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로주점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3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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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특히 19세기 리얼리즘 소설)들을 읽다보면, 문득 짜증이 치밀 때가 있다. 주인공이 위기에 처했는데 우연의 개입으로 그것을 극복하는 대목이 그렇다. 예를 들자면 사고무친에 굶어죽게 된 올리버 트위스트를 착한 신사가 나타나 돕는다든가 하는 설정 같은 것(디킨스 씨 죄송합니다).

 

현실에서는 결코 그런 우연(행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짜증이 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비현실적 우연, 죽이는 타이밍, 사람 냄새 안 나는 천사 캐릭터들 덕분에 독자는 소설을 계속해서 흥미진진하게 읽어 나갈 수 있기도 하다. 선한/순수한/근면성실한 주인공이 맥없이 죽어버린다면, 큰일이다. 세상이 그렇게 미쳐 돌아간다면 누가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소설의 초반부에서 독자는 주인공이 어떤 미덕을 지녔는지, 닥치는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 미덕을 어떻게 꿋꿋이 지켜내는지를 파악한다. 그리고 소설의 후반부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그 미덕이 나름의 정당한 대가를 받게 될지를 자못 흥미진진하게 지켜본다. ‘정당한 대가라는 당위가 앞서다 보니, 어느 정도의 우연은 용서가 된다.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은 이러한 소설 구성의 암묵적 공식을 무참히 깨는 소설이다. 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미덕은, 환경적 요인과 우연한 사고 앞에서 순식간에(또는 서서히) 빛이 바랜다. 충격적인 점은 주인공이 내적 깨달음을 얻거나 자기반성을 하기도 하고, 숱한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서도 지키고자 하는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기도 하지만(심지어 천사 캐릭터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그것이 예정된 몰락과 죽음을 막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마치 밀물 때의 파도가 잠시 뒤로 물러서는 듯하지만 서서히 해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켜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몰락은 필연적이다.

 

에밀 졸라는 <목로주점>에서 삶의 희망을 모두 잃어버린,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보여준다. 그런 세상의 흐름에 속절없이 휩쓸려 오직 살아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 된삶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도 의지도 수단도 신념도 없기에 그저 죽음을 조금씩 연기하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목적이 된파리 노동자들의 삶을 보여준다. 오죽하면 빅토르 위고마저 졸라가 노동자들의 비참하고 비천한 삶의 흉측한 상처를 제멋대로 드러내 보여준다며 유감을 표명했을까.

 

타락과 몰락의 과정을, 그 비참함을 묘사함에 있어 <목로주점>은 갈 데까지 간다. 때문에, 문득 짜증이 치민다거나 하진 않는다. 디킨스 류의 소설에 지친 독자들에겐 오아시스 같은 소설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딱히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디킨스 류의 소설이 그리워진 달까. 짜증을 냈던 스스로의 오만을 돌이켜보게 된달까.

 

희망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우연의 개입으로 인한 것이라 할지라도, 비현실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희망은 필요하다. 하지만 우연과 환상에 의한 희망은 거짓 희망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거짓 희망이 만연한 사회일까요, 아직은 진짜 희망이 존재하는 사회일까.

 

잘 팔리는 소설이나 시청률 높은 드라마(또는 예능 프로)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다가 문득 짜증이 치미는 경우가 잦았다면 그 역시 어떤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연과 환상의 도움이 없이는 희망을 구성할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음을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지표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오늘날 우리 대다수의 실제 삶이 <목로주점>의 주인공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든다.

 

치미는 짜증을(혹은 분노를) 감내해가면서, 말도 안 되는 우연과 개드립들을 용서해가면서 책과 드라마에, 예능 프로에 하염없이빠져든 경험이 있는가? (고백하자면 나는 많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가까스로살아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인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상에서 종종 쓰이는 표현 중에 바닥을 친다는 표현이 있다. 육체적인 것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매우 힘든 일을 겪고 나면 바닥을 치고다시 올라간다는 위로 내지 자기 위안의 의미가 내포된 표현이다. 하지만 <목로주점>은 그러한 위로가 기만임을, 바닥 밑에 또 다른 바닥이, 끝 모를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선한 마음으로도 굳센 의지로도 근면 성실로도 이 바닥/심연으로의 추락을 막을 수 없다.

