽다. 신화적이기까지 한 존재에 대한 당연한 예우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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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사라 쿠트너 지음, 강명순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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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은 정말 엿같은 이벤트죠."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는 이렇게 시작된다. '새로 만난 정신과 전문의는 자기가 무슨 유명스타라고 생각하는지 한 껏 폼을 잡으며 말했다.'라며 의사를 분석하는 환자 카로의 이야기. 남자친구에게, 직업에, 인생에 굉장한 불만족을 느꼈던 서른의 카로는 카드 점을 보러가듯 심리치료를 시작한다. 스스로도 심각한 상황은 아니라고 진단했던 만큼 절대 심각한 삼십대의 이야기가 아님을 예고한다.
 
젊은 작가들의 통통튀는 문장과 감성이 문학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는 시류에 어울릴만한 소설이다. 게다가 요즘 '우울증'은 정신적 감기에 비견될 정도로 흔한 병명이 아니던가. 은밀한 공감도 면에서도 박수를 받을 만하다. 

지금 당장 검색창에 '우울증'을 쳐본다면 의학적 소견들이 쏟아질 것이다. 
'우울감, 자살 사고, 의욕상실, 무기력감, 피로감, 수면장애, 성기능 장애, 집중력 저하, 식욕장애'

단지 혼자가 되는게 두려워 이별하지 못하는 남자친구를 가졌거나, 적성에 꼭 맞는 직장을 석달전에 잃어 대낮에 늙은이들만 모여드는 B급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야하거나, 가짜친구들을 추려내면서 오히려 그들이 반기는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저 수많은 증상중 적어도 두 세가지쯤 겪지 않을 위인이 어디있을까. 

다만 카로에게는 다혈질의 감정괴물이라는 요소가 추가될 뿐이지 당신이나 나처럼? 꽤나 똑똑하고 유머러스한 여자다. 그런 카로가 지독히도 집착하는 것은 '사랑'이다. 아무래도 사랑같은 건 개나 줘버리자는 여자보다는 한수 아래다. 그래서 나는 카로의 증상을 정상이라고 간주해 버렸다. 헌데 이 여자, 한밤중에 응급실에 갈 정도로 상태가 가끔 나빠진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내 어린 시절은 불행했어요. 가끔 뺨까지 때리는 불행한 엄아에다가 내가 절실하게 사랑이 필요했던 시기에 딸보다는 세계문학의 진주를 캐내는 일에 더 몰두했던 대단한 아빠가 계셨거든요. 두 분은 이혼까지 하셨죠. 또 결혼한 삼촌이 하나 있었는데, 어린 내게 해서는 안 될 몹쓸 짓을 했어요. 이상한 방식으로 날 '사랑했던'거죠. 그리고 내가 진짜로 사랑했던 외할아버지는 일곱 살때 돌아가셨고요."

프로이트라도 동원될 법한 불우한 어린시절의 주인공 카로는 단숨에 부정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쁜 삼촌 카드'는 수년 전에 극복한 상태라고. 그녀의 트라우마를 만든 이 가족사는 카로의 심리여행에서 제외되어도 좋을 듯했다. 그녀를 힘들게 하는 주범들로는 당연히 '남자'가 지목된 상태였다. 필자는 내내 그녀의 이별과 고통과 설렘과 극악한 증상들을 되풀이해서 만나야했다. 솔직히 이런 과정은 그닥 반갑지 못했다.

자아가 강한 현대 여성의 우울증을 유쾌하고 명랑하게 쓰겠다는 명목으로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지는 이런 과정들은 자위에 가까웠다. 그녀의 우울증 극복기는 별다른 희망이나 개운함도 주지 못했다. 페이지라는 관성 때문에 독서를  마치고 말았다니! 게다가 이렇게 길게 서평까지 쓰고 있다는데 심리치료를 부탁하고 싶을 지경이다.(하나도 안 웃긴가)

'내가 졌어요'(관심남이 카로에게 보낸 문자)라고 카로에게 문자를 전송해야겠다. 정말 무심했다면 이렇게 긴 편지를 쓰지도, 책을 다 읽지도 않았을테니 말이다. 그래, 이 이야기는 싱글의, 더 이상 어리다고 말할 수 없는 서른 나이의 여자라면 공감할 수 있는 괜찮은 소재지만 증상과 심리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기도 했다. 울림통이 빠졌다고 해야할까. 데뷔작이라는데 마음을 다독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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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엔젤리너스
이명희 지음 / 네오휴먼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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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루하고 지루하고 도덕적일거라 지제짐작했던 나눔의 이야기. 연말에나 어울릴만한 이벤트성 도서의 징후를 살짝 피해간<호모 엔젤리너스>. 

