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레지스탕스 - 저항하는 인간, 법체계를 전복하다 레지스탕스 총서 1
박경신 외 지음 / 해피스토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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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망설였다. 

이런 식의 책들이 주는 편견 같은 게 있지 않은가. 재미는 더럽게 없고, 너무 계몽적이라는. 

해서, 내가 이 책을 샀을 때 과연 끝까지 읽으려나 싶었는데, 

의외로 술술 읽힌다. 아마 판결문을 그대로 옮겨놓거나 어려운 용어를 써가며 해설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이 책의 중심은 열 세가지 사건이다. 도곡동 타워팰리스 맞은 편 구룡마을이라 불리우는 비닐하우스촌, 남의 땅에 무단점거한 채 살고 있다고 수십년째 주민등록이 없는 사람,현대건설 사내 하청 종업원으로 들어가 정규직과 하나도 다르지 않는 일을 하면서도 월급은 그 반밖에 받지 못하다가 구조조정 칼바람에 제일 먼저 해고된 사람,아이가 유행가 가사를 따라 부른게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 걱정이 되어 블로그에 올렸는데 그게 저작권법위반이라며 삭제된 사람, 무엇보다,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가  "허위사실 유포죄'라는 무시무시한 법에 걸려 100일이나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경제대통령 미네르바 등등. 

 하나같이 억장이 무너질 만큼 말이 안되지만 주위에서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사건이다. 헌데 법원에서는 때로는 억장 무너지는 사람 편에서 때로는 이게 사람을 위한 법인가 싶을 정도로 몰인정하게 다룬다. 물론 여기 열 세편의 사건들은 모두 최종 승소한 사건이다. 다행이다.  

때로는 분노하면서 때로는 감격에 겨워 구절구절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판사가 바로서야 나라가 산다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겠다. 물론 그 판사를 움직이게 만든 것은 이 사건들에서 결국 승소하도록 애쓴 변호사들일 터다. 

이 책에 들어있는 열 세가지 사건들은 모두 기존의 법해석과 판례에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승리한 사건들이다. 법은 그 특성상 보수적이고 안정 지향적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나 법이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만인에게 공평하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는 그러한 전제를 부정해 온 측면이 크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나마 변화의 가능성을 본다면, 그 법을 해석하여 적용하는 판사들에게서다. 또한 그 법을 기존의 해석에서 벗어나 보다 인간의 편에서, 보다 정의의 편에서 보게 만드는 것은 변호사들이다. 

이 책은 그런 가능성을 보여준다. 한국사회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우여곡절, 부당함, 분노들을 열 세편이라는 사건들로 나누어서 그 한편 한편의 맥락을  풀고 마침내 법을 어떻게 해석하였는지 풀었다.물론 판례평석 같이 어렵고 딱딱한 문체가 아니라 쉽게 에세이식으로 풀어썼다. 나 같이 법이라면 문턱에도 가 본 적 없는 사람도 술술 읽힌다. 솔직히 나는 이 열 세편의 사건 중에서 , 노회찬떡검사건이 제일 흥미진진했다. 자살한 장자연씨가 남겼다는 리스트에 조선일보의 방모 사장을 비롯하여 내가 한때 괜찮은 사람으로 여겼던 송 모 작곡가(한때 그는 작곡가 였음, 예전에 재밌게 본 그여자-송명길 주연의 미니시리즈였던 기억이 있음)도 포함되어 있어 경악했던 기억을 되새기면서, 읽었다. 진실은 늘 그렇게 드러나는 법이다.  

호모레지스탕스-저항하는 인간이라는 제목에 비해서는 이 책 내용이 좀 온건한 편이다. 왜? 어쨌거나 법의 테두리안에서 저항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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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잡아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0
솔 벨로우 지음, 양현미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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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두운 가로수길>이라니. 얼마나 서정적인가! 먼지가 부옇게 이는 어느 여름날이어도 좋다. 만약 한낮의 지루한 해가 사라진 뒤의 가로수길이라면 열기가 가신 땅거죽으로부터 스멀스멀 어둠은 무한히 피어오를 것이다. 만약 그것이 겨울날 차갑게 식어버린 대지 위라면, 가로수들은 텅빈 주변보다 더 비어버린 제몸의 균형을 맞추며 모질게 서 있을 터이다.


모스크바는 명료한 도시다. 6월의 모스크바가 건조한 대기와 그것보다는 조금 윤택한 태양이 명랑하게 빛나던 도시라면 모스크바의 12월은 화끈하다. 그 맛은 에스프레소의 그것만큼 따끔하지만 결코 불쾌하지 않다. 검고 가는 자작나무가 늘어서 있는 아파트단지는 또 얼마나 소설적인지. 이즈음 정강이까지 빠지는 희디 흰 눈은 깊이를 척도할 수 없다. 우주의 깊이만큼 심오한 느낌을 준다. 프라스펙트 레닌(레닌대로)은 여전히 길게 죽 뻗어 있을 것이며, 유고자빠드나야역 근처에는 피부색이 짙은 콧수명의 남자들과 코끝이 휜 여인들이 추위도 잊고 바구니를 든 채 혹은 좌판에서 물건 값을 흥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9세기 러시아의 작가 이반 부닌(1870-1953)의 <어두운 가로수길>은, 딱 이 즈음에 집어들기 좋은 “제목”이다. 순전히 제목에 이끌려 이 책을 집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사랑 이야기니 술술 읽히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13년에 걸쳐 쓴 단편들은 저마다 사랑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예컨대 표제작인 “어두운 가로수 길”은 “모든 게 사라진다고 잊히지는 않아요”라는 문장으로 압축될 것이다. 이 문장은 가혹하리만치 서글픈 느낌을 준다. 그 느낌은 마치 얼마 전 마종기 시인의 선집에서 발견한 “전화”라는 시에서 받은 느낌과 닮기도 하였다.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전화를 겁니다./신호가 가는 소리/ 당신 방의 책장을 지금 잘게 흔들고 있을 전화 종소리, 수화기를 오래 귀에 대고 많은 전화소리가 당신 방을 완전히 채울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외출에서 돌아와 문을 열 때 내가 이 구석에서 보낸 모든 전화소리가 당신에게 쏟아져서 그 입술 근처나 가슴 근처를 비벼대고 은근한 소리의 눈으로 당신을 밤새 지켜볼 수 있도록/다시 전화를 겁니다./신호가 가는 소리.(마종기/ “전화” 전문)


