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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진화론 - 종의 기원 강의
스티브 존스 지음, 김혜원 옮김, 장대익 감수 / 김영사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오늘은 우울하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는 것을 감안하자. 그저께 겨우 끝낸 책을 되새김질하기도 쉽지 않다.
갑자기 모든 것이 시들해졌기 때문이다. 솔직히 매사가 시들시들해 진 것은 꽤 되었다. 열정도 호기심도 무엇보다 모험심도, 고갈되었다. 어쩌면 애초부터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나의 유전자에 새겨져 있지 않은 것들. 나는 갑자기 내 유전자에 모든 것을 넘겨버리기 시작한다. 해서 나의 아버지를 관찰하였다. 물론 신중하고 의미있는 관찰은 아닐 터였다. 그것은 일종의 삐딱하고 비난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일종의 공격을 위한 합리화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나의 혈통이 나쁘다는 사실에 수긍한다는 것은, 기분나쁜 일이다. 젊잖지 못하고 상스럽다는 것을 알지만, 나의 아버지에 대한 비난을 위한 관찰은, 기실 내 존재에 대한 비난에 다름아니란 사실을 알기는 하지만,중단할 수는 없었다. 내 정신의 판단은 일단 그렇게 하기로 하고 나아간다. 어설프게 유전자 중심의 진화론을 흡수한 자의 현실!
그저께까지 김연수의 세상의 끝 여자친구와 줌파 라이히의 그저그런사람 그리고 진화하는 진화론을 읽었다. 더 거슬러가니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도 있다. 물론 한꺼번에 왕창 읽은 것은 아니다. 어떤 책은 두고두고 조금씩 읽었고, 어떤 것은 휴일날 왕창 읽었다. 원체 게을러서 침대와 방바닥을 오가며 고작 목과 손의 위치를 바꾸었을 뿐이었다.
각각의 책들은 너무 다른 형식과 서술방식으로 한꺼번에 비교할 수가 없다. 그러나 몇마디 단순하게 평한다면, 줌파라이히의 그저그런사람은 그저그랬다. 첫 작품 축복받은 집을 잘 읽은 때문이리라. 여전히 그녀는 비슷한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동화되기 어려운 이방인으로써의 정체성, 가족, 가까운 이들과의 관계. 이런 문제의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그러나 음, 뭐랄까 너무 호들갑을 떨면서 기대한 만큼의 만족감을 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여전히 읽을 만하다는 말은 해두고 싶다. 다음으로 김연수의 세상의 끝 여자친구. 사실 앞의 몇 편은 지금 명료하게 기억하기 어렵다. 한번 읽으면 좀체 두번 읽을 엄두를 안내는 나의 독서버릇 탓에 기억에만 의존해서 뭔가를 평한다는 것은, 작가에게 공평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려나 여기는 내 공간이고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있다. 하다면, 뭐 실수나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면야....아무튼 앞의 작품들을 또렷이 기억하긴 어려운데, 마지막 작품은 선명하다. 달로간 코메디언. 나는 여기 두 구절을 어느 공적인 글에서 인용하기까지 했다.
뭐랄까 아련한 우수같은 것, 비애 같은 게 느껴졌다. 좀 울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는 5만달러를 훔쳐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하였던 것일까. 주인 잃은 안경테를 발견하는 순간이.
하지만 나는 모르겠다. 이 우수와 비애의 정체에 대해서. 눈물에 대해서.
진화하는 진화론은, 애초 독자평이 아주 좋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 기대않고 읽었다.
기대를 안해서인지, 실망이 적었다. 아니 사실은 재미있었다. 옹기종기 이야깃거리가 즐비하니 즐겁게 읽었다. 물론 독자평에서 번역의 문제를 강하게 제기한 까닭은 나도 알겠다. 말이 안맞고 무슨 뜻인지 모를 구절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재미있게 읽었으니 용서할 마음은 있다.. 뭐 저자가 워낙 말을 꼬아서 하는 스타일일 수도 있으려니...하고 그만 넘어가 주고 싶은데,,이전 독자가 쓴 글을 다시 한번 읽어봤다. 그런데 이거 영, 그냥 넘어가 주면 안될 것 같다. 나 같이 마음씨 넉넉하고 이래도 흥 저래도 흥하는 사람만 있다간, 문제있는 번역이 그대로 판을 칠 터. 그러면서 우리말을 야금야금 잘도 갉아먹을 터. 이건 나에게도 안좋은 일이다. 김영사에서 책임있는 조치를 취하고 기 구매자들에게 사과하고 보상해 주어야 할 것을, 요구한다, 요구한다(으쌰으쌰)!
이제, 다음 차례는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말이 필요없다. 번역가가 폴라니 전문가니 오죽하랴. 내가 경제서나 이론서, 철학서는 거의 안 읽는 편인데, 더러 나를 읽게 만드는 책들이 있다. 빈곤의 세계화니 신자유주의의 간략한 역사가 그런 책이었다. 이 책도 그 중 하나다.
우리나라 헌법을 두고 '아름답다'라고 표현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또는 수학의 방정식이나 물리학의 어떤 이론에 대해서도 꼭 같은 표현을 쓰는 것을 보았다.
솔직히 나는 과연 그런 표현을 쓸 때가 있을까, 싶었는데. 오감을 통한 반응으로서 '아름답다'에 익숙한 나로서 말이다.
그런데, 가끔 나도 그런 말을 할 때가 있다. 어떤 이론에 대해 아름답다고, 나도 표현하고 싶을 때가 있다. 진화하는 진화론은 그런 느낌을 준다. 번역이 좀 그렇다하더라도 아름다운 책인 것 같다는.
"와우, 이거 너무 재밌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