인간에게서 과연 천사의 깃털을 들어올릴 수 있을까. 아낌없이 내것을 내놓고(기부), 남을 돕고(봉사), 몸이나 능력이 아니라 영혼을 살찌우기 위해 애쓰는(소셜 디자이너) 그런 삶은 특별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책을 봐도 그들은 열외없이 특별하다. 희망 제작소의 박원순 상임이사, 영인 문학관의 이어령 강인숙 선생, 푸르덴셜 생명 부사장 손병옥 부사장. 한국점자도서관관장 육근해 등등. 

현장에서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는 그들의 직함은 나눔조차 권력이 될만큼 파워풀해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개인의 배부름이 아니라 나눔을 향한 한걸음 더 나아가기다. 그래서 빛나는 이름들이다. 기부의 사연을 담거나 봉사의 손길들만 비추었다면 서둘러 책을 덮었을것이다. 헌데 이 착한 책이 비젼을 보여주고 있었다. 


(투병중인 아이들의 소원들어주기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메이크어위시. 백혈병에 걸린 정표는 작가가 되어싶어했지만 책을 보기도 전에 하늘나라로 떠났다고 한다.)

기부문화 세우기나 유산 환원문제, 문화나눔, 나눔 프로젝트 등, 머지 않아 우리에게 찾아오게 될 新나눔 이야기의 최전방들. 한마디로 <호모 엔젤리너스>는 상당히 세련된 나눔 철학책이다. 

나눔의 기쁨이 얼마나 이기적일만큼 짜릿한지 그들은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마흔 쯤 되면 '나와 가족'을 위한 삶을 한 번 쯤 돌아보게 될른지 모르겠지만 그런 때가 오면 나는 이 책을 떠올릴 것이다. 혹은 <엄마를 부탁해>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자식들을 돌보며 인생의 소진한 엄마가 돌봄을 받아야될 나이가 되었을 때, 또다시 누군가를 돌보기로 몰래 결정한다. 책을 읽었을 당시에는 '키움'이 일종의 습관처럼 느껴졌었다. 자식들을 여럿 '키워내고' 농작물들을 매년 '수확하고' 그 관성에 의해 고아원의 아이들을 '돌보는'과정이 지나치게 완벽한 '자선'의 삶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현재의 내가 내린 결론은 그저 환상 속의 엄마에게 해당될 해묵은 습관같은 거였다. 

지금은 충분히 그런 일이 가능해 보인다. 가족을 위한 삶과 그 이후의 삶은 분리되어야 마땅하다. 스스로 선택한 나눔의 의미는 습관이나 기쁨을 넘어 진정 '내가 필요한 자리'를 찾아가는 중요한 삶의 과정인 것이다. 남을 돕는 것이 스스로를 돕는 것이라면 우가 그런 봉사를 자랑으로 여길 것인가. 


<호모 엔젤리너스>가 한 사람의 일관된 서술로 이루어졌다면 밉살맞은 도덕책으로 여겨졌겠지만 열 한명과의 인터뷰를 담았다는 점에서 필자는 내가 할 수 있는 '나눔'을 가늠해 보기에 이르렀다. 스스로도 장애인이면서 한국점자도서관에서 낭독봉사를 하고 있다는 윤진경씨. 그녀는 어린 시절 의사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보다 행복한 사람이 되어라' 내 아이에게도 꼭 해주고 싶은 말이다. 

