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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데이비드 실즈 지음, 김명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아무나 쓸 수 있는 책. 그러나 아무도 쓰지 않은 책.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데이비드 실즈/문학동네/2010.3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명제입니다. 이런 고답적인 제목으로 뒤통수를 치고 나오는 이 책을 이번 주 제일 먼저 집어들었습니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20대보다 30대에 더 절실해 집니다. 나이가 문제는 아닙니다.
최고조에 다다른 생산력으로 짝짓기할 상대를 고르고 오차없는 결과물을 만든 이후에 맞이하는 '죽음'이란 단어는 형이상학이 하닌 하등현실이었습니다.
생식 임무를 다하는 순간, 우리는 버려도 좋은 존재가 된다.-책에서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내가 싱싱한 개체를 위한 수단이라구요? 이를테면 죽음과 정면으로 대응하자는 취지일테지요. 그러고 보니 아이를 낳은 다음부터 가시적으로 사라진 청춘, 끓는 사랑, 무모한 열정 같은 것이 단순히 외부적인 요인만은 아닌것 같군요.
저는 이제 죽기 시작한 겁니다.
아이를 하나 낳았으니(둘이든 셋이든) 인류의 사명을 완수한 샘이 될까요. 아니, 여성에게 XX유전자와 솔방울 생체시계를 더 나눠주어 연장된 수명으로 아이를 돌보게 한 책임도 뒤따르겠지만, 지금은 우선 네(아이)가 사는 일 말고, 내가 죽는 일이 시급해집니다. 방금 값을 치른 호떡이 구워지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 따끈따끈한 죽음이 아이가 태어남과 동시에 저를 맞이하는군요.
이제 죽음과 대적해 볼 시간입니다. 태어나자마자 내 것이었지만 여태 한번도 내 것은 아니었던 그 놈에 대해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놈과 제대로 싸우려면 하루에 30분씩 거르지 않고 운동하고, 채식식단을 강화하고, 알칼리수 10잔과 녹차 10잔을 마시고, 담배도 끊고, 종교를 가져야 하겠지요. 하지만 죽음과 싸워도, 싸우지 않아도 죽음이 온다면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실 건가요? 이 말에 운명을 대입한다면 좀 더 무거워 지겠습니다.
저자의 아버지는 죽음과 싸우는 인간 입니다. 더 자세히는 늙음을 거부하고, 그 말도 안되는 신경전에서 100전 100승할 것 같은 97세의 노인넵니다. 저자는 아버지가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고, 동시에 내일 당장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이건 '죽음'을 놀리겠다는 거지요? 사랑을 포함한 영원한 주제 중에 어떤 바보도 할 수 있는 '죽음'으로 한바탕 놀아보자는데 만 원 걸겠습니다.
예상보다 진지한 책은 아니라고 공언하고 싶습니다.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미국적인 책입니다. 스포츠가 있고 명언이 있고, 사생활이 있고, 폭로가 있고, 컴플렉스가 있고, 설탕이 있고, 발기가 있고, 그 모든 걸 뛰어넘는 자랑스러움이 있습니다. 저는 이걸 미국적이라고 느낍니다.
이 책을 굳이 저울질 한다면, 셰익스피어 부터 우디앨런, 아버지부터 택시 운전사까지, 그들이 죽음을 어떻게 말하는지가, 무게로 가중됩니다. 게다가 '그래도 우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거의 일치단결된 결말은 제가 알기론 딱 한 번밖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죽는 건 누구나 한다, 사는게 재주지' 그 어떤 위대한 이들의 명언보다 아버지의 이 한마디가 빛을 발하는 이유는 이 책이
'죽음'이 아닌 '아버지'에 대한 오마쥬이기 때문입니다.
죽도록 미워하고 누구보다 사랑하고, 가장 강하고 또한 가장 약한, 누구나의 거인이자 소인인 아버지에 대한 애증의 전선입니다. 짐짓 날을 세우며 태어남 부터 죽음의 순간까지를 과학적 사실들로 강렬하게 채우긴 하지만, 상식적이거나 전문적인 종류의 이런 지식들은 의외로 자주 만납니다. 물론 이렇게 꼬집어놓는 것도 힙들겠지만요.
