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마지막 날.

미국은 귀신을 쫓기 위해 귀신으로 위장하는 날.

거리마다 가게마다 귀신들이 그득하다.


매년 할로윈은 추웠는데, 이번엔 햇살이 봄처럼 좋다. 

이런 날은 집 안에 있는 게 날씨에 대한 결례같아 나선다.

특별한 목적지 없이 차 타고 검색을 시작했다.


볕은 봄이지만 시기는 가을이니 단풍!


단풍과 서점과 카페가 그득한 곳이란다.

그래, 뉴욕주 뉴팔츠(New Paltz)다. 집에서 한 시간.


New Paltz부터 공부. 


17세기 프랑스 위그노(Huguenot) 이주민들이 정착한 곳으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주거지 거리 중 하나인 히스토릭 위그노 스트리트(Historic Huguenot Street)가 남아 있다. 뉴욕주립대(SUNY New Paltz)가 자리한 덕분에 오래된 건물과 독립서점, 갤러리, 카페들이 어우러져 있다. 인근 샹가크 산맥(Shawangunk Mountains)의 아름다운 풍경까지 더해져, 오래된 역사와 젊은 예술적 감각이 공존하는 마을이다. -나무위키 중-


호젓한 도로와 새치름한 골목을 기웃거리는데 중고서점 둘이 마주보고 섰다.

벗인가, 적인가. ^^


먼저 들어간 곳 초로의 주인 남자는 샐러드를 먹고 있었다.

일회용 접시에 플라스틱 포크로.

어째 안 어울리잖아...


난 지금부터 시간을 거슬러 갈 건데.



시집 코너.

책이 얇으니까. ㅋㅋ

읽는 덴 부담 크지만, 보는 덴 부담 없으니까.


메리 올리버 시를 뒤적였다.


Dog Songs.

장마다 귀여운 개 일러스트. 꺅, 소리칠 뻔.



이 책이 번역돼 있던가. 찾아보니, 있다. 품절. 


개를 위한 노래



이걸 사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중고책에 더 눈이 가서.


그러다 심봤다!


아모스 오즈의 장편 소설, 'Don't Call it Night'.














그리고 소설쓰기하고 연관해서 이 두권 모셔왔다.



두 권 모두 한국 번역본은 없는 듯하다.

특히 왼쪽 책은 '단편소설 종합 작법서' 같은 건데 33명 소설가의 작품이 인용문으로 다루어져 있다. 이런 거 읽는 재미가 쏠쏠한 법. 


오른쪽 책은 소설의 대사 쓰기 작법서인데,

역시 구매 의도는 같다. 인용문 읽는 재미.

내가 미처 챙겨 읽지 못했거나 내 레이더에 들어오지 못했던 

좋은 소설들을 대거 '조각'이나마 맛볼 수 있다.

전체 파이가 아닌 조각으로 먹을 때 그 맛의 임팩트라니!



오늘 본격적으로 떠들어 볼 책은 이거다.

이건 플라스틱 포크로 샐러드 먹는 주인장의 중고서점이 아니라 그 근처 

앤틱숍에서 건진 거다.


The Brave Little Tailor.


출판연도를 확인하니 1958년. 무려 68년 전의 책

나보다 먼저 세상에 나와,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손을 거쳐 여기까지 흘러온.


이야기는 유쾌하다. 

가난한 재단사가 파리 일곱 마리를 단번에 때려잡는다. 

의기양양해진 그는 허리띠에 '한 방에 일곱!'이라고 새기고 세상으로 나간다. 

사람들은 그가 사람 일곱을 때려눕힌 영웅인 줄 안다. 

재단사는 굳이 오해를 바로잡지 않는다. 

그 허풍을 밑천 삼아 거인들을 물리치고, 

당시 동화가 흔히 그렇듯 당연히 공주와 결혼한다.

공주와 결혼했으니 또 당연히 왕이 된다. 

파리 일곱 마리로 왕이 된 인생역전 스토리.