헌혈에 관한 찔리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한 적십자 혈액관리본부장 박규은씨는 헌혈에 대한 오해를 걷고 국내 수혈사정에 대해서 진솔하게 말한다. 문화나눔에 대한 이어령 선생의 식견도 블로깅을 하는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누군가는 밤새도록 글을 써서 인터넷에 올린다. 그 사람은 왜 그토록 소중한 정보를 아무대가 없이 올리고 앉아 있는가? 내가 온 정성을 다해서 열심히 써놓은 글을 누군가가 읽고 감동받기를 소망하기 때문이다.(중략) 자기만족을 위해서든 공익을 위해서든 그들은 주는 기쁨에 중독되어 있다.(중략) 인터넷의 근간은 정보공유요, 공유는 나눔이며 본능인 것이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다면 농부의 모습일거라는 시골교회 임락경 목사는 '밥이 하늘'이라는 생각아래 유기농 먹거리로 장애인과 함께 살림을 살고 있었다. 아이디어로 나눔을 실천하는 유명한 나눔가 원순씨(박원순)는 할 일많은 지옥이 천국보다 나을것 같다고 한다. 지옥에서 억울한 사람도 변호하고 나눔의 정신을 가르칠 학교도 세우겠다는 그의 말에서 기발함의 원천을 만난다. 미래에는 도포입고 시골을 누비면서 토지기부운동을 해보겠다는 신선한 포부에도 동참하고 싶을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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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기 구겐하임 자서전 - 어느 미술 중독자의 고백
페기 구겐하임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인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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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창작의 시대가 아니라 수집의 시대다' 


미술계의 수많은 사조와 천재를 배출했던 20세기. 미술운동 전체가 거대한 투기사업의 현장으로 바뀌기 이전 페기 구겐하임은 뛰어난 수집가로서 화가의 조력자로서 전시의 컬렉터로서, 뉴욕과 런던 베네치아등을 오가며 천재 화가들의 작품을 선점하는 재력과 재능을 선보인다. 

유럽등지를 돌며 전시활동을 하고 뉴욕으로 돌아온 그녀는 주식처럼 거래되는 미술품들의 가격에 벼락이라도 맞은듯 놀란다. 진정으로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작품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란 사실에 통탄하고 책임감을 느낄만큼 그녀의 미술계를 향한 사랑은 특별했다. 너무 열심히 노력만 하는 예술가들이 잃은 독창성에 대해 '더이상 그림이 아니다'라고 일갈하는 그녀의 자신만만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천재가 10년 단위로 나올 거라고 기대할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피카소, 몬드리안, 칸딘스키, 클레, 레제, 브라크, 그리스, 에른스트, 미로, 브랑쿠시, 아르프, 자코메티, 립시츠, 콜더, 플록 등으로 만족해야한다고 선언한 그녀가 할 일은 그들을 대중에게 선보이는 것이었다. 


어느 미술 중독자의 고백





이 책은 뒤샹의 다다와, 에른스트의 초현실과, 플록의 추상표현을 한 여성의 반짝거리는 개인사를 통해 엮을 수 있는 독창적인 자서전이다. (뒤샹은 그녀의 선생님, 에른스트는 그녀의 남편, 플록은 그녀가 후원하는 화가였다)         

후원자라고 하면 고급스럽거나 유별난 취미로 미술품을 수집하고 화가를 돕는 큰 손을 상상할 수 있었다. 페기 구겐하임을 만나기 이전에는 말이다. 부의 권력자도, 자선가도, 하물며 예술가도 아닌채로 예술과 예술가 모두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자신의 수단(돈 이겠다)을 동원해 국가를 넘나들며 미술관을 짓고 예술가를 돕는 사명감을 가진 이 여성을 뭐라고 불러야할까.
 
'페기 구겐하임'이라는 이름을 각인 시킬만한 이 자서전은 마치 처음 보는 실로 만들어진 옷감 같았다. 솔직하고 유쾌한 건 그녀의 기질일테지만 평범한 문장으로 유머를 구사하고, 단순한 설명으로 상황을 압축하고, 담백한 묘사로 상상력을 돋우고, 똑박또박 적은 일기 한줄로 감정의 굵은 선들을 잡아낸다. <페기 구겐하임 자서전>은 날아다닐 듯 경쾌한 한 여자의 자화상과 천재 예술가들의 질척한 기질들이 어우러져 시대의 낭만을 그려낸다.   

