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의 다섯가지 중대한 질문-아이와 나누는 종교적 대화>는
나는 누구지?
왜 죽어야 하지?
내가 맘놓고 기댈 수 있는 곳은 어디지?
왜 다른 사람에게 잘해줘야 하지?
왜 어떤 아이는 다른 종교를 믿어요?
어린이가 하게될 종교적 질문 다섯가지를 꼽았다. 난 무작정 기다려야했다. 뭘? 아이(현재 27개월)가 종교적 질문을 해올 때까지.
아니다. 초조했다. 부모 스스로도 대답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아이와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는 완벽한 미지수였다.
그러던...어제 밤이었다. 아기띠 안에 곰인형 봉봉이를 집어넣고 별안간
"봉봉이가 죽었어."
라고 하는게 아닌가. 내가 미처 입도 떼지 못하고 있는 사이.
"이건 쓰레기야. 버려야돼."
아이는 연타를 날린다.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 봉봉이가 쓰레기야? 내다 버려야 한다고?"
"응."
저런 단호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리고 역시나 내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의 논리인즉슨, 죽으면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주 잠시)논리의 가장 잔혹한 현실을 보는 듯했다. 우선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도덕적인 방법을 택하고 말았다. (이건 분명히 세뇌된 도덕 교육-동화책, 학교, 부모의 교육-의 힘이다)
"그럼 보리(우리집 괭이)도 죽으면 쓰레기통에 버려야겠네?"
아이는 다행이 아니라고 말한다.(내 절실한 바람을 읽었을지도)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래. 내다 버리면 보리가 어디 버려졌는지 모르잖아.(여기서 멈췄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엄마랑 아빠랑 서영이가 잘 알 수 있는 곳에 묻어줄까?(여기까지만 했어도 좋았겠다) 그래야 기억할 수 있잖아."
아이는 순순히 그러고마 했지만 결론까지 다 내려놓고 속으로 한숨을 내뱉는 엄마의 이상반응까지는 감지하지 못했다.
그렇다. 그토록 기다려왔던 '종교적 대화 Round①'에서 이 엄마는 실패하고 말았다.
아이(여섯 살) : 하나님은 공기야?
부모 : 아니, 하나님은 공기가 아니야. 하지만 조금은 공기 같기도 해.
:
아이 : 왜 하나님은 모양이 없어?
부모 : 하나님은 어떤 생각 같아. 생각이 어떤 모양이 있어?
아이 : (잠시 가만히 있다가 웃으면서)없어.
부모 : 거봐. 하나님은 어떤...아주 강력한 생각 같기도 해.
-<어린이의 다섯가지 중대한 질문-아이와 나누는 종교적 대화>에서/프리드리히 슈바이처/샨티/2008.10
이런 선문답까지는 아니어도, 어른들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질문에 미리 대비하고, 아이와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부모 스스로도 이런 질문을 멈추지 말기를..블라블라..기대했던 책에 눈꼽만큼도 미치지 못했음을 시인한다. 아이와 함께 종교적 질문에 적극 참여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질문에 도덕적 급매듭을 짓고 말았다.
하지만 후회하고 있을때가 아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갑작스레(늘 그렇지만) 닥친 이 일이 주는 교훈은 이랬다. 아이에게 튼튼한 철학으로 무장하거나 흔한 도덕관을 전달하는게 필요한건 아니란 사실이다. 그 순간 아이와 함께 물음표를 그리는 일이 소중하다.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과 최소한으로 알고 있는(죽음이 기억되는 방식)것을 아이에게 들려주고 아이만큼이나 궁금해 한다면 섣불리 결론을 내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린이의 다섯가지 중대한 질문-아이와 나누는 종교적 대화>가 말했던 '대화와 소통, 느낌으로 전달되는 강력한 메시지'를 믿어야 했다.
여기 또 하나 질문을 던지는 책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자(굳이 하느님이 아니라도)의 존재는 특히나 죽음을 관할하는 인상이 짙다. 죽음이 종교와 맞닿은 이유는 삶에서 찾아오는 죽음의 형태가 '소멸'로 인식되기 때문일 것이다.
죽으면 어디로 갈까, (곤충이나 꽃을 꺾는 일)죽이는 일은 왜 일찌감치 금기시 될까. 누군가 벌이라도 주는 걸까.
아이들의 피부에 와닿는 질문은, 바로 '나''나의 행동'과 관련이 있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이 질문들 역시 '답'을 주려고 해서는 답이 안나온다. 곧바로 '종교로의 귀의'를 염두할 수도 있겟지만 그 안에서도 질문이 끊이지 않아야 하는게 종교의 속성일 것이다. 나는 그 전에 아이 손에 동화책을 쥐어주고 싶었다. 죽음에 관한 명랑. <8시에 만나!>
주인공은 세 명의 똑같이 생긴 펭귄이다. 키작은 펭귄은 나비를 죽이고 싶어한다. 키 큰 펭귄은 "하느님은 다른 동물들은 죽이면 안 된다고 했어." 라고 말한다. 키 큰 펭귄이 생각하는 하느님은 '힘이 세고, 엄청 크고, 위대한 인물이다. 규칙을 많이 만들어 놨고 그걸 지키지 않으면 안좋은 일이 일어나며 마음씨는 좋은 분이다.' 한가지 안좋은 점이 있다면 눈에 안 보이는 거라고 아쉬움을 섞어 말하지만 키 작은 펭귄은 이렇게 응수한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실제로 있는지도 알 수 없잖아." 그리고 연이은 협상끝에 이런 말을 덧붙인다. "하나님은 이곳을 만들 때 별 생각없이 아무렇게나 만들었나 봐." 게다가 아무데나 날아다닐 수 있는 나비를 보고 하나님의 불공평함을 원망한다.
이들이 겪을 노아의 방주 유람 여행은 모두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하게 될 질문으로 배가 부르다. 결단코 하나님이 모습을 드러내시거나, 나쁜 짓에 대한 벌을 암시하거나, 모든 생명이 공정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거나 하는 즉물적 교훈은 없다. 눈맞춤이 부족한 엄마를 대신해 대화 상대가 되어줄만한 응대의 책이다. 또한 매우 유쾌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이와의 종교적 대화가 진지하기만 해야될 이유가 있을까. 아이보다 훨씬 많은 질문을 하고도 초라한 결론밖에는 내리지 못하고 있는 어른들의 두려움 때문에 괜히 심각해 진다면 아이들의 호기심을 깎아내리는 일일 것이다. 이 책을 보고 굳이 종교적 물음으로 향할 필요도 없다. 그저 죽음의 긴장감 속에서 노래하고 춤췄던 펭귄들처럼 삶의 희열을 느끼는 일로도 충분하다. 나비 속에 나비만, 비둘기 속에 비둘기만 있는 것이 아니란 정도만 감지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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