어려운 시어를 쓰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평이한 언어들이 빚어내는 정서는, 사랑의 어떤 측면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약간 아찔함을 느꼈을 정도였다. <어두운 가로수길>에서 부닌이 보여주는 사랑의 모양들도 제각각 사랑의 한 부분들을 건드린다. 오래된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초로의 남자에게 사랑이란, 죽음 뒤에서라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전쟁터로 떠나는 남자에게 사랑이란, 변심한 애인에게 한발을 날린 사내에게 사랑이란, 연민일 수도 희생일 수도 질투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란 “삶에서 행복은 없지만 그 삶에서 번갯불 같은 순간들이 있고, 그 순간들로 인해 살아”가는 어떤 것이라는 문장에 우리도 함께 공감하게 된다면 “시간에 대한 희망을 제외하고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라고 묻는 듯 깨달은 듯 던지는 문장은 이렇게 들릴 수도 있다. “우리는 시간과 함께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 아닌가요?”라고.

부닌은 러시아인으로서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1933) 인물이긴 하지만 그다지 우리나라 독자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나 역시 대학 때 처음 접했던 작가라 거의 잊고 살았다. 비대중적인 비영미권의 작품을 펴낼 생각을 한 출판사(지만지)를 다시 고쳐 보지 않을 수 없다(불행히도 이 책은 현재 인터넷 서점에서 품절이라고 정보가 뜬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책은 작년에 읽었다가 그다지 깊은 인상을 받지 못해 옆에 밀쳐 둔 책이다. 그러다가 얼마전 다시 펴들게 된 것이다. 그 계기는 뜻밖에도 올 6월 손창섭 작가의 죽음이라고 해야겠다. 어느 신문에서 “스스로를 지운 사람”이라고 명명할 정도로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며 살았다는 이력이 눈길을 끌었던 데다 그가 쓴 그 유명한 “잉여인간”을, 실은 정식으로 읽어보지도 않았다는 일종의 죄책감 비슷한 무엇이 내게 있었던 모양이다. 해서 “잉여인간”이 실린 단편집 <비 오는 날>을 읽어보기로 하였다. 손창섭은 작가가 되기 전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을 다니는데 이 때 읽은 작가들 중에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가 있었다. 작가 소개에 따르면 손창섭은 체호프의 작품 중에 “아뉴타”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아뉴쉬까”라니. 아름답지만 서글픈 사랑이야기인 바로 그 “아뉴쉬까”라니 말이다.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모스크바 대학에 다니는 귀족 청년이 방학 때 부모의 영지로 온다. 이 집에는 안나라고 불리는 사랑스런 소녀가 있다. 이 청춘의 귀족 청년은 하녀인 이 소녀에게 마음이 끌리게 된다. 둘은 눈 내리는 언덕에서 함께 썰매를 탄다. 썰매를 타고 언덕을 내려오면서 청년은 소녀의 귀에다 대고 속삭인다. “아뉴쉬까(안나의 애칭)... 아뉴쉬까...”. 방학이 끝날 무렵 청년은 떠난다. 남은 소녀는 생각한다. 청년과 함께 썰매를 타고 언덕을 내려올 때 귓가에 들려오던 그 소리는 사랑의 속삭임이었던가, 바람소리였던가. “안나....아뉴쉬까...아뉴쉬까...사랑해....”.

나에게 “아뉴쉬까”는 이런 줄거리로 남아있다. 혹시 번역이 되어 있나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 외국어로 읽었고 소련에서 짧은 영화로 만들어진 것을 영어자막과 함께 보았던 기억도 난다. 이렇게 일깨워진 정서는, 한 옆에 밀쳐둔 부닌의 <어두운 가로수 길>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책을 고르는 기준이나 계기는 별의 수만큼이나 다양할 터이지만, 나에게는 신문의 서평일수도, 출판사에서 보내오는 신간알림 메일일수도 또는 술자리에서 옆사람들이 주고받은 한마디 품평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번처럼 한 작가의 죽음과 그 죽음에 연쇄적으로 반응한 일련의 개인적 추억일 수도 있다.

반면 부닌보다 43년 늦게 노벨 문학상을 받은 미국의 작가 솔 벨로의 <오늘을 잡아라>는 한 건방진 남자가 내뱉은 말 때문이다. “솔 벨로 읽어봤어? ...문체란 그런거지.”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이란 영화에서 출판사 편집장이란 작자가 부하 직원에게 의기양양하게 한마디 던진다. 특별히 이반 부닌보다 대중적인 면에서 형편이 나아보이진 않는 이 작가는 이렇게 나에게 각인되었다. 문체라..문체라... 영미문학전공자들에게는 익숙할지 모르지만, 그 역시 번역본이 별로 많지 않는 것 같다. 다른 작품이 있을 법하지만, 나에게 그의 책으로는 <오늘을 잡아라>가 처음이었다. 솔직히 제목은 무슨 자기 개발서나 주식 거래 지침서 같다는 느낌을 준다. 예전에 나온 번역서는 “그날을 잡아라”라고 했는데, 좀 뜬금없어 보이기도 한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아마 어느 제목이 더 적절한지 나름의 판단이 설 수도 있겠다.

