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의 다섯가지 중대한 질문-아이와 나누는 종교적 대화>는

나는 누구지?
왜 죽어야 하지?
내가 맘놓고 기댈 수 있는 곳은 어디지?
왜 다른 사람에게 잘해줘야 하지?
왜 어떤 아이는 다른 종교를 믿어요?

어린이가 하게될 종교적 질문 다섯가지를 꼽았다. 난 무작정 기다려야했다. 뭘? 아이(현재 27개월)가 종교적 질문을 해올 때까지. 
아니다. 초조했다. 부모 스스로도 대답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아이와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는 완벽한 미지수였다.
그러던...어제 밤이었다. 아기띠 안에 곰인형 봉봉이를 집어넣고 별안간 
"봉봉이가 죽었어."
라고 하는게 아닌가. 내가 미처 입도 떼지 못하고 있는 사이.
"이건 쓰레기야. 버려야돼."
아이는 연타를 날린다.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 봉봉이가 쓰레기야? 내다 버려야 한다고?"
"응."
저런 단호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리고 역시나 내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의 논리인즉슨, 죽으면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주 잠시)논리의 가장 잔혹한 현실을 보는 듯했다. 우선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도덕적인 방법을 택하고 말았다. (이건 분명히 세뇌된 도덕 교육-동화책, 학교, 부모의 교육-의 힘이다)
"그럼 보리(우리집 괭이)도 죽으면 쓰레기통에 버려야겠네?"
아이는 다행이 아니라고 말한다.(내 절실한 바람을 읽었을지도)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래. 내다 버리면 보리가 어디 버려졌는지 모르잖아.(여기서 멈췄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엄마랑 아빠랑 서영이가 잘 알 수 있는 곳에 묻어줄까?(여기까지만 했어도 좋았겠다) 그래야 기억할 수 있잖아." 
아이는 순순히 그러고마 했지만 결론까지 다 내려놓고 속으로 한숨을 내뱉는 엄마의 이상반응까지는 감지하지 못했다.

그렇다. 그토록 기다려왔던 '종교적 대화 Round①'에서 이 엄마는 실패하고 말았다.        
 

아이(여섯 살) : 하나님은 공기야?
부모 : 아니, 하나님은 공기가 아니야. 하지만 조금은 공기 같기도 해.
:
아이 : 왜 하나님은 모양이 없어?
부모 : 하나님은 어떤 생각 같아. 생각이 어떤 모양이 있어?
아이 : (잠시 가만히 있다가 웃으면서)없어.
부모 : 거봐. 하나님은 어떤...아주 강력한 생각 같기도 해.

-<어린이의 다섯가지 중대한 질문-아이와 나누는 종교적 대화>에서/프리드리히 슈바이처/샨티/2008.10

이런 선문답까지는 아니어도, 어른들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질문에 미리 대비하고, 아이와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부모 스스로도 이런 질문을 멈추지 말기를..블라블라..기대했던 책에 눈꼽만큼도 미치지 못했음을 시인한다. 아이와 함께 종교적 질문에 적극 참여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질문에 도덕적 급매듭을 짓고 말았다.  

하지만 후회하고 있을때가 아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갑작스레(늘 그렇지만) 닥친 이 일이 주는 교훈은 이랬다. 아이에게 튼튼한 철학으로 무장하거나 흔한 도덕관을 전달하는게 필요한건 아니란 사실이다. 그 순간 아이와 함께 물음표를 그리는 일이 소중하다.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과 최소한으로 알고 있는(죽음이 기억되는 방식)것을 아이에게 들려주고 아이만큼이나 궁금해 한다면 섣불리 결론을 내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린이의 다섯가지 중대한 질문-아이와 나누는 종교적 대화>가 말했던 '대화와 소통, 느낌으로 전달되는 강력한 메시지'를 믿어야 했다.   


여기 또 하나 질문을 던지는 책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자(굳이 하느님이 아니라도)의 존재는 특히나 죽음을 관할하는 인상이 짙다. 죽음이 종교와 맞닿은 이유는 삶에서 찾아오는 죽음의 형태가 '소멸'로 인식되기 때문일 것이다.

죽으면 어디로 갈까, (곤충이나 꽃을 꺾는 일)죽이는 일은 왜 일찌감치 금기시 될까. 누군가 벌이라도 주는 걸까.
 
