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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의 원근법 - 서경식의 서양근대미술 기행
서경식 지음, 박소현 옮김 / 돌베개 / 2009년 5월
평점 :
내 사랑,
당신을 떠올리며 이 책을 집어 들었어. 서경식, 이 이름은 당신 없이는 아무 의미도 없을 터이니. 당신이 만진 물건과 당신이 건넨 쪽지들, 당신에 의해 발화한 그 어떤 단어들, 당신이 서 있던 그 자리들, 그리고 당신을 비추던 불빛들, 당신이 머물던 자동차의 그 자리, 한쪽이 더 굵은 팔의 어떤 부분, 오른쪽 손가락 마디굵은 부위.....그리고 우리들이 함께 고르던 책들, 우리가 함께 공감했던 작가들.....
나는 당신에게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음을 늘 깨닫곤 해. 눈이 뜨이며 늘 당신이 자동적으로 마음으로 달려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추억이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건 그 단어가 현재가 아닌 과거를 내포하기 때문일거야. 사랑을 추억해야 하는 상태란, 좋지 않은 결과를 의미하고 그것은 결국 이별의 다른 말임을 이미 알아버린 사람만이 추억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나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다!"라는 비트겐쉬타인은 옳군!).
내 사랑,
그림이 고뇌하지 않게 된 건, 역사의식의 부재일까? 자각이 사라진 현재의 삶 때문일까?
서경식은 언제나처럼 무거워. 그의 글들은 추상적이지 않지만, 문맥은 늘 의지적이니 말이야. 서경식은 이전과 달라진 점이 별로 없어 보여서 처음 몇 페이지를 읽다가 그만 덮어버렸어.
숨이 막히기까진 아니지만, 답답한 마음이었어.
그가 좀 달라졌기를 기대한 것일까. 이젠 그만 즐기기를 바란 것인지도 몰라. 그가 너무 무거운 짐을 스스로 걸머진 것 같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거야. 그의 가족사가 그를 가볍게 만들지 못하리란 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왜 그런지, 그에게 이런 기대를 하였어.
아니 어쩌면 지겨웠는지도 몰라. 삶이 다면체라면, 왜 그의 삶은 늘 면이 아니라 그 면들의 경계선이어야 할까? 그러지 말았으면, 편안하고 달콤하고 안락한 미술도 얼마나 많은데 왜 그는 일부러 고뇌의 정면을 찾아. 고뇌의 그림자와 고뇌의 언저리조차 일부러 쫓아다니는 걸까 하는.
하지만, 그래서 서경식은 서경식인거야. 그는 왠지 내가 그리던 얼굴 모습을 하진 않았지만, 거리를 적당히 두어야만 하는 까다롭고 예민한 사람 같아 보이지만, 그가 만약 이렇듯 반드시 존재하지만 숨어있는 듯 보이는 것들에 대해 고뇌하기를 그만두어 버렸다면, 나는 아마 더욱 실망하고 말았을지 몰라(그러고 보니 내가 마치 거미여인 몰리나 같이 말하고 있군. 그녀-나는 그를 그녀라 부르겠어-는, 밤마다 자기가 본 영화를 이야기하지, 그 낮은 대화체의 말들을 내가 지금 흉내내고 있는 듯해).
사물의 이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야. 나는 늘 그 점이 불편하곤 했어. 나에게 없는 어떤 것들이 부럽기도 하고, 조바심나기도 했어. 그래서일까? 나는 늘 과학에 경도되곤 해. 부족한 것들을 채우기 위해, 옆으로 기우는 것, 나의 눈이 향하는 곳. 사물의 진실,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 그래서 진실된 것들. 현실과 동떨어져 더욱 가치있어 보이는 것들.
서경식은 이렇게 나를 돌아보게 해. 역사를 본다는 것, 생활인으로 산다는 것의 진심을 이야기하는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생의 어떤 부분을 외면하고 지나쳤을거야.
이 책을 읽는 동안만이라도 미술이 무엇인가, 예술이 어떤 것인가를 곰곰 생각해 보도록 하니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