그림이 지금 나와도 전혀 꿀리지 않게 세련됐다.


1958년은 전쟁이 끝났으니 미국에 아이들이 넘쳐났을 거다.

어린이책 시장도 폭발적으로 성장했겠지.


컬러 인쇄가 대중화되던 시기.

이 책도 색감이 이다지도 또렷하고 어여쁜 이유가 그것일 거다.

색, 색, 색으로 유혹하라!


이 책이 속한 'Wonder Books' 시리즈는 1949년 첫 책을 찍었다.

그 당시 한 권에 25센트였다고.

첫 두 달 동안 200만 부가 팔려나갔단다.


내 어린 시절은 부의 상징이 피아노였다.

피아노 있는 친구 집에 초대도 안 받았는데 막 쳐들어갔더랬다.

그때는 그렇게 쳐들어가도 떡볶이와 꽈배기 같은 걸 내주었다.

날 초대한 적 없는 친구는 배 깔고 엎드려 

오렌지처럼 큰 귤을 까먹으며 일본에서 건너온 만화책을 읽었고

나는 도둑 고양이처럼 등을 웅크리고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


소리 너무 크지 않게 가운데 페달을 밟아놓고.

그때 도레미도레미를 쳐보다가, 용기내서 88개 건반을 저쪽 끝에서 

이쪽 끝까지 하나씩 눌러보다가 더 용기내서 친 게,

'엘리제를 위하여'였던가.


나름, '완주'하고 등을 좀 펴고 보니 뒤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만화책 보던, 날 초대하지 않은 친구는 여전히 배깔고 엎드려 

만화책 다음 권을 집으려 하고

한 번도 본 적 없던 그 친구 아부지.


어디서 피아노를 배웠니, 얼마나 배웠니...


1년 정도요-그게 내 평생 피아노 배운 총 길이다-.


-그런데 그렇게 잘 치니?

-이거만 쳤거든요.

-그래? 아주 집중력이 좋구나.

-다 외우는 게 이것 뿐이어서요.

-그게 집중력이 좋은 거야.

-우리 오빠는 제가 대가리가 나빠서 그런 거라는데요.


날 초대하지 않은 친구가 킥킥 웃었던 게 그때인데

나는 지금도 그 애가 만화책이 웃겨서 웃은 거라고 믿고 산다. 


이야기가 너무 삼천포로 빠졌...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서~~

한국에선 피아노가 부잣집의 상징일 때

미국에선 컬러 그림책이 부잣집의 상징이기도 했다.


인쇄술도 그때가 좋았는지

68년이 지났는데 색감의 선명도가 예술이다.

종이도 얇은데 찢어진 데 없이 든든하다.


캬. 이 냄새.


68년 묵은 책 냄새. 책의 살 냄새.

먼지 냄새도 아니고, 곰팡이 냄새도 아니고,

아니아니, 먼지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나무향과 버무려진 이 오묘한 냄새.


미간이 찡그려지려 하다가 돌아서면 뭐였더라? 한 번 더 맡아보고픈 이 냄새.


늙은 어머니의 땀과 몸 기름이 밴 베갯잇 냄새같은.

깨끗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빡빡 빨아 빼내고 싶지 않은.


표지 위쪽에 적힌 문구 봐라.


An Old Favorite with New Pictures.

오래된 이야기에 새로운 그림을.


그 문장을 한참 들여다봤다. 

1958년, 이 책을 처음 집어 든 아이에게 이 그림은 분명 'NEW'였을 테지.


완전 '새빠시 신상'이었겠지.


인쇄소에서 막 나온 책답게 신선한 잉크 냄새가 물씬 났을 테지.

아이에게 'NEW'라는 단어를 말 그대로 새로웠겠지.


그러고 68년이 지나는 사이, 그 아이는 자라고, 나이 들고, 늙어갔겠지.

이제는 팔순 정도 되었겠지.


지금의 팔순 노인은 기억할까.


68년 전의 새로움을.