아이들의 피부에 와닿는 질문은, 바로 '나''나의 행동'과 관련이 있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이 질문들 역시 '답'을 주려고 해서는 답이 안나온다. 곧바로 '종교로의 귀의'를 염두할 수도 있겟지만 그 안에서도 질문이 끊이지 않아야 하는게 종교의 속성일 것이다. 나는 그 전에 아이 손에 동화책을 쥐어주고 싶었다. 죽음에 관한 명랑. <8시에 만나!>


주인공은 세 명의 똑같이 생긴 펭귄이다. 키작은 펭귄은 나비를 죽이고 싶어한다. 키 큰 펭귄은 "하느님은 다른 동물들은 죽이면 안 된다고 했어." 라고 말한다. 키 큰 펭귄이 생각하는 하느님은 '힘이 세고, 엄청 크고, 위대한 인물이다. 규칙을 많이 만들어 놨고 그걸 지키지 않으면 안좋은 일이 일어나며 마음씨는 좋은 분이다.' 한가지 안좋은 점이 있다면 눈에 안 보이는 거라고 아쉬움을 섞어 말하지만 키 작은 펭귄은 이렇게 응수한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실제로 있는지도 알 수 없잖아." 그리고 연이은 협상끝에 이런 말을 덧붙인다. "하나님은 이곳을 만들 때 별 생각없이 아무렇게나 만들었나 봐." 게다가 아무데나 날아다닐 수 있는 나비를 보고 하나님의 불공평함을 원망한다. 

이들이 겪을 노아의 방주 유람 여행은 모두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하게 될 질문으로 배가 부르다. 결단코 하나님이 모습을 드러내시거나, 나쁜 짓에 대한 벌을 암시하거나, 모든 생명이 공정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거나 하는 즉물적 교훈은 없다. 눈맞춤이 부족한 엄마를 대신해 대화 상대가 되어줄만한 응대의 책이다. 또한 매우 유쾌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이와의 종교적 대화가 진지하기만 해야될 이유가 있을까. 아이보다 훨씬 많은 질문을 하고도 초라한 결론밖에는 내리지 못하고 있는 어른들의 두려움 때문에 괜히 심각해 진다면 아이들의 호기심을 깎아내리는 일일 것이다. 이 책을 보고 굳이 종교적 물음으로 향할 필요도 없다. 그저 죽음의 긴장감 속에서 노래하고 춤췄던 펭귄들처럼 삶의 희열을 느끼는 일로도 충분하다. 나비 속에 나비만, 비둘기 속에 비둘기만 있는 것이 아니란 정도만 감지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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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사로잡는 작가' 텐도 아라타가 빚어낸 선과 악, 생과 사가 교차하는 묵직한 삶의 드라마,에 조금 속았다는 기분이 든다. 두툼한 분량의 소설을 겁없이 잡을 때는 '읽은 만큼'의 억울함과, 독서를 마치고 싶어하는 책의 독자적인 관성을 순순히 받아들일 준비도 해야한다. 
 
선과 악, 생과 사가 교차하는 삶의 드라마란, 소설 어디에도 널려 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긴 했다. 단지 이 <애도하는 사람>은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한 데서 제140회 나오키 상 심사자들을 만족시켰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정면이 조금은 선연하고 은유적인 옆얼굴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촌스러운 모습이기도 했다. '정면으로 마주 한다는 건' 선과 악, 생과 사를 대놓고 다룬다는 뜻임과 동시에 비겁하게 뭍어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모든 죽음은 고결하다, 죽음 사람은 성정에 관계없이 애도 받아야 마땅하다, 삶과 죽음은 연장선상에 있다'같은 도덕적 교훈들을 반복적으로 답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애도하는 사람>이 정면으로 바라본, 삶에서의 죽음의 맛은 어떤 것일까. 죽은 사람을 위한 애도 여행길에 오른 시즈토가 죽음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은 단 세 가지다.

고인은 '누구에게 사랑받았고, 누구를 사랑했고, 누가 고인에게 감사를 표했을까'하는 것이다. 명복을 비는 일은 주제넘고, 죽음을 슬퍼하는 일은 시즈토에게 버겁고, 억울한 죽음에도 스스로가 심판자가 아니란 이유로 감정을 거세하며, 가히 수행에 가까운 '애도작업'을 벌이는 이 남자. 이 행위로 그가 얻고자 하는 것은 단 하나, 고인을 기억하는 것. 마치 삶의 끝처럼 보이는 '죽음'이 '기억되는 것'으로 영원을 누릴 수 있다는 듯, 맨살로 드러난 주제를 염불처럼 읊어야 하는 것이 이 소설의 족쇄다. 