 

기억할 점은 에밀 졸라의 이야기는 <목로주점>에서 완결되는 게 아니라 스무 권에 달하는 루공-마카르 총서라는 거대한 별자리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때문에 <목로주점>에 이어 (<목로주점>의 주인공 제르베즈 마카르의 자손들이 등장하는) <나나> <작품> <제르미날>을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특히 관심이 가는 것은 <제르미날>이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제르미날>, 자신들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하여 민중-노동자들의 비난을 받은 <목로주점>과 달리, 민중-노동자들의 진심어린 환호를 받았다고 하니 말이다. <목로주점>에서 가까스로의 삶의 밑바닥을 보여준 졸라가 <제르미날>에서는 어떤 식으로 기만적 희망이 아닌 진실한 희망을 구성해냈을지가 궁금하다. 읽을 만한 번역본이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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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일족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5
모리 오가이 지음, 권태민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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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모리 오가이(1862-1922)는 나쓰메 소세키(1867-1916)와 더불어 ‘일본 근대문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굵직한' 작가다. 그런데 ‘근대문학’에서 ‘근대’라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 <아베 일족>과 같은 작품을 읽다보면 자연히 의문이 생긴다. 소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예스러운 표현과 구성이 그렇거니와 이야기 자체가 ‘옛날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딱히 주인공이라 부를만한 인물이 없고 내면 묘사가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는 점은 현대 독자의 감정이입을 방해한다. 이건 근대소설이라기보다 '역사 소품'에 더 가까운 작품이 아닌가?

 

<아베 일족>은 폐쇄적이고 자기충족적 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베 일족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지위와 녹봉, 그리고 명예율에 따라 질서가 견고하게 자리 잡은 세계 속에 존재한다. 이 세계는 외부를 상상할 수 없는 세계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넘쳐나는 인력과 에너지를 발산할 외부-바깥이 없으므로, (잉여)인력은 (잉여인력 스스로의 손으로) 제거되며, 에너지는 내부를, 내부 구성원 서로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한다. 자살이라는 죽음의 형식은 명예(체면)라는 가치로 수렴되고 숭고함을 얻는다. 그러나 모든 ‘죽음’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언제, 어떻게 죽느냐 그 절차가 중요하다.

 

주군이 죽으면 따라죽는 ‘순사’라는 죽음의 형식에는 현실적이고 사회학적인 맥락이 존재한다. 순사는 구세력와 신세력 간의 권력다툼이라는 사회적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는 역할을 하며, 노인을 부양하는 데 소요되는 사회적 비용을 없애는 역할을 한다. 또한 집안의 자손에게 지위와 녹봉이 고스란히 상속된다는 점에서 보면, 순사는 상속 제도이자 일종의 ‘생명보험’이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한 폐쇄적인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에너지가 통제된다.

 

그러나 아무리 폐쇄적인 사회라 할지라도 틈은 생기게 마련이다. 이 틈을 우리는 ‘개인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모리 오가이는 <아베 일족>에서 ‘개인성’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서술한다. 일견, 위계질서가 확고하고 그에 따라 각자가 있어야할 자리 및 각자가 행해야할 행동이 명확히 정해진 사회에서 ‘개인성’은 존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순사’라는 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적 억압이자 폭력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다분하지만 <아베 일족>에 등장하는 인물 중 누구도 ‘순사’ 자체의 대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적 규범을 철저히 내면화하고 있으며, 이는 다시 사회 질서를 굳건히 하는 데 기여한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틈은 발생한다.