욕망의 발견


지루한 건 딱 싫어할 타입인 그녀답게 어린시절 가족일가에 관한 통찰들은 흥미롭다. 목탄을 먹고 사는 삼촌이나 모피코트를 쌓아놓고 아무에게나 주는 외삼촌, 치유불가능한 고음으로 노래를 부르고 다녔던 이모 등 괴상스럽거나 불운한 가족사는 그녀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학교에 가지 않고 좋은 교육을 받으면서 '고상한 취향'을 길렀다는 페기 구겐하임은 타이타닉호의 침몰로 아버지를 잃는다. 학교 졸업 후 만난 급진적인 가정교사로 인해 질식할 것같은 가족사로부터 해방될만한 놀라운 씨앗을 뿌리고 모든 것을 보고자하는 강렬한 욕망으로 미술작품들을 만나게 된다. 


남자 수집사


그녀의 작품 수집사가 자서전의 가장 큰 비중이긴 하지만 '남자 수집사'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재미 중 하나이다. 대단한 남성편력으로 예술가이자 남자였던 그들을 만난건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솔직하게 밝히는 그녀의 애증의 역사는 편생 한 두(?)번의 결혼으로 생을 마감하는 우리에게 오히려 진보적인 고백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나는 첫 경험을 했다.그것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로렌스 베일과의 7년간의 결혼생활 덕분에 20세기 지식인의 세계에 합류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그녀는 남편이란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보다 그 생활이 끝난 다음 더 만족스러운 존재인것 같다고 총평하기도 한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이어지는 두 번째 남편 존 홈스는 천재라는 평을 듣는 이였는데 법적 결혼 상대는 아니였지만 아주 특별한 관계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여자를 제대로 '이해'하는(이런 남자가 있다니!) 남자였다는 그는 죽는 날까지 페기의 생각 하나하나를 이끌어주는 인생과 예술의 교사 역할을 해냈다. 

영국의 시골에서 스스로 최대한 유용한 존재가 되기를 갈망한 페기. 그녀의 오랜 친구(!)로 등장하는 마르셀 뒤샹은 현대미술에 입문할 수 있는 초석을 만들어주었고, 당시 사무엘 베케트(!)를 향한 일방적인 열정을 지닌 상태였다.(이 때부터 거의 책을 넘길 때마다 소위 천재적인 화가나 예술가라고 알려진 이름들이 주변인물로 셀 수 없이 등장한다)

몬드리안, 브르통, 브랑쿠시, 에른스트, 플록과의 에피소드나 애정전선은 이름하나하나가 주는 묵직한 느낌에 먼저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또 이 예술가들을 위한 헌신 혹은 열정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발휘되었는지 확인하는 담백한 글귀들로 인해 그녀의 과감성과 대범함, 상상력들을 부러워 하고만다. 그것들이 간혹은 미친 생각이었을지라도 파격적인 아이디어로 혼란을 안겨줄지라도 예술가를 사랑하듯 그녀를 사랑할 수 밖에 없을 고백들이다.
 

금세기미술 화랑

사실 가장 주목되어야 할 부분은 그녀가 기획한 혁신적인 전시들이다. 가장 열정적으로 몰두했던 분야인 이 일은 그녀의 자신만만함과, 담백하고도 대담한 고백들과, 미술계를 향한 거침없는 직언들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증명한다. '어느 미술 중독자의 고백'이라는 부제처럼 그녀는 그림을 너무나도 사랑했고, 특히 20세기 현대미술을 위해 몸과 돈과 매력을 흩뿌렸고, 그 열정은 막을 수 없이 흘러넘치기도 미술계의 균형을 기가 막히게 맞추어 내기도 했다.
 
<페기 구겐하임 자서전>은 '나는 추문을 일으키는 여자이고 더없이 멋진 여자이니'[각주:1] 가능한 고백이리라. 
                        



  1. 기원전3~4세기경 나그 함마디에서 출토된 이시스 찬가 중에서-안현미 시인의 시집 이별의 재구성 에서 인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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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메이슨 비밀의 역사
진형준 지음 / 살림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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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하다. 비밀 교리. 피타고라스. 앞치마. 컴퍼스. 