주인공 윌키(토니 윌헬름의 애칭)는, 한마디로 실패한 인간의 조건은 다 갖추었다. 은퇴한 의사 아버지는 소통불능이고, 하나밖에 없는 누나는 소식을 못 듣고 산지 오래되었다. 얼마 전에 직장에서 쫒겨났으며, 이혼은 해주지 않고 별거중인 아내는 늘 돈을 요구하며 괴롭힌다. 이것이 윌키의 외부 조건이라면 그 자신의 내면은 어떤가? 사가꾼 브로커에게 속아 헐리우드에 갔으나 단역배우조차 되지 못한 채 10년을 허비했다. 늘 켤코 선택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일을 최후에는 선택하고 만다. 이제 마흔 줄을 넘긴 윌키는 자신의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다.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고 어제는 이미 지나갔으니 오늘을 잡을 밖에 도리가 없다. 허나 이런 처지를 자각한다고 해서 나아질 리가 있는 것인가? 실패를 내정한 어리석은 짓이란 걸 잘 알면서도 사기꾼에게 가진 돈 전부를 맡기는 것이 윌키 같은 나약하고 어리석은 이의 숙명일까? 배반당한 걸 깨닫는 눈간 느닷없이 낯선 사람의 장례식 행렬을 마주친다고 하여 달라질 것이 있던가? 그는 실컷 울었고, 눈물은 또 다른 시작의 전조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판도라가 가장 마지막으로 남겨두었다던 희망이 보일지는. 인생은 바닥이고, 바닥에서 솟구치기 위해서는 적어도 발구름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의식은 우리의 삶을 바닥에서 끄집어 내 주는 실제적 도구는 되지 못하는 듯하다. 다만, 도구를 찾아야 할 구실을 주는 정도는 되겠지만. 종국에는 행동만이 변화로 이끄는 열쇠이리라.

단 하룻동안에도 일생을 산 것 같은 날들이 있는 법이다. 윌키가 단 하루동안 뉴욕 브로드웨이 거리를 걸으면서 겪게 되는 일은 결국 우리의 전생애일 수도 있다. 너무 절망적이라 허무감조차 사치로 느껴지는 어떤 날의 ‘오늘’처럼 말이다. 결국 우리는 지나간 어제를 돌이킬 수 없고, 오지 않은 “내일” 때문에 몸달을 필요가 없다. 다만, 오늘을 잡을 밖에. 하지만 이건 너무 뻔한 교훈 같다. 그래도 어쩌란 말인가, 생각만큼 교훈대로 안되는 것이 인생인 것을. “자네에게 고통과 결혼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어. 그런 사람들이 좀 있거든. 그들은 고통과 결혼해서 꼭 부부처럼 함께 먹고 자고 하지. 그러다가 즐거움을 알게 되면 자기가 간통을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가 된다니까. ?”(167쪽) 다만 이렇게 톡쏘는 구절에서조차 위안을 느낄 수밖에. 이 위안은 보편성을 확인하는 순간에 찾아오는 안도 같은 감정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군 하는. 

 

* 그런데 아뿔사 이를 어쩌나. 손창섭이 깊은 인상을 받은 체홉의 단편은 <아뉴타>라는 제목이었으며 뒤늦게 확인한 바에 따르면 내가 기억하는 그 < 아뉴쉬까>가 아니었다. 진실을 이야기하자면 여전히 그 작품의 정확한 제목을 모르겠다. 눈썰매 였던가...아뉴쉬까 맞았었나...번역이 안되어 있을 뿐 아니라 원본도 아직 찾질 못했다. 강의하는 친구에게 물어보니 그 역시 정확하게 기억이 안난다고 했다. 난감할 뿐이다. 잘못된 기억에 의존해 책소감을 늘어놓은 나자신이 염치없을 뿐이다. 여기 방문객이 얼마 되지 않지만 그분들께 진심으로 죄송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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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가로수 길 지만지 고전선집 182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 지음, 김경태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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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두운 가로수길>이라니. 얼마나 서정적인가! 먼지가 부옇게 이는 어느 여름날이어도 좋다. 만약 한낮의 지루한 해가 사라진 뒤의 가로수길이라면 열기가 가신 땅거죽으로부터 스멀스멀 어둠은 무한히 피어오를 것이다. 만약 그것이 겨울날 차갑게 식어버린 대지 위라면, 가로수들은 텅빈 주변보다 더 비어버린 제몸의 균형을 맞추며 모질게 서 있을 터이다.


모스크바는 명료한 도시다. 6월의 모스크바가 건조한 대기와 그것보다는 조금 윤택한 태양이 명랑하게 빛나던 도시라면 모스크바의 12월은 화끈하다. 그 맛은 에스프레소의 그것만큼 따끔하지만 결코 불쾌하지 않다. 검고 가는 자작나무가 늘어서 있는 아파트단지는 또 얼마나 소설적인지. 이즈음 정강이까지 빠지는 희디 흰 눈은 깊이를 척도할 수 없다. 우주의 깊이만큼 심오한 느낌을 준다. 프라스펙트 레닌(레닌대로)은 여전히 길게 죽 뻗어 있을 것이며, 유고자빠드나야역 근처에는 피부색이 짙은 콧수명의 남자들과 코끝이 휜 여인들이 추위도 잊고 바구니를 든 채 혹은 좌판에서 물건 값을 흥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9세기 러시아의 작가 이반 부닌(1870-1953)의 <어두운 가로수길>은, 딱 이 즈음에 집어들기 좋은 “제목”이다. 순전히 제목에 이끌려 이 책을 집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사랑 이야기니 술술 읽히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13년에 걸쳐 쓴 단편들은 저마다 사랑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예컨대 표제작인 “어두운 가로수 길”은 “모든 게 사라진다고 잊히지는 않아요”라는 문장으로 압축될 것이다. 이 문장은 가혹하리만치 서글픈 느낌을 준다. 그 느낌은 마치 얼마 전 마종기 시인의 선집에서 발견한 “전화”라는 시에서 받은 느낌과 닮기도 하였다.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전화를 겁니다./신호가 가는 소리/ 당신 방의 책장을 지금 잘게 흔들고 있을 전화 종소리, 수화기를 오래 귀에 대고 많은 전화소리가 당신 방을 완전히 채울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외출에서 돌아와 문을 열 때 내가 이 구석에서 보낸 모든 전화소리가 당신에게 쏟아져서 그 입술 근처나 가슴 근처를 비벼대고 은근한 소리의 눈으로 당신을 밤새 지켜볼 수 있도록/다시 전화를 겁니다./신호가 가는 소리.(마종기/ “전화” 전문)