물론 전지적 화자가 '애도하는 시즈토'만을 따라붙지는 않는다.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운 세 인물이 <애도하는 사람>의 주제에 밀착되어 소설은 나아간다. 죽음을 취재하는 사람,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 죽임을 저지른 사람, 그리고 나머지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 상당히 기획적인 의도가 엿보이는 구도다. 죽음을 바라보기에 이보다 분명한 다각도는 없을 것이다. 



죽음을 취재하는 마키노는 죽음을 읽을거리로 생산하는 상업적 틀에 갖혀있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카스키 준코는 죽음을 애도하는 아들 시즈토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죽임을 저지른 유키요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들은 으례 애도하는 사람에 의해서 조금씩 변했다. 당연히 '삶'의로의 귀착이었다. 시즈토가 살기 위해 죽음을 애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그들도 죽음을 통해, 그리고 고인을 기억하려는 고집스런 행위를 통해, 삶 속에서 언제나 빛나는 '사랑'을 발견한다. 삶에 대한 애착을 발견한다. 분량에 비해 정리 하기에는 상당히 간단한 소설이다. 그래서 나는 좀 억울했다. 

단편이어도 좋지 않았을까. 축소지향적 삶을 사는 그들을 닮은 소설이었다면 읽기에도 보기에도 낳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형식적 장편을 선택한 데는 작가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을 것이다. '삶의 드라마'를 보여주기에, 결코 가볍지 않은 '죽음'을 다루는데 긴 형식은 불가분의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가는 다년간(7)의 작업량을 고행을 하듯 소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적 고민이 끊임없이 글자로 노출되는 피치못할 소설적 기법에는 '시적인' 압축이 거의 선행되지 않았다. 이건 작가와 필자 사이의 가치관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필자는 이미 죽음을 다룬 은유의 소설들을 보아왔다. <에브리맨>이 그랬고 <슬로우맨>이 그랬으며 하물며 스콧 니어링의 죽음을 앞둔 유서 한장에서도 그 주제는 입체적인 사색의 시간을 가져다 주었다. <애도하는 사람>의 가장 신선한 점은 '애도'에 대한 깔끔한 정의 뿐이었다. 

소설은 작가의 구상을 실현해야 하지만 '작가의 눈'이 드러나는 순간 12시의 신데렐라처럼 초라해진다. 이것은 허구가 '진짜'이기도 한 이유다. <슬로우 맨>은 '작가의 눈'이 전면적으로 이용되는 포스트 모던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소설의 긴장감이 떨어지진 않는다. <에브리맨>의 한 줄 한 줄은 굳이 그 주제를 상기시키지 않아도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압축적이고 묵직한 삶의 발자국과도 같았다. 스콧 니어링이 남긴 유서는 죽음을 대하는 그의 자세는 물론이고 그의 삶이 어땠는가는 기억할 수 있는 정수이기도 했다. <애도하는 사람>은 하이쿠의 정신이, 시적 긴장감이 사라진 자리가 무척이나 그리워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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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계사 교과서에 아프리카는 단 한 줄이다'라는 의미의 문장이 브라운관에 떴습니다. 아마 설즘 EBS방송 이었을거예요.
'우리의 세계사 교과서는 유럽과 미국의 역사교과서가 다루어 온 것들을 그대로 옮겨왔고, 광활한 제3세계의 역사를 읊는데는 인색하다.' 라는 취지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강렬했습니다. 점찍어 두었던 책 <세계의 교과서 한국을 말하다>가 참고되기도 했구요.


그리고 이 주에 아이들을 위한 아프리카 책을 한 권 만납니다. <사라져 가는 세계 부족문화 아프리카>.
이 책이 아프리카를 보는 방식은 유물, 혹은 토속품을 통해섭니다. 책의 한 쪽 면은 아프리카인들이 사용했던 물건의 사진도면으로 되어있고, 다른 한 쪽은 그 유물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담은 '귀중한 유산 이야기'와 지역의 풍습, 역사등을 간단히 서술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사진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기도 하고, 마침 그 방송을 본 직후이기도 해서 '아이들에게 교과서에 없는 역사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방법은?'이란 최후의 질문에 적당한 답이 되기도 했습니다. 