'프리메이슨'을 아시나요? 도를 아십니까,처럼 들리는가. 성경, 신화, 윤회 사상, 영혼, 기하학. 이 모든 것이 통합된, 각 종교가 지니고 있는 한계를 뛰어넘어 공통되는 비의로 묶는 것.(<프리메이슨>) 그것이 바로 프리메이슨의 궁극적인 지향점이었다. 
기독교의 교리를 적극 채용하고, 고대종교의 신화들을 상징으로 제시하고, 불교와 같은 윤회와 거듭남을 강조하고, 세계의 원리가 기하학, 건축, 과학과 맞닿아 있다고 확증하는 이색 종교가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전혀 모르셨다구요. 하지만 프리메이슨을 대표했던 인물들의 유명세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정확히 프리메이슨은 아니었지만 훗날 프리메이슨이 그의 정의나 사상을 많이 포함했던 피타고라스만해도 수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신비주의 철학자이자 정치가, 과학자, 스포츠맨이었다는 피타고라스는 수학적 계측이나 측량이 우주의 창조원리와 동일하다는 프리메이슨의 믿음과 일치했다. 모짜르트나 서구 낭만주의의 거장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르즈벨트, 독일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괴테, 역시 모두 프리메이슨 단원이었다면 확실히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까.




<시크릿 코드>는 전쟁 암호, 문자, 종교의 상징들, 그래피티, 바코드, 등 세상이 얼마나 수많은 코드로 이루어졌는지 실감할 수 있는 코드백과다. '코드'의 매력이나 쓰임이라면 비밀과 상징에 있을 것이다. 상징적인 암호들을 공유할 수 있는 집단에 속한다는 건 결속을 강화하고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신비주의를 낳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프리메이슨'은 <시크릿 코드>에 꼭 포함되어야만할 종교였다. 

메이슨이라는 단어와 그것이 품고 있는 그 어떤 의미도 비밀로 간직하라. (중략) 우리들이 남자, 여자, 아이, 막대기, 돌에 관해 비밀고 하라고 명한 것을 당신만이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형제에게만 밝히거나 프리메이슨의 지부에서만 밝혀라. 
-'돌의 비밀에 대한 서약' 중에서 

'입문하다'는 프리메이슨이 보통의 종교와 어떻게 다른지 보여준다. 체계적인 배움에 돌입하거나 발을 담그는 것을 보통 입문이라고 한다. 프리메이슨에는 이런 입문 절차, 혹은 통과제의가 존재한다. 몇 단계에 걸친 통과제의 안에는 비밀을 지키기 위한 서약과 경고를 담은 신화들이 등장한다. 이 '비밀스러움'이 프리메이슨을 둘러싼 온갖 의혹들을 난무하게 했다.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부와 권력을 가진 엘리트들이 만든 집단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니(<시크릿 코드>) 비밀의 힘이 대단하긴 하다.






하지만 프리메이슨이 쓴 프리메이슨 책<프리메이슨>이나 상상력에 대한 연구를 주로 한다는 진형준 교수가 쓴 <프리메이슨 비밀의 역사>에서 만난 프리메이슨은 세계재패의 의혹이나 잔혹한 형제애를 보여주는 이단의 집단이 아니었다. 물론 프리메이슨 자처해서 그것을 실토할리는 없겠지만 책 <프리메이슨>은 스스로의 종교를 변명하지 않으며 흩어지고 잘려나간 프리메이슨만의 순수한 가치들을 그러모아 진리에 대한 그들의 강렬한 갈구를 드러낼 뿐이다. <프리메이슨 비밀의 역사>로는 프리메이슨을 둘러싼 의혹의 실상과 이상을 추구했던 한 종교에 대한 탐색을 경험할 수 있다. 