어려운 시어를 쓰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평이한 언어들이 빚어내는 정서는, 사랑의 어떤 측면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약간 아찔함을 느꼈을 정도였다. <어두운 가로수길>에서 부닌이 보여주는 사랑의 모양들도 제각각 사랑의 한 부분들을 건드린다. 오래된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초로의 남자에게 사랑이란, 죽음 뒤에서라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전쟁터로 떠나는 남자에게 사랑이란, 변심한 애인에게 한발을 날린 사내에게 사랑이란, 연민일 수도 희생일 수도 질투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란 “삶에서 행복은 없지만 그 삶에서 번갯불 같은 순간들이 있고, 그 순간들로 인해 살아”가는 어떤 것이라는 문장에 우리도 함께 공감하게 된다면 “시간에 대한 희망을 제외하고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라고 묻는 듯 깨달은 듯 던지는 문장은 이렇게 들릴 수도 있다. “우리는 시간과 함께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 아닌가요?”라고.

부닌은 러시아인으로서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1933) 인물이긴 하지만 그다지 우리나라 독자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나 역시 대학 때 처음 접했던 작가라 거의 잊고 살았다. 비대중적인 비영미권의 작품을 펴낼 생각을 한 출판사(지만지)를 다시 고쳐 보지 않을 수 없다(불행히도 이 책은 현재 인터넷 서점에서 품절이라고 정보가 뜬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책은 작년에 읽었다가 그다지 깊은 인상을 받지 못해 옆에 밀쳐 둔 책이다. 그러다가 얼마전 다시 펴들게 된 것이다. 그 계기는 뜻밖에도 올 6월 손창섭 작가의 죽음이라고 해야겠다. 어느 신문에서 “스스로를 지운 사람”이라고 명명할 정도로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며 살았다는 이력이 눈길을 끌었던 데다 그가 쓴 그 유명한 “잉여인간”을, 실은 정식으로 읽어보지도 않았다는 일종의 죄책감 비슷한 무엇이 내게 있었던 모양이다. 해서 “잉여인간”이 실린 단편집 <비 오는 날>을 읽어보기로 하였다. 손창섭은 작가가 되기 전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을 다니는데 이 때 읽은 작가들 중에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가 있었다. 작가 소개에 따르면 손창섭은 체호프의 작품 중에 “아뉴쉬까”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아뉴쉬까”라니. 아름답지만 서글픈 사랑이야기인 바로 그 “아뉴쉬까”라니 말이다.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모스크바 대학에 다니는 귀족 청년이 방학 때 부모의 영지로 온다. 이 집에는 안나라고 불리는 사랑스런 소녀가 있다. 이 청춘의 귀족 청년은 하녀인 이 소녀에게 마음이 끌리게 된다. 둘은 눈 내리는 언덕에서 함께 썰매를 탄다. 썰매를 타고 언덕을 내려오면서 청년은 소녀의 귀에다 대고 속삭인다. “아뉴쉬까(안나의 애칭)... 아뉴쉬까...”. 방학이 끝날 무렵 청년은 떠난다. 남은 소녀는 생각한다. 청년과 함께 썰매를 타고 언덕을 내려올 때 귓가에 들려오던 그 소리는 사랑의 속삭임이었던가, 바람소리였던가. “안나....아뉴쉬까...아뉴쉬까...사랑해....”.

나에게 “아뉴쉬까”는 이런 줄거리로 남아있다. 혹시 번역이 되어 있나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 외국어로 읽었고 소련에서 짧은 영화로 만들어진 것을 영어자막과 함께 보았던 기억도 난다. 이렇게 일깨워진 정서는, 한 옆에 밀쳐둔 부닌의 <어두운 가로수 길>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책을 고르는 기준이나 계기는 별의 수만큼이나 다양할 터이지만, 나에게는 신문의 서평일수도, 출판사에서 보내오는 신간알림 메일일수도 또는 술자리에서 옆사람들이 주고받은 한마디 품평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번처럼 한 작가의 죽음과 그 죽음에 연쇄적으로 반응한 일련의 개인적 추억일 수도 있다.

반면 부닌보다 43년 늦게 노벨 문학상을 받은 미국의 작가 솔 벨로의 <오늘을 잡아라>는 한 건방진 남자가 내뱉은 말 때문이다. “솔 벨로 읽어봤어? ...문체란 그런거지.”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이란 영화에서 출판사 편집장이란 작자가 부하 직원에게 의기양양하게 한마디 던진다. 특별히 이반 부닌보다 대중적인 면에서 형편이 나아보이진 않는 이 작가는 이렇게 나에게 각인되었다. 문체라..문체라... 영미문학전공자들에게는 익숙할지 모르지만, 그 역시 번역본이 별로 많지 않는 것 같다. 다른 작품이 있을 법하지만, 나에게 그의 책으로는 <오늘을 잡아라>가 처음이었다. 솔직히 제목은 무슨 자기 개발서나 주식 거래 지침서 같다는 느낌을 준다. 예전에 나온 번역서는 “그날을 잡아라”라고 했는데, 좀 뜬금없어 보이기도 한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아마 어느 제목이 더 적절한지 나름의 판단이 설 수도 있겠다.