광활한 사막이 펼쳐져 있고 인도양과 인접한 아프리카의 연안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그곳의 자연만큼이나 다양하고 찬란한 문화를 지닌 여러 부족을 만나게 됩니다. 도시에 사는 부족, 시골에 사는 부족, 유랑생활을 하는 유목민들은 각자 고유한 문화가 담긴 형태와 재료로 물건을 만들어요.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은 사물에 영혼을 불어넣고, 그것에 인간을 창조하며 조상의 영혼을 항상 살아 있게 해 주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정성껏 만드는 물건에 그러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지요. 이곳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양탄자, 가구, 장신구, 도기에 새겨진 무늬를 보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종교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답니다. -<사라져 가는 세계 부족문화 아프리카>에서

잊혀져가는 부족들의 삶을 돌아보면서, 굳이 우리 조상의 유물이 아니라해도 인간의 가장 아득한 시원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현대의 기성품 의복이나 전자제품, 생활용품과는 확연히 구분지어지는 그 물건들은 그야말로 영혼이 깃든 예술품에 가까웠죠. 손으로 깎고, 잇고, 색칠하고, 끼워서 만들어진 멋스러운 수공품들이 한자리에 모여 물건의 상품적 가치가 아닌, 쓸모와 바램과 웃음을 담아 물건 고유의 의미를 새삼 떠올리게 만듭니다.
 
소박하고 간소한 삶을 사는 그들이 꿈꾸는 화려함은 또한 의외의 것이기도 했습니다. 3D영상을 보지 않고도, 최첨단 도시에 살지 않아도 상상력은 오히려 더 큰 날개를 펼치리란 사실을 단박에 믿을 수 있었습니다. 피카소가 아프리카의 가면이나 이집트의 벽화에서 영감을 얻어 '아비뇽의 처녀들'이란 작품을 탄생시킨 경위도 충분히 짐작되었구요.
 






'단봉낙타 안장' 하나로 사막과 젖과 고기, 가죽과 털, 쓰임과 꾸밈을 상상해보는 일은 분명 즐거운 것이었습니다. '곡식창고를 보호하는 문'에 새겨진 벌거벗은 남녀의 조각상으로 계급사회의 조각가의 위상, 그들의 신화, 곡식의 중요성을 살펴보는 일도 의미있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역사를 지금보다 비중있게 다루는 일은 역사 교과서가 떠안아야될 숙제이겠지만 생소한 유물들을 통해 우리와 그들을 잇는 살가움을 맛보는 일이야말로 참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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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에버북스가 출판한 생태과학 동화. 60권 중 6권이 단행본으로 나왔네요. 맛보기로 충분합니다.
지식과 감성을 함께 전달할, 엄마들이 딱 좋아할 타입. 아이들이 재미있는 것을 본능적으로 찾는 다면 엄마들은 유익한 걸 한눈에 알아보는 무서운 본능이 있죠~ 유익하면서 재미도 있는게 타협점이라고 할까요.









 

여섯 권 중 아이와 제가 제일 먼저 점찍은 건 <아이쿠 깜짝이야>였습니다. 일종의 자연관찰 그림책인데요, 엄마인 제가 늘 가졌던 불만 하나를 해소해줍니다. 아이가 자연관찰책에는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아 고민해본 결과. 바로 자연관찰 책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거죠. 

서영이의 경우 일상생활과 관련된 이야기들에 늘 푹 빠지는 편이라, 사람은 없고 동식물만 잔뜩한 책들은 아무리 귀여운 동물이래도 별 관심을 쏟지 못하더라구요. 아이의 취향 뿐 아니라, 생태이야기가 결국 '인간과의 어떤 연결점이 있느냐'를 찾는게 주된 모토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저와도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빠진 자연관찰 책은 아무리 재미있고 상세하게 꾸며져 있어도 공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더군요.

