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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문명
정수일 지음 / 창비 / 2002년 8월
평점 :
스파이더맨은 마블 코믹스의 스탠 리와 스티브 딕토에 의해 처음 창조되었다. 1962년 8월 어메이징 판타지(Amasing Fantasy) 마지막 호에 최초로 등장한 이래 단행본으로, TV시리즈물 등으로 만들어져 전세계 수많은 소년과 소녀들의 꿈과 환상을 자극해 왔다. 이쯤되면 헐리우드의 영화 제작자들이 군침을 흘릴 만한데 그간 저작권 문제 때문에 2000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극장용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 여름 극장가를 한창 달구고 있는 2편은 전편의 흥행 성적을 가볍게 뛰어넘었을 뿐 아니라 작품성 면에서도 평론가들의 호평 일색이다. 흔히 1편보다 더 성공한 2편은 흔치 않다고 하는 영화계의 관례를 깼을 뿐 아니라 더 깊어지고 철학적이라는 평이다.
그랬거나 말거나 영화가 일단 사각의 스크린에서 제 역할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것은 순전히 개인적 체험이 된다. 중력을 이기려는 인간의 욕망이 스파이더맨이라는 상상의 인물을 자극했을 것이라고 믿는 관객은 스파이더맨이 공중을 곡예하듯 거침없이 내달리거나 벽과 천장을 내키는 대로 달려가는 모습에서 더한 쾌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다소 교훈적인 사실에 경도된 관객이라면 피터가 매번 집세도 못내고 쩔쩔매거나 번번이 일터에서 해고되다가 위기의 순간에 선량한 시민을 구하는 영웅으로 변신하는 모습에서 결정적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도 있다. 혹은 비밀을 간직한 존재의 고독을 동정하는 관객이라면 진실을 모르는 타인들과 스파이더맨과 피터라는 인물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에서 스릴을 맛볼 수도 있다. 그야말로 처지와 경험에 따라 각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다양한 감상이 있을 법하다. 그런데 영화를 보든 또는 그 밖에 다른 것을 하든 이 개인적 체험은 과연 순수하게 개인에게만 귀착될 수 있는 문제인가.
「이슬람문명」은 2년 전 흔히 9.11테러로 말해지는 그 사건 이후, 이슬람문명에 대한 관심과 우려가 높아진 덕에 세상에 나오게 된 책들 중의 하나다. 지은이 정수일 역시 이력이 만만치 않은 사람이고 보니 책을 읽기도 전에 어떤 선입관이 작용할 것 같다. 아무려나 북경대학과 카이로대학 동방학부에서 이슬람을 공부했고 <이븐 바투타 여행기> 등 이미 여러 권의 역서와 저서를 낸 바 있으므로 이 쪽 계통의 전문가라 할 만하다.
세계의 13억 인구와 50여 개국이 이슬람교를 믿고 있고 소위 ‘이슬람 공동체’라고 하는 동질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지만 우리가 이 문화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일련의 불행한 사건들이 있고 나서인 것 같다. 물론 지리적인 거리감과 문화의 이질성이 큰 몫을 했을 것에 틀림없지만 그것 역시 서구 중심적인 학문 풍토와 사회 지향의 결과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파리와 카이로를 비교했을 때 당연히 파리가 거리로는 더 멀다. 그러나 문화적 측면에서는 그 반대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정수일도 서구 역사에서 중세 문화를 꽃피워 고대와 근대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담당했던 이슬람문명이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은 순전히 서구 중심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평가한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는 세계에서 가장 심하게 오해와 왜곡, 심지어 능멸를 당하는 종교라고 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이슬람교에 대한 오해가 ‘한 손에는 코란, 다른 손에는 검’이라는 말일 것이다. 이말은 13세기 중엽 십자군이 이슬람 원정에서 최후의 패배를 당하던 시기의 토마스 아퀴나스가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말은 꾸르안(코란의 아랍식 표현)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게 지은이 설명이다. 이슬람이란 아랍어도 원래 ‘순종’과 ‘평화’의 뜻을 담고 있다. 또한 이슬람교는 관용성과 융통성의 종교다. 이슬람의 가장 근본적인 법원인 경전 <꾸르안>과 교조 무함마드의 언행을 수록한 준경전 격의 <하디스>에는 이를 증명하는 구절이 곳곳에 있다. 일부다처제를 허용한다거나 여성에게 운전 면허를 허용할 것인가 말것인가가 중요한 사회문제이고 종교를 위해 자살테러까지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이슬람의 본질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슬람에 대한 앎이 없고서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한 말에 전적으로 기대어 이슬람을 볼 수밖에 없을 터이므로 이슬람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야말로 이슬람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판단을 세울 수 있는 기본일 것이라는 지은이의 말은 그래서 손을 들어 줄 만하다. 13장에 달하는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마치 사회 교과서 같이 목적에 충실하다. 이슬람을 왜 알아야 하는가에서부터 이슬람의 출현과 종교관, 경제관, 정치관, 사회 및 예술 등을 아우르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한국과 이슬람의 바람직한 관계에 이르기까지 성실하게 고찰하고 있으니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슬람문명이 생각보다 우리와 생판 이질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우리 역사 곳곳에 흔적이 남아 있을 만큼 이슬람문명과는 인연이 깊다. 경주의 괘릉에 버티고 서 있는 서역인은 페르시아인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하고 고려 속요 ‘쌍화점’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탁주, 청주와 더불어 한국의 3대 토주의 하나로 꼽히는 소주는 그 연원이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는 서아시아 무슬림들의 양주법에서 온 것이다. 지은이는 우리 훈민정음에도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위구르어의 언어적 요소가 참입되었을 개연성을 넌지시 비치기도 한다.
무시와 폄하가 모르기 때문에 저질러졌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핑계가 될 수 없다. 문명의 충돌이니 어쩌고 하는 서구식 개념을 앞질러 다양성에 대한 관용, 낯선 것에 대한 배려, 나아가 선에 대한 공동의 희망을 가지려 하는 노력이야말로 소위 문명인이 가져야 할 첫 번째 미덕이다. 그렇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대미문의 살인 전쟁에서 우리가 편들어야 할 대상은 자명해진다.
내가 받은 교육, 경험, 사람과의 관계 더 나아가 내가 속한 공동체의 통념이 결과적으로 나라는 개인의 사고와 생활에 족적을 그어 놓은 바, 한편의 영화를 보는 행위에서부터 전혀 다른 문화권의 사람에 대한 이해에 이르기까지 개인적 체험이란 이런 것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체험이 개인적이라 하더라도 그 근저에는 사회적인 것을 뛰어넘을 수 없는 어떤 경계가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