 

틈이 발생할 여지는 ‘(할복)자살’이라는 죽음의 방식과 거기에 뒤따르는 가치인 ‘명예(체면)’에 내재해 있다. 이로부터 개인성이 싹튼다. 왜냐면 명예는 사회적인 가치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가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족의 수장 아베 야이치에몬 미치노부는 일단 사회적으로(사람들이 인정하는) 명예로운 죽음을 맞을 수 없게 되자, 개인적 차원에서의 명예를 추구한다. 그의 아들 곤베에 역시 사회적 차원에서 체면이 손상되었다고 느끼자, 개인적 차원에서의 명예회복을 노리고 상투를 잘라 선대 주군의 위패 앞에 바치는 돌출 행동을 한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행동은 사회에 맞서 자기 자신을—개인성을—드러내는 행위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대목은 이 모든 일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는 주군 다다토시의 ‘심정 묘사’다.

  

… 다다토시의 마음속에는 후계자인 아들 미쓰히사를 위해서 그들이 살아남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절실했다. 또 이런 사람들을 자신을 따라 죽게 하는 게 얼마나 잔혹한 일인지를 생각했다. 그러나 몸이 찢기는 듯한 아픔을 느끼면서도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허락한다”는 말을 한 것은, 달리 도리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22)

여기서 주군 다다토시는 ‘순사’라는 개념을 개인들 각각의 죽음으로 나누어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죽음에 대해 “몸이 찢기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그 자신, 죽음을 앞둔 상태이기도 하다). 순사는 일종의 사회 제도지만 그것이 구축되는 데 일조한 건 수많은 개인의 죽음들이다. 이렇게 보면 죽음 역시 사회적인 측면과 개인적인 측면을 지닌다. 물론 죽음이란 결국에는 당사자 개인이 오롯이 감당해야 하고 겪어야하는 사태겠지만, 누군가의 죽음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추모비를 세운다. 또한 (용산, 쌍용차의 경우에서 보듯) 죽음을 둘러싸고 상징 투쟁이 벌어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다른 한편 주목할 점은 모든 죽음 중에서도 자살에는 개인의 선택과 의지가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할복'이라는 자살 형식은 흥미로운 데가 있다. 할복은 겉보기에는 개인의 의지를 강조한다. 그러나 <아베 일족>에서 묘사되는 할복의 구체적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 배를 가르는 것은 일종의 퍼포먼스다. 결정적으로 숨통을 끊는 것은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동시에 확실히 죽이기 위해—뒤에서 할복자의 목을 베는, 뒷마무리담당 무사인 것이다. 요컨대 할복이란 개인의 의지와 사회적 요구가 이상적으로 합치된 죽음의 형식이라 하겠다.

 

그런데 아베 야이치에몬의 할복은 조금 다르다. 거기서는 개인의 의지가 보다 확실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으며, 그 스스로 배를 가르고 목을 베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누가 봐도 순사 자격이 있는 인물이었음에도, 순사를 허락받지 못했다. 왜 그만 다른 대우를 받은 걸까. 이에 대해 모리 오가이는 다음과 같이 암시를 남기고 있다.

  

처음 다다토시는 그저 그에게 반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뿐이었는데, 나중에 그가 스스로의 의지로 일한다는 것을 알고는 미워졌다. 그러나 현명한 다다토시는 야이치에몬을 미워하면서도, 그가 왜 그렇게 행동하게 된 건지 생각해보고, 결국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반대하는 버릇을 고쳐보려고 했지만 달이 흐르고 해가 지남에 따라 점차 고치기 어려워졌다. (30-31)

다다토시는 아베 야이치에몬을 미워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스스로의 의지로” 일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주어진 일만 수행하는 사회적 요구에 충실히 복무하는 개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주군에게 말씀드리고 할 일을 말씀드리지 않고”하는, “그러나 할 일은 정확하게 해서 비난할 여지가 없는”(30) 예외적 개인이었던 것이다.