주인공 윌키(토니 윌헬름의 애칭)는, 한마디로 실패한 인간의 조건은 다 갖추었다. 은퇴한 의사 아버지는 소통불능이고, 하나밖에 없는 누나는 소식을 못 듣고 산지 오래되었다. 얼마 전에 직장에서 쫒겨났으며, 이혼은 해주지 않고 별거중인 아내는 늘 돈을 요구하며 괴롭힌다. 이것이 윌키의 외부 조건이라면 그 자신의 내면은 어떤가? 사가꾼 브로커에게 속아 헐리우드에 갔으나 단역배우조차 되지 못한 채 10년을 허비했다. 늘 켤코 선택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일을 최후에는 선택하고 만다. 이제 마흔 줄을 넘긴 윌키는 자신의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다.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고 어제는 이미 지나갔으니 오늘을 잡을 밖에 도리가 없다. 허나 이런 처지를 자각한다고 해서 나아질 리가 있는 것인가? 실패를 내정한 어리석은 짓이란 걸 잘 알면서도 사기꾼에게 가진 돈 전부를 맡기는 것이 윌키 같은 나약하고 어리석은 이의 숙명일까? 배반당한 걸 깨닫는 눈간 느닷없이 낯선 사람의 장례식 행렬을 마주친다고 하여 달라질 것이 있던가? 그는 실컷 울었고, 눈물은 또 다른 시작의 전조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판도라가 가장 마지막으로 남겨두었다던 희망이 보일지는. 인생은 바닥이고, 바닥에서 솟구치기 위해서는 적어도 발구름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의식은 우리의 삶을 바닥에서 끄집어 내 주는 실제적 도구는 되지 못하는 듯하다. 다만, 도구를 찾아야 할 구실을 주는 정도는 되겠지만. 종국에는 행동만이 변화로 이끄는 열쇠이리라.

단 하룻동안에도 일생을 산 것 같은 날들이 있는 법이다. 윌키가 단 하루동안 뉴욕 브로드웨이 거리를 걸으면서 겪게 되는 일은 결국 우리의 전생애일 수도 있다. 너무 절망적이라 허무감조차 사치로 느껴지는 어떤 날의 ‘오늘’처럼 말이다. 결국 우리는 지나간 어제를 돌이킬 수 없고, 오지 않은 “내일” 때문에 몸달을 필요가 없다. 다만, 오늘을 잡을 밖에. 하지만 이건 너무 뻔한 교훈 같다. 그래도 어쩌란 말인가, 생각만큼 교훈대로 안되는 것이 인생인 것을. “자네에게 고통과 결혼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어. 그런 사람들이 좀 있거든. 그들은 고통과 결혼해서 꼭 부부처럼 함께 먹고 자고 하지. 그러다가 즐거움을 알게 되면 자기가 간통을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가 된다니까. ?”(167쪽) 다만 이렇게 톡쏘는 구절에서조차 위안을 느낄 수밖에. 이 위안은 보편성을 확인하는 순간에 찾아오는 안도 같은 감정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군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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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 생존기계가 아닌 연애기계로서의 인간
제프리 밀러 지음, 김명주 옮김, 최재천 감수 / 동녘사이언스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1912년)”는 솔직히 좀 당혹스럽다. 피아노와 바이올린과 같은 악기가 등장하긴 하지만 그것이 말 그대로 “협연”할 것이란 기대는 아예 안하는 게 좋다. 소프라노 여성의 노래(인지 낭독인지)와 악기들은 다만 한자리에 있을 뿐 각자 저마다의 소리를 낼 뿐이다. 어쩌다 귀에 읽은 화음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까 기대를 해 보지만, 끝내 배반감만 맛 볼 따름이다. 이 난해한 음악은 오로지 나에게 당혹감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만 같다.

“인간이 눈으로 마실 수 있는 술을,/ 넘치는 바닷물결 위에서 달은 폭음한다/ 그리고 봄날의 조류가 지평선 위에 넘쳐 흐른다/ 무섭고 달콤한 욕망은/ 수없이 물결을 가른다/ 인간이 눈으로 마실 수 있는 술을,/ 넘치는 바닷물결 위에서 달은 폭음한다/(제1곡, 알베르 지로의 “달에 취하여” 중)

그래도 굳이 비교하자면 곡을 붙인 시는 좀 나은 편인가. 언어에 관계하는 뇌의 부분과 음악을 들을 때 활성화되는 부분이 중첩된다고 하지만 이 곡은 시와 선율이 서로 다르게 마음의 어떤 부분을 건드리는 듯하다.

같은 경험을, 외젠느 이오네스크의 “대머리 여가수(민음사)”에서도 한 기억이 있다. 도무지 서사라고 할 만 한 것을 잡아내기가 어려웠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겼다면 그것은, 작가의 힘일까, 우리 마음의 능력으로 돌려야 하나? 아니면, 둘 다인가?