그의 아버지는 그의 영웅이면서 쪼다고, 건강하면서도 늙어가고, 색광이면서도 몽상가인, 죽음과 가장 가까운 지상에 있는 인간입니다. 수사를 빼고 담백한 글귀가 이어지긴 하지만 그 뒤에 숨겨진 화려한 수식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습니다.
<스푸트니크의 연인>에는 자신을 설명하는데 주변 인물만큼 좋은 자료는 없다는 투의 말이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아버지를 통해 그 누구보다 자신을 많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신과 아버지와 과학과 스포츠와 통증이 만나는 이 자리는 누구나 들렀다 가는 버스정류장입니다. 뻔한 이야기를 가장 뻔하지 않게 하는 방법을 고안해 낸 그가 무척 부럽습니다. 수많은 추천사 중에 '이 책이 내 책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누군가의 말이 떠오릅니다.
인간의 몸을 알만한 과학서적들을 통독해서 자신의 언어로 녹이고, 죽음에 관한 경구를 수집하고, 아버지의 기이한 생명력과 죽음에 대한 거센 저항력의 일화를 고르고, 자신의 경험을 칼처럼 꺼내들어 꽂으면, 누구나 이 책을 쓸 수 있는 메뉴얼이 됩니다.
거의 흡사한 종류의 <내 몸의 사생활>로는 사실 이만한 정서적 충격은 받지 못했습니다. 과학과 몸이 만나는 지점을 시간 순으로 전개한 것은 동일했지만, 결정적으로 이 책은 삶에서의 '죽음'을, <내 몸의 사생활>은 하루의 여정 중 밤을 종착지로 삼았으니, 무엇이 스케일이 큰 지는 말 할 것도 없겠습니다. 무엇보다 아주 강한 치부들이 낯 뜨거울 정도로 들춰지는 이 책은 인문서가 아닌 논픽션이라는게 그 이유입니다.
그래요. 우린 언젠가 죽는다고 칩시다. 죽음와 이제 큰 용기로 마주했고, 째려보기도 했지만 기꺼이 악수도 했습니다. 더 이상 죽음이 슬픔, 회한, 원망 같은 부정적 감정만 포함한게 아니라 죽음과 싸워왔던 용맹한 늙음도 칭찬하고 싶습니다. 반대로 속수무책의 한계점을 확인하고 주춤 물러섰다면, 살아있는 순간이 더 소중해지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뜬금없지만 덤덤히 유언장을 쓰는 문화적 대안을 떠올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나도 죽음에 대한 멋들어진 한 마디를 보태는 것으로 책을 덮고 싶기도 합니다.
무대를 바라보듯 골목길을 주시하던 아이가 일명 왜가리 포즈로 시동을 걸더니 갑자기 흥에 겨워 춤을 추기 시작했죠.
재미난 일이 있으면 언제까지라도 깨어 있을 수 있다는 듯 버티다가 자기도 모르는 새 곯아떨어 진 아이에게서 저는 가장 환기된 죽음을 만납니다. 정해진 시간에 자야 내일을 보충할 수 있는 연속된 삶의 흐름을 사는 어른이 되면 오히려 죽음을 체감할 기회는 적어집니다. 매일을 죽고 매일을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아이들은 살고 있습니다. 잠을 통제하고, 식욕을 억제하고, 할 일을 정하고, 스케줄을 짜고, 불을 끄고 이불 아래 눕는, 알고보면 지극히 낙관적인(당연히 내일이 온다는) 하루가 갑자기 못마땅해 집니다.
우리의 하루는 매일 죽음을 연습하도록 설계되어 있을 지도 모릅니다. 내 안에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건, 동심의 차원이 아니라 태어 날 때부터 지닌 '삶과 죽음의 기술'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회한이 밀려옵니다. 하루의 삶이 좀 더 아이다워 진다면 죽음이 이토록 대단한 목록도 아니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