예상은 적중했고, 아이는 드디어 사람이 나오는 자연관찰 책을 즐겁게 읽었습니다. <아이쿠 깜짝이야>는 두더지가 먹을 것을 찾아 밭으로 내려와 땅을 파고 지렁이나 벌레를 잡아먹다 좀 쉬려고만하면, 땅 위의 아이들과 엄마가 자꾸만 땅속 식물들을 뽑아 놓는 이야기 입니다. 이 책은 그냥 생태가 아니라, 온 생태 입니다. 땅 속 두더지의 습성, 고구마, 당근, 마늘 등 땅 속 식물들의 성장, 농사일, 동물과 식물과 인간과의 관계. 

바로 아이와 제가 함께 원했던 '복합 자연관찰 책'이었습니다. 아이는 책 속의 주인공들과 이야기를 나누길 좋아하는데, 역시 농사일을 돕는 오빠들과 다감하게 수다를 떨더군요. 









비슷한 느낌으로 '민물에 사는 물고기 이야기'를 담은 <모두다 친구야>는 개성이 다른 네 명의 아이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가는 내용입니다. 엉뚱이, 꼬꼬마, 쩝쩝이, 콩콩이. 작명 솜씨가 토속적이고 푸근한 그림에 유쾌하게 어우러집니다.

네 명의 아이만큼이나 다른 개성의 민물고기들이 특징적으로 그려집니다. 물고기 뿐만 아니라 물가의 모든 풍경을 세세하게 담아냅니다. 도식적인 자연관찰이 아니라, 그냥 '자연' 입니다. 물고기 이름 말고도 긴꼬리제비나비, 광대 노린재, 도롱뇽, 물 까마귀 등 물가 생태의 호기심을 자연스럽게 유도 합니다.

 







또 하나 눈에 띄었던 책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괴물>입니다. '재미있는 책 이야기'라는 주제가 담긴 '출판'에 대한 그림책입니다. 괴물이 나오는 책을 좋아하는 철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괴물이 나오는 책을 선물할 요량으로 엄마 아빠가 나섭니다. 당연히 작가를 찾아갑니다. 그 다음은 화가, 그리고 출판사. 출판사에서는 책의 모양과 크기를 정하고, 글과 그림을 합쳐 장면을 만들고, 컴퓨터로 조판합니다. 모두 모여 제목을 정하고 인쇄소를 향합니다. 엄마도 잘 몰랐던 책을 만드는 과정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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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곁들인 감상적 하이쿠 시선집에 대한 혹평으로 벌어진 기상천외한 사건에 학을 떼고 다시는 이런 책은 보지도, 읽지도, 더군다나 글도 쓰지 말아야지 했더랬습니다. 일률적인 비판의 도마위에 올릴 책이라면 한 권으로 족하겠지 자조하면서요. 그러면서도 그것과는 조금 다른, 좀 더 유익한 대안이 있을거란 기대도 했습니다. 철부지 감상을 적더라도, 진부한 철학을 포장하더라도 썩 볼만한 책도 존재할 거란 믿음은, 망치를 들고 있는 제가 못만 찾는 것과도 같겠지요? 감안하고 들어주세요.



비쥬얼이 강조된 기행문에서의 차별화는 카투니스트 동범에겐 걱정거리가 못되었습니다. 그는 그림을 아주 잘 그리니까요. 글이 좀 형편 없어도(이 책이 꼭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그림의 힘을 따라 적절한 감흥이 찾아옵니다. '아. 네팔에 가보고 싶어. 그래, 여행의 묘미는 우연과 인연에 있지. '밖'에서 나를 찾는 것도 괜찮아.'  

사진도 그림처럼 예술적 대우를 받는 시대이긴 하지만 거꾸로 카메라가 지극히 대중화된 시점에 작품 사진이 살아남기는 더욱 척박해졌지 않나 싶습니다. '장식용 사진'으로 도배되는 책들의 범람 속에 지극히 내밀한 글이 뭍어가려는 가벼운 시도들은 좀 견제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글이 대단하거나 사진이 모든 걸 압도할 정도는 되야하지 않을까요.




섬 제주의 풍경에 반미치광이가 되었던 사진쟁이 김영갑의 에세이는, 온통 주체할 수 없는 감상적인 고백들로 넘쳐 흐르다가 불현듯 사진의 황홀경처럼 깨달음의 언어를 쏟아내길 반복합니다. 전혀 세련되지도 정제되지도 않은 일기같은 글들은 오히려 펄펄 살아나 궁핍하지만 아름다웠던 예술가의 삶을 거칠게 담아냅니다.