<프리메이슨>이 종교의 심장부를 보여 준다면 <프리메이슨 비밀의 역사>는 프리메이슨의 몸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책의 초반부에서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비밀단체라면 왜 이제와서 책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걸까,라고 말이다. 현재 프리메이슨은 사실, 본질을 많이 상실한 상태이며 자선단체나 정당 정도로 비춰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감추고 있던 '비밀'은 그때도 지금도 비밀이 아닐수도 있다는 점이다. '신을 만난 이는 벙어리가 된다'는 말처럼 비밀이 스스로 자신의 입을 닫고 있는 거라면. 매우 개인적이고 지극한, 누구에게도 말로 전해줄 수 없는 것이라면 그걸 굳이 '비밀'이라고 해도 좋은 것인가. 

실제 예수와 붓다는 그런 비밀들을 현명하고 상징적인 언어나 삶으로 풀어낸 성자들이다. 프리메이슨의 비밀이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진형준은 스필버그의 UFO영화 <미지와의 조우>를 통해 설명한다. <프리메이슨 비밀의 역사>는 보들레르의 시 <알바트로스>, 멀더와 스컬리의 X파일, 살인마 잭 사건, 스님행새를 하는 땡초의 전말 등, 흥미진진한 예를 통해 프리메이슨의 교리나 암흑의 실체에 다가가려고 한다. 독자는 고딕의 건축들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 모짜르트의 마술피리, 낭만주의 작품들 속에서 프리메이슨을 만나면서 우리도 그 진리의 멀지 않은 영역에 닿았있음을 상기시킨다. 


 책 사진; 진형준 저 <프리메이슨 비밀의 역사>
직각자, 컴퍼스, 정삼각형 등은 기하학에 우주의 진리가 담겨있다고 여기는 프리메이슨의 상징을 드러낸다. 

세계 속의 '프리메이슨'은 짧은 번성과 긴 오명의 역사를 써야했지만 그 의미만큼은 강렬하다. 진형준의 책에서도 강조되고 있는 바이기도 하지만 <프리메이슨>을 만나면 좀 더 확실해진다. 프리메이슨이 도달하려는 '영적인 목표', 조직의 계보, 입문의식을 서술하고 있는 이 책은 크리슈나무르티나 붓다의 깨달음을 전하는 종교서적과도 빗댈만하다.

그들의 입문 의식을 보면

첫 단계; 열기와 닫기의 시작인 이 단계에는 닫힌 의식, 잠든 영혼을 깨워서 신에 대한 경외감을 보이는 동시에 비밀을 함구하라는 닫기로 마무리 된다. 
두 번째 단계; '폭포수 옆의 낱알'로 상징되는 이 단계는 철학적 단계다. 영적인 길로 들어가기 위해 지적인 본성을 발전시키고 통제하면서 내적으로 무럭무럭 성장하는 것이다. 이 입문단계의 지원자는 플라톤의 대화편과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의 글, 성녀 데레사의 '내면의 성채'를 탐독하라는 조언을 받는다. 
세 번째 단계; 신비한 죽음의 단계다. 이 죽음은 육체적 죽음이 아닌 정신적 죽음이다. 육적이고 감각적인 삶에서 영혼이 더 없이 자유로워지는 죽음. 죽음과 재탄생의 세 번째 단계를 통과하면 최초의 금속세공인 이름이 타이틀로 주어진다. 


각 입문의식에는 그에 따르는 상징적인 물질들을 함께 만나게 된다. 이 의식은 '프리메이슨'이 얼마나 참회와 속죄, 세속의 때를 벗겨야 함을 주입하며 깨달음을 위한 피나는 정진을 강조하는지 알 수 있다. 현재는 상징적인 의식들로만 그 자리를 메우지만 '프리메이슨' 본래의 고매한 정신을 만난다. <프리메이슨>은 종교의 기원을 말하면서 프리메이슨이 나아가야할 원론적인 방향에 대한 모색도 꿈꾼다. 시장체제와 편가르기로 인해 왜곡되고 모순된 현실의 종교에대한 따끔한 가르침으로 들어도 무방할 듯하다.

이런 이상적인 목표를 가진 종교가 왜 기독교나 불교만큼 널리 알려지지 못했는지는 공개된 입문의식이나 깨달음에 대한 비밀의 함구에서 드러난다. 수행, 영혼의 정화, 깨달음이 얼마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은밀히 일어나는지 이 종교는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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