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8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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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턴 양은 아주 천천히 내 손가락을 한 번에 하나씩 풀며 책을 차지해 가고 있었다. 그 과정이 내게는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졌는데 그동안에도 나는 어렵사리 그 자세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소설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이성 간의 '접촉' 묘사를 대한 적이 없다. 


텍스트 자체로만 묘사하는 '섹슈얼리티'는 텍스트 자체란 한계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 어떤 감각도 건드리지 못하고 마는.


고작 손가락의 교차 정도인,

대단히 낮은 밀도의 접촉.


'품위'에 목숨 건 품위 있는 고지식함의 끝판왕인 스티븐스 집사의 손가락을 

한 번에 하나씩 풀어가는 켄턴 양.


스티븐스가 도대체 무슨 책을 읽는 건지 참아낼 길이 없는 그녀.

그걸 왜 못 참을까?

그래서 왜, 책을 움켜쥐고 선 그의 손가락을 한 번에 하나씩 풀고 있는 걸까?

그리고 그는 왜 그 자세를 어렵사리 유지하며 가만히 있을까?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빼낸 소설이 그 답을 말해 준다.


감상적이고 유치 찬란한 연애 소설.


품격의 끝판왕인 스티븐스 집사가 그런 연애 소설을 읽는 이유, 아니 핑계는

품격 있는 집사의 자질을 계발하기 위해서다. 


학문적 연구서에는 없는

'훌륭한 영어'와 '우아한 대화'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정말이지,

이리도 감상적이고 유치 찬란하게' 말초 신경이 곤두서는

'섹슈얼리티'를 

이리도 격조있게 구사해 내는 능력이란.


몇 해 동안 앙숙이자 동지로  

벗삼아 온 대저택의 남집사와 여총무.

소설 속에서

두 사람의 은애어린 '접촉'은 

이 손가락의 교차, 단 한 번 뿐이다. 


그래서 너무나 귀하다.


너무나 귀해서 자꾸 읽고, 떠올리다가

내 손가락을 꼬물락거리게 된다. 


네. 스티븐스 씨. 저희는 종종 당신 이야기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죠.

예를 들면 당신은 음식에 후추를 뿌릴 때 항상 코를 감싸 쥐는데,

제 지인이 툭하면 제게 그걸 흉내 내 보라고 하고는 배꼽을 잡고 웃지요. 


'지인'은 켄턴 양의 약혼자.


켄턴 양은 약혼자를 앞에 두고 스티븐스가 음식에 후추 뿌릴 때 코를 감싸 쥐는 습관을

이야기하면 웃는다. 그걸 또 배꼽을 잡고 되웃는, 뭐 약혼녀의 진심 따윈 알 턱 없는 약혼자라니.


아, 나는 소설에서 

이토록

은밀하기 그지없는

연모의 고백을 본 적이 없다.


그때 나는 쟁반을 받쳐 든 채 어두컴컴한 복도에 잠시 멈춰 섰고, 문 안쪽 바로 몇 미터 앞에서 켄턴 양이 울고 있을 것 같은 확신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다.


두 사람의 숨긴 연정은 '문턱'에 가로막힌다.


바흐친의 '문턱'의 크로로토프.


크로노토프가 지닌 유용함을 제대로 실현해 낸다.

복도란 '공간'에 어두컴컴한 '시간'이 '문턱'에서 직조된다.

그 결과 독자는, 

책이란 일차원이 아닌,

인물이 서 있는 3차원의 시공간에 슬몃 들어앉는다. 


그래서 손에 잡힐 듯, 생생해서 먹먹해진다.

문 안쪽에서 울고 있을 켄턴 양과 그 울음을 확신하는,

쟁반 든 집사 양반의 접촉 불가한 연정에...


[남아 있는 나날]이 연애 소설이었던가...

연애 소설이 아니라면, 작가는 선을 넘은 셈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독자를 이렇게까지  슬프게 할 필요까지는...


끝끝내 서로의 마음을 움켜쥐고 내놓지 못하는,

이 은밀하고도 농밀한 사랑이라니.


우리들의 사랑은 너무...내...놓는다, 말이지.


요 며칠 사이에 나의 상상을 붙들어 온 그 여행을 정말 감행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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