사진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아름답습니다. 대수롭잖은 풍경사진이 어떻게 '외로움과 평화'를 공존시키는 지를 확인합니다. 오름이나 중산간, 바다나 꽃, 억새의 물결들이 길게 늘여져(대부분 파노라마(6x17)로 찍힌) 외로움을 상쇄합니다. 사진 뒤에 드러나는 그의 궁휼한 삶이 루게릭병으로 받은 시한부 선고로 클라이막스를 향할 때, 버려진 폐교에 만든 갤러리는 신화같은 장소로 남습니다.       





또 <가난한 이의 살림집>은 어땠습니까. 먹물이 번지는 듯한 깊은 숲과 외딴집, 주물집, 차부집 사람들이 섞이는 사진들이 소외된 건축물의 양식과 그들의 헐벗은 이주를 역사적인 동시에 서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저자의 5년 간의 발걸음과 또 다시 5년 간의 집필을 통해, 또 끊임없는 돌아보기를 통해, 가난한 이들의 살림집을 머리 숙여 들여다 봅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가 하는 일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이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쓰고, 찍고, 걷고 있나를 고민하는 과정은 '가난한 이들을 향한 연민'없이도 몸이 저절로 수그러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드러내면서도 젠체하지 않고 날것을 보는데도 신물이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마치 사진은 덧칠된 유화 같았고 발은 그림을 그리는 붓과도 같았습니다. 


사진과 글이 더 할 수 없이 깊숙히 상응 하는 두 책에 '네팔 스케치 포엠'이라 이름 붙인<가끔은 길을 잃어도 괜찮아>가 비교된다는 건 공정한 일은 아닌것 같지만 그보다 몸을 가볍게 해 본다면 줄 세우지 못할 것도 없었습니다. 이 책들의 모든 출발은 사진과 여행, 여행과 메모에 있으니까요. 

으례 그렇듯이 청춘과 여행, 관계, 연민에 대한 성찰이 대단히 창의적이지는 않게 반복되지만 든든한 그림이 완전히 길을 잃게 하지는 않습니다. 스케치는 익숙하고 지루한 깨달음을 환기시키기도 했습니다. 
     
네팔의 개들이 이미 인생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여기저기 태평하게 누워있다는 가벼운 사색에 머물지만, 전봇대에 모인 전깃줄 그림으로 '하늘에도 길이 있다. 그 길의 끝에서 너를 만날 수 있을까?'라는 미사여구에만 도달하지만,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에게서 '자식을 위해 살아가는 세상 모든 어머니의 몫' 밖에 발견하지 못하지만, 그림과 물건을 주고 받으며 마음이 물건보다 갚지다는 착한 말만 하지만,   










반대로

'높새'라는 여행 선생을 만날 때부터 초라한 1인분의 생각이 조금씩 풍성해 집니다. 그가 말했던데로 '여행은 혼자 떠나 수백 명의 친구과 함께 걷다 혼자서 돌아오는 것이다'를 구현하기 시작합니다. 그 때부터 시작되는 움직임은 거부할 수 없는 여행지의 참 맛을 포함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국내와 국외를 여행하면서 삶을 가르치고, 여행을 하지 않을 때는 농사를 짓는 '높새'와 함께하는 트래킹. 포터의 등짐을 바라보고 '네가 들어도 나는 무겁다'의 한 줄이나, 언젠가 꼭 다시 네팔로 돌아와 아이들에게 칠판을 선물할 것이라는 약속, 암투병 중인 전직 비행기 조종사가 묻는 '지금 그리는 그림은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머리에서, 아니면 마음에서?', 독실한 불교신자이신 어머니에게 부처님의 고향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어 룸비니를 찾은 저자가 보리수 나무 염주를 산 일,은 혼자 나선 길에서 만나는 수백명의 친구의 몫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물론 이 책은 '타인의 취향'이지만 시각적 효과에 편승하려는 오염된 출판문화 속에서, 적어도 그의 사진이나 그림들이 장식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몇 년전 라오스에서 날아온 친구의 엽서 한 장처럼, 그 곳의 네가 여기의 나에게 격없이 전해집니다.   








 

 

 

<가끔은 길을 잃어도 괜찮아>/조동범/예담/2010.3
<그 섬에 내가 있었네>/김영갑/휴먼북스/2009.4
<가난한 이의 살림집>/노익상/청어람 미디어/2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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