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관련해서 좀 이상한 마음이 있다, 내게는.
남들이 다 좋다 하면 읽기 주저되는.
읽으려고 하다가도 말고,
읽고 있다가도 중단하는.
거 참, 묘한 심리로다.
예를 들어, '혼모노'가 그렇다.
나오자마자 샀는데, 요즘 핫한 배우님이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소설 읽으면 되는데'하면서,
뭐, 안 그래도 좋은 작품이니 그렇겠지만,
엄청나게 화제가 되면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제치고 막막 치고나가면서,
읽기가 싫어졌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비비언 고닉의 '상황과 이야기'도 그랬다.
글쓰는 사람들 만나면 이 책 이야기를 미리 짠 것처럼 했다.
사놓고 모셔두고 있을 때였다.
더 빨리 읽어야 숙제같은 책들이 많아서.
그런데 시간이 나도 자꾸 뒷순위로 밀리는 거다.
주변에서 하도 좋다 하니까.
무슨 가방도 아니고, '책'이라면 좋다고 하면 좋은 건데...
아무튼 드디어 펼쳤다.
30페이지까지 읽었는데...
아 짜증...
이 좋은 걸 이제야 읽다니.
이제부터는 남들이 좋다하면 무조건 그것부터 읽기로 결심했다.
남들이 좋다고 할 땐 다 이유가 있는 거다~~~.
30페이지밖에 안 읽었는데 큰 걸 배웠다.
거리두기-.
저자는 글 쓸 때, 압도적으로 유용한 자세에 대해 설파한다.
그게 '거리두기'이다.
누구와 거리두기? 쓰는 자와.
뭔 말이람? 쓰는 사람이 엄연히 '나'인데 쓰는 자와 거리를 두라니.
여기에 '내포작가'를 개입해 보면 어떨까 한다.
지금 소설 이야기는 아니지만 말이다.
에세이 이야기다.
에세이를 쓰는 사람은 소설과 달리, 무조건 '화자'가 된다.
에세이의 화자는 무조건 '나'니까.
그런데 비비언 고닉은 바로 그 '나'와 거리두기를 하라는 거다.
이건 또 뭔 말이람?
그렇게 계속 질문하며 이어 읽었다.
애컬리(에세이 작가)가 (아버지와)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목소리를 명료히 하는 데는
30년이 걸렸다. 거리 두기를 성취하고, 자신에게 정직해지고, 신뢰할 만한 서술자가 되는데 30년이 걸린 것이다.
그는 누구였는가? 나는 누구였는가? 왜 우리는 서로 엇갈리기만 했을까?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 그는 깨달았다. 난 언제나 아버지가 나를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내가 아버지를 알고 싶지 않았던 거구나. 그러고는 또 깨달았다. 내가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구나.
서술자는 분노를 기록하지만, 글은 분노로 미쳐 날뛰지 않는다. 서술자는 제국 통치를 증오하지만, 이 증오를 통제하고 있다.
저자는 에세이에서-나는 여기에 소설도 포함될 수 있다고 본다-
상황과 이야기를 구분할 것을 권한다.
애컬리는 이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런데 왜 30년이나 걸렸을까?
3년이 아니라.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들려준 것은 그의 이야기가 아니라 상황이기 때문이다. 꺼내놓는 데 30년이 걸린 것은 이야기였다.
읽는데 진심, 소름이 돋았다.
상황과 이야기.
어려운 것 같지만 몇 개 되지 않는 문장으로 그 '느낌'까지 소상히 전해준다.
기가 막힌 작가다, 비비언 고닉은.
소설에서 상황과 이야기를 구분하는 것에 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필시 대단히 유용할 것이다.
에세이와 소설에서 상황과 이야기를 구분해 보려 하는 작은 노력만으로
그 독서의 질은 대단히 달라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P.S.
나는 책 갖고 장난을 잘 친다. 책하고 친하고 싶어서다. 책을 자꾸 들쳐보게 되는 방법을 생각해 내려 애쓴다. 예를 들어, 이런 장난이다. 이 책 속에서 인용하는 영국인 에세이스트 애컬리(J.R. Ackerley)의 책 <My Father and Myself>. '아버지와 나'라는 제목인데 국내엔 번역서가 없다.
아마존에서 원서 표지를 찾아 프린트해서 그 책이 소개된 면에 갖다 붙였다.
언젠가는 읽어봐야지. 이런 하이퍼텍스트성 텍스트를 나는 사랑해마지 않는다. 더 읽고 또 리뷰 써야지.

(알라딘 서재에 왜 요즘 사진이 안 올라는지 ㅠㅠ. 책에다 표지 갖다 붙인 사진을 올렸는데 안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