수많은 음악과 미술, 문학작품은 모두 감각을 거쳐 우리 마음의 어떤 것과 연결된다. 이 지구상에 이들을 이해하는 존재는 우리밖에 없는가, 아닌가? 아니라면, 도대체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자각의 역사에서 1859년 이전과 이후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하고 나서야 인간은 공공연하게 스스로를 신과 분리할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정체성을 신이라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 의탁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두 다리로 걷고 나서도 무려 10만 년이라는 시간이 더 지나서야 이러한 자각이 시작되었을 뿐 아니라 그 자각의 역사라는 것이 고작 150년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 종이 겸손해야 할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제프리 밀러의 “연애- 생존기계가 아닌 연애기계로서의 인간”은 인간의 기원에 대해 “종의 기원”에서 제시하는 적응방식으로서의 진화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되는 인간의 마음에 대해새로운 주장을 제시한다. 역시 천재적인 다윈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종의 기원을 쓴 후 몇 년이 지난 1871년에 다윈은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이라는 놀라운 책을 발표했다. 이 900페이지에 이르는 책의 골자는, 생존이익을 주지 않으면서도 엄청난 유지비용과 에너지를 요하는 형질들은 성선택에 의해 진화했을 것이란 주장이다. 요컨대 수컷공작새의 깃털, 수컷정자새의 둥지, 수컷나이팅게일의 노래 그리고 인간의 뇌-미술,음악,문학, 도덕 등등-는 생존에 하등 보탬이 되지 않으면서 건사하기에 부담되고 그 이익에 비해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든다. 진화는 무자비하며, 가차없다. 곧바로 생존 이익을 남기지 않으면 도태시켜 버리니까. 그럼에도 이런 능력들이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이전보다 더욱 정교해진 까닭은 무엇인가에 대해 다윈은, 성선택이라고 “감히” 주장했던 것이다.

“성선택은 여러 가지 면에서 혁명적인 아이디어였” 지만(67p) 암컷 또는 여성의 짝고르기가 진화의 추동력이라는 주장이 다윈이 살았던 시대(사회를 주도하는 세력이 대부분 남성들이었기도 하지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적어도 생물학에서 성선택론이 가장 유망하고 흥미로운 분야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1990년 이전까지도 받아들여지기가 어려웠던 성 싶다(물론 1960년대의 성 혁명과 페미니즘의 물결은 많은 여성들로 하여금 생물학을 공부하거나 거기에 기여하게 만들었고, 인간의 사회적·성적·정치적 삶에서 여성선택의 중요성을 재검토하게 했다(89p)). “욕정에 사로잡혀 서로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하등동물들의 고작 자갈만한 크기의 뇌가 전능한 창조주의 자리를 대신하다니”(68p).


다윈에 따르면, 왜 자연에는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형질들이 두루 존재하는가, 왜 종 내에 암수 간의 차이가 존재하는가, 종 간의 급속한 진화상의 분화가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해 성선택이야말로 명쾌한 답이다. 밀러는 다윈의 성선택론을 기반으로 그간에 무시되어 왔거나 애써 외면당해왔던 성선택이 기왕에 자연선택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생물들의 형질이나 인간 마음의 능력을 이해하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론이라는 데 500쪽(한글 번역본이 이 정도이니 영어원본은 700여쪽이 더 될 것으로 짐작)이 훨씬 넘는 분량을 할애했다.

거칠게 요약하면 원래 암수 차이가 전혀 없었던 초기 생명체가 영양분까지 갖춘 난자와 활동성은 있지만 영양분이라곤 없는 정자로 나뉘어져 유성생식이란 것을 하게 된 후, 출산을 할 수 없는 수컷은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가능한 많은 암컷과 섹스를 하려고 하고, 출산과 양육을 해야 하는 암컷은 수컷의 질을 따지며 신중하게 짝짓기를 결정한다는 것이 성선택론이다. 이 짝고르기 과정에서 암컷의 성적 선호와 이런 선호를 충족시켜 암컷을 유혹하기 위한 수컷의 수많은 장식들이 진화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암컷의 성적 선호도 자식에게 유전되면서 수컷의 성적인 장식들은 강화된다.


밀러에 따르면 성선택이야말로 우리 직관에 더 잘 들어맞는 이론이기도 하다. 수컷들은 항상 암컷들을 수정시키기 위해 경쟁한다. 무기로 경쟁자들을 위협하기도 하고 장식으로 암컷을 유혹한다. 여기서 암컷은 짝을 고르는 쪽이다. 수컷은 장식을 한없이 진화시킬 것이며 암컷 역시 짝을 고르기 위한 분별력을 진화시킬 것이다. 이런 짝고르기 매커니즘을 통해 종들은 진화를 거듭해 왔다는 주장은 별 무리없이 받아들일 만하다.