지금 그 나이에는 무엇이 새로울까.


이 모든 디지털이며 AI며, 스스로 움직이는 자동차가 새로울까.

팔순의 몸에 그게 새롭기나 할까.

새로움을 넘어, 다른 차원의 이야기는 아닐까.


이젠 '새롭다(NEW)'는 말도 좀 지친 느낌이다.

이전과 달라야 새로운 건데, 이전과 다른 걸 느낄 수도 없으니.

이전과 다른 걸 느끼려면 그것의 '유저(user)'가 되어야 할 테니 말이다.


유저는 주권, 권력 같은 말과 통한다.


무언가를 '사용한다(use)'는 것은 그것을 다룰 줄 안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그 귤 까먹고 만화책 보던 친구는 피아노를 칠 줄 모르는데

'장식용'으로 엄마가 산 거라고 했더랬다. 왜 자꾸 그때 피아노가 떠오르는지-


내가 팔순이 될 때, 내겐 무엇이 새로울까.

기대와 설렘보다는 왜 두려움과 맥빠짐인지.


그땐 달나라를 내집처럼 오갈라나?


그때 새로울 게 뭔진 모르지만

그 미래의 나,

그리고 68년 전 이 그림책을 손에 들었을 아이에게 도래한

 'newness' 중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후자를 고르고 싶다.


내겐 그게 훨씬 '살'로 다가오니까. 

그 흥분과 설렘이.


나는 중고서점에서 오래된 책 한 권을 산 것이 아니라, 

68년 묵은 'NEW'를 샀다. 


서점을 나섰을 때도 햇살은 여전히 좋았다. 

나는 68년 된 책을 품에 안고 걸었다. 

동반한 이가 말했다.


-중고책이나 오래된 책엔 벌레가 살아. 몸에 옮을 수 있어.

방에도 두지 마.


이 사람 참...


볼수록, 만날수록 새롭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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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뜨개도 개인적이지 않았다 - 조각난 세계를 이어 붙이는 치유와 연결의 힘
로레타 나폴레오니 지음, 장상미 옮김 / 유유 / 202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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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뭘 하더라도, 이 정도의 탐구 정신으로 임한다면, 그 취미는 더 이상 단순한 여가가 아니라 삶을 밀고 나가는 강력한 동력이 될 것이다. 그떈 무엇을 하느냐의 경지를 넘어 그것에 어떻게 자신을 바치느냐가 될 테니까. ‘헌신‘하면 ‘보람‘ 말고도 더 큰 걸 손에 쥘 수 있다.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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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과 정원 - 나만의 신화를 세우는 추상의 힘
최진석 지음 / 퍼블리온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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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책꽂이 정리를 하면서 저자별로 책을 묶었다. 한병철 철학자의 책이 제일 많고, 그 다음이 수잔 손택. 그 다음이 이분이다. 나도 그걸 이제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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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주자들 - 주류의 삶 바깥으로 달아나 칩거를 택한 청년들
리잉디 지음, 김경숙 옮김 / 김영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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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주류적‘인 삶에서 미래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해 ‘자기만의 집‘을 찾아 떠난 청년들의 삶의 궤적과...>이민자와 탈주자의 차이는 뭘까. 혹시 다른 주류를 찾아 떠나는 이가 이민자고, 주류 자체가 싫어 떠나는 이가 탈주자일까. ‘이‘는 다른 자리로, ‘탈‘은 바깥의 자리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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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자기 뼈의 운명을 알겠는가 - 하이드리오타피아, 유골 항아리 매장에 관하여
토머스 브라운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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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아직 잘은 모르겠으나, 근자에 본 책 중 제목이 제일 근사한 것같다. 뼈의 운명이라. 그러고보니, 우리에게 운명이란 게 있다면, 어쩐지 그게 스민 장소는 뼈일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운명이 심장에 깃들까, 달팽이관에 깃들까. 뼈가 제일 어울린다는 건 기분 탓일지. 역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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