그렇다면 고도로 정교하게 발달한 뇌를 가진 인간에 대해서도 “수컷은 과시하고 암컷은 고른다”는 성선택론이 유효할까? 제프리 밀러의 대답은 “그렇다” 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 인간의 언어, 미술, 정치적 이상, 위트나 자원봉사에 이르는 인간다운 특징들이 이 짝고르기의 직접적인 결과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이것들이 “공작새의 꼬리”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음경, 유방, 엉덩이, 수염, 머리카락, 두툼한 입술 등 우리 몸의 많은 형질들”이 실제 “짝고르기를 통한 성선택의 인증서”라는 주장에서 나아가 미술, 음악, 언어, 창의성 등 역시 짝 고르기가 작용한 것이라는 주장은, 우리와 같은 호미니드 영장류 동물들과의 해부학적 비교, 생존이익을 주는 지 여부, 그간의 연구결과 등을 토대로 매우 치밀하고 설득력있게 제시되지 않는다면 곧바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만약 언어가 성선택의 산물이라면 왜 여성의 언어능력이 더 뛰어난가하는 반박을 보자. 평균적으로 여성들은 더 많은 단어를 알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언어가 성적장식으로 진화했다면, 남성의 평균 어휘력이 더 뛰어나야 한다. 보통 성선택은 수컷을 과시 행위자로, 암컷을 과시 판별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밀러는 우선 인간의 언어능력에 대한 테스트들은 대부분 언어생산력에 대한 테스트가 아니라 언어이해력에 대한 테스트라고 전제한다. 그리고 인간의 진화는 쌍방고르기가 중요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인간의 말은 사적이고 쌍방향적이다. 남성은 구애과정에서 적응도를 과시하기 위해 온갖 언어를 동원하여 여성을 사로잡으려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 적응도가 실제인지 가짜인지를 판별하는 능력 역시 덩달아 진화해야 한다. 실제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더 많은 책을 집필하고 더 많은 강의를 하며, 인터넷 토론사이트들에 더 많은 이메일을 보내는 등 여성들을 압도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 단지 가부장제의 영향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며 여기에는 성선택의 진화역사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밀러의 설명이다. 이어 남성의 불꽃튀는 구애언어의 예로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시라노 드 벨주락>을 등장시킨다. 결론적으로 남성의 과시언어는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이를 판별하는 여성의 언어능력을 감안한다면 인간의 언어능력은 여성과 남성의 상호 선택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한 세기에 걸친 성선택의 유배로 인해 여러 학문 분야에서 엄청난 손실이 있었음은 가슴아픈 일이다. 진화심리학, 생물학 등 직접적인 관련 분야뿐 아니라 경제학, 고고학, 정치학, 인류학, 언어학, 미술 등 다른 인간학 분야에서도 성선택을 도입한다면 한층 이해가 깊어질 것이란 저자의 주장은 자기 분야에 몰입한 한 진화심리학자의 자기과시에서 비롯된 과감한 주장이라고만 하고 넘어가기엔 꽤 진지하고 논리가 탄탄하다. 제법 긴 책인데도 손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점도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저자의 지적 부지런함과 능력에 힘입은 바 크지만 무엇보다 재기발랄한 입담과 필력 덕일 것이다.


진실은 의외로 간단한지도 모른다. 밀러의 말대로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5억 년 전, 눈과 뇌를 지닌 동물이 처음 진화한 이래 우리 유전자가 매 세대마다 불패의 성관계를 이어온 덕분.”(49p)임을 인정하기만 하면 되니까. 물론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조금씩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 존재가 더없이 초라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신을 닮은 형상에서, 원숭이와 동급인 존재로 급전직하한 데 이어 이제 우리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거의 모든 문화-문학, 미술, 음악 심지어 도덕까지-가 성선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솔직히 썩 유쾌한 일이 못될 수도 있다. 게다가 우리는 제프리 밀러의 고백대로 아직도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확히 모른다. 어쩌면 영원히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꼭 낙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곧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가 누구인지 알고자 하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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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조지 오웰 지음, 신창용 옮김 / 삼우반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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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일이다. 벌써 50만부를 돌파했다는 소식까지 들린다. 저자인 마이클 샌덜도 놀랐다고 한다. 바야흐로 ‘정의’의 시대인가? 아니면 마치 지난 10년 간 진보니 개혁이라는 말이 그랬듯이 이것 역시 ‘트렌드’에 불과한 것인가. 마케팅의 위력인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쏟아지는 한국인의 관심이 지금 현실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한 반작용일 수도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회적 분위기 “atmosphere"는 늘 당시에는 우리의식을 압도하는 무엇가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 그래 그때는 그랬었지....아니 그때 왜 그랬을까? 하는 식이다. 반성과 성찰은 뒤에 온다.


폴란드에서 유대인 집단 학살을 수행한 101예비경찰대대의 구성원들은 모두 하층 계급 노동자 출신의 중년 남성이었다고 한다. 당시 그들은 대부분 군 복무 경험조차 없었고 나치에 반감을 품고 있었던 사회 계급 출신이었으나 몇차례의 학살을 수행하면서 학살 임무에 익숙해 졌고 죄의식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역시 평범한 이웃이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한나(책읽어주는 남자)도 개인적 비밀을 감추고 있긴 하였으나 평범한 노동자였다. 80년 봄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학살하도록 명령한 전직 대통령도 좋은 이웃이었고 의리있는 상사였으며 자상한 아버지였다.

“내가 독일에서 태어났다면 나 역시 나치당원이 되어 유대인과 집시와 폴란인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패고,눈더미 밖으로 장화만 삐죽 나온 시체들을 내버려두고 나 자신은 따뜻한 방에서 고결한 배를 두드렸을 것이다.”(마더나이트 12p,문학동네) 커트 보네거트의 이 말은 마치 평범한 사람인 나에 대한 경고로 들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임의적 유전자결합과 환경의 산물인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라는 종족, 인간을 구별지을 수 있을까? 상황에 따라 예측하기 어려운 다중의 모습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우리의 자아는 본질적인 어떤 것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이 있지 않을까? 선에 대한 의지와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이 우리를 다른 무리들과 구별지어 주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마음은 “자연선택이 우리 조상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식량을 채집하는 과정에서 특히 사물, 동물 식물, 그리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정복하는 과정에서 직면했던 문제들을 해결해 주기 위해 설계한 기관들의 연산 체계”라는 스티브 핑거의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어 보인다.

“정의”가 마치 유행어가 되어 버린 시대에 조지 오웰을 들춘다. 자유의지가 과연 우리의 본성인가 하는 의문에 내게는 그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지 오웰은, 먼저 1984년과 동물농장의 저자로 나에게 왔다. 그건 좀 오래된 이야기라,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듯하다. 아마 고등학교 논술 과제로 머리속에 집어넣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너무 많이 회자되어 마치 읽은 듯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별로 감동받은 기억은 없는 것을 보니 그런 게 분명하다.


위건부두로 가는 길은 그래서 최초로 읽은 조지 오웰의 책이라고 할 만하다. 나의 책읽기 이력으로는 드물게도 르포르타주다. 한겨레21의 노동OTL시리즈를 다소 감상적으로 읽었던 탓도 있겠다. 마음은 늘 생각의 기원을 좇는다고 하는데, 같은 지호에 실린 이 책 광고는 그래서 절묘하다. 르포르타주란 쉽게 말해서 심층 취재를 바탕으로 쓴 글이란 뜻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어느 자의식 강하고 진실한 사회주의자가, 노동자의 적나라한 생활을 실제 취재를 바탕으로 담담하게 기록한 글 정도 되겠다.

“광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다른 세상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하고 문득 깨닫게 될 것이다. 저 아래 누가 석탄을 캐고 있는 곳은, 그런 곳이 있는 줄 들어본 적 없이도 잘만 살아가는 이곳과는 다른 세상이다. 아마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곳 얘기는 안 듣는 게 좋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지상에 있는 우리의 세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머지 반쪽이다.”(47p)

바로 이 세상의 반쪽에 대한 묘사가 이 책이다.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들의 실상을 약 두달 여간에 걸쳐 면밀히 조사한 결과보고서가 바로 이 책이다. 짐작하였겠지만 우리 문명의 기반을 지탱하는 세상의 반쪽은 형편없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갱도에서 하루 7시간 넘게 일하더라도 입에 겨우 풀칠할 정도의 임금, 화장실도 욕실도 없는 열악한 주거환경, 사회적 냉대가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의 전부이니 말이다. 꼼꼼하기 이를 데 없는 오웰은, 말로만 이것을 주장하려 들지는 않는다. 실제로 실직한 광부와 그 아내가 2년 5개월된 아이와 10개월된 아이와 함께 한 주에 쓰는 생활비 목록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집세 9실링 반페니, 석탄 2실링, 밀가루 3실링 4페니, 마가린 10페니, 베이컨 1실링 2페니 등등.


이는 "일거리가 꾸준하고 벌이가 괜찮다면 ‘배운’사람보다는 행복할 가능성이 많다고 감히 말하겠다”고 한 오웰을 낙담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웰은 “노동계급의 가정에서는 다른 데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따스하고 건전하고 인간적인 공기가 있다”(157p)고 쓴다.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는다면, 위선적인 중산층이나 부르조아보다 더 인간적이고 행복하다고 본 것이다.


스스로를 하급상류중산층이라고 여겼던 오웰이 이 책의 주인공인 노동자계급에 경도되었던 것은 그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20대에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어마에서 제국경찰로 복무했던 적이 있다. 이 과거 이력에 대한 속죄와 자신이 속한 계급에 대한 환멸 그리고 나아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지식인 계급에 대한 실망은 이 책의 2부에 언급되기도 한다.


이 책이 내게 소중하다면, 그건 내가 도저히 따라가지 못할 작가의 진정성 때문일 것이다. 그는 노동하는 인간의 소중함을 알고 그들이 그 노동에 합당한 대가를 받기를 원한다. 그는 자신의 기반이 무엇인지 자각한 인간이며, 실은 부르주아식으로 살고 싶어하면서도 겉으로 그들을 경멸하는 척하는 위선을 떨지는 않는다. 예컨대 “스물다섯 살 때는 열렬한 사회주의이던 중산층 사람이 서른 다섯 살 때는 거만한 보수주의자가 되는 한심한 현상”(이 책227p)과는 거리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의 또다른 작품인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생활>은 자신의 수치스런 과거에서 막 돌아온 오웰이 파리의 빈민가에서 여관 생활을 하면서 목격한 밑바닥 사람들의 삶을 담담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돈이 떨어져 어쩔 수 없이 끼니를 굶고 물건들을 전당잡히고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오웰은 호텔 커피숍에서의 접시닦기로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린 체험과 이후 런던에 돌아와 역시 싸구려 간이숙박소와 부랑자 생활을 겪는다. 이를 바탕으로 사회 최하층 사람들이 처한 현실을 전달하고 이 사회 밑바닥의 사람들도 실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듯 폭력적이고 기생충 같은 존재가 아니라 가난을 죄악시하고 일하기를 원하는 영국국민의 한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글에서 체험한 대로라면 부랑인이나 노숙인이 생각하기를 멈춘 것은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오늘 하루 어디서 무얼 어떻게 자고 먹고 담배필 수 있나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실직자가 기력이 없다고 하여 놀랄 일도 아니다. 요컨대 그들의 삶이 되어 보지 않고서 멋대로 소위 일반인의 상식의 프레임으로 밑바닥 삶들을 재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들이 겪고 있는 삶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면, 이들이 의지가 없어서도 아니고 원래 천성이 게으르다거나 부랑아 기질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면, 무언가 바꾸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개선의 주체는 당사자가 되어야 하는데 이들이 생각할 여유도 습관도 없다면, 사회의 불합리와 싸우거나 적어도 개선하는 일은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자기 문제라는 인식이 전제되지 않을 때 선뜻 부정의 또는 불합리와 맞서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이 책이 이런 문제의식으로 쓰여진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위건부두로 가는 길과 함께 읽는다면 그 해답을 엿볼 수는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함께 목표로 삼고 단결할 수 있는 이상은 사회주의의 바탕이 되는 이상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정의와 자유다. 허나 이런 이상은 거의 완전히 잊혀버려 ‘바탕’이란 말을 쑬 수도 없는 지경이다. 이 이상은 이론 일변도의 독선과 파벌 다툼과 설익은 ‘진보주의’에 층층이 묻혀 버렸다...(정의와 자유) 이 두 마디야말로 온 세계에 울려퍼져야 하는 나팔소리이다.(위건부두로 가는길,290p)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일치를 꾀했던 사람, 끊임없이 성찰하고자 했던 자의식 강한 사람, 무엇보다 인간에 대해 따뜻한 마음을 지녔던 사람이었던 조지 오웰은 위건부두로 가는 길의 원고를 출판사에 넘겨 준 후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러 떠난다.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이상인 정의와 자유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서였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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