 

'근대문학'의 한 특징이 ‘개인성’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베 일족>은, 모리 오가이가 옛 역사 이야기에서 개인성이 발현된 사례를 발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아베 일족>은 개인성이 드러나는 순간을 극히 절제된 표현으로 묘사한다. 독자는 작가의 암시를 쉽게 눈치챌 수 없다. 더군다나 등장인물 누구도 (예외적 개인이긴 할지언정) 영웅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대개 역사 속 인물들이 소설에 등장할 때면 초인적인 영웅이거나 온갖 미덕을 다 갖춘 성인처럼 묘사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모리 오가이의 독보적인 성취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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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 복수 3부작 박스세트 (복수는 나의 것 + 친절한 금자씨 + 올드보이, 7disc)
박찬욱 감독, 최민식 외 출연 / 엔터원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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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이영애 결혼 기념 재탕 리뷰 
 

  이런 영화를 볼 땐, 고개는 약간 쳐들고, 눈은 상대를 얕보듯 살짝 시선을 내리깔고, 다리는 외로 꼬고, 가볍게 의자 팔걸이에 걸쳐진 손은 이따금씩 생각났다는 듯 하늘하늘 흔들어 주는, 그런 자세로 봐야 하지 않을까, 하고 영화가 시작하기 전, 잠시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오프닝 시퀀스가 무지막지하게 아아띠스띡artistic하면서도 빤따아스띡fantastic하게 시작해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이제 와선 그런 생각도 드네요.




  박찬욱의 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영화는 삘이 좋았습니다. 평론가 출신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이에스에이>에서 ‘부치지 않은 편지’가 흐를 때, 완전히, 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많이, 매료되었습니다. 그가 찍은 또 다른 영화 제목이 <달은 해가 꾸는 꿈>이라는 사실을 알고 더욱 더 매료되었습니다. 달은, 해가 꾸는 꿈, 이라, 오호라, 과연, 그렇군. 나는 무릎을 탁 치며, 자리에서 분연히 일어나, 제자리에서 한바퀴 돌았습니다. 그 정도 예의는 갖춰야 할 것 같았습니다. 이 사람, 우리 시대의 거장이 될 것 같다. 그런 예감이 백열전구처럼 머리를 휘익 스쳤습니다. 요즘은 뭐 삼파장 램프가 대세입니다만.




  <복수는 나의 것>을 보고 나는 생각하기를, 우리 찬욱씨가(이제부터 찬욱씨라고 부르는 이유는,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금자가 제과점 청년에게 그냥 ‘금자씨’라고 부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일지도 모릅니다) 한국 영화에서 나타낼 수 있는 하나의 극단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하드보일드한 영상같으니라고... 그이 하드보일드한 영상들은 곧 쿨한 것과 일맥상통한 어떤 인상들을 나에게 심어주었고, 아아, 게다가 이 영화, 흥행에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흥행에 실패한 어떤 영화들은 쉽사리 컬트(숭배의 대상)의 반열에 오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찬욱씨의 최고의 영화로 꼽기로 해버렸습니다. 이 영화 왜 이렇게 잔인해, 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즐겨 한 마디 했습니다. <제이에스에이>보다 백 배 낫지 않냐? 나의 허영심은 이렇게 채워졌습니다.




  <올드 보이>는 지난 일 년간 하나의 현상, 이었습니다. 신드롬에 가까운 열풍이 이 영화를 둘러싸고 불었습니다. 흰색과 검은색, 그리고 보라색 위주로 물든(물론 핏빛은 제외하구요) 이 차가운 색감의 영화를 둘러싸고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는 것은, 어쩌면 찬욱씨의 운이 억세게 좋았던 것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누구와는 다르게 그의 사주는 엄청나게 좋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실, 솔직히, 그가 부럽습니다. 나는 찬욱씨가 부럽고, 부러운 나머지 약간 질투마저 납니다. 이번에 <금자씨>에서도 사실, 감탄을 많이 했습니다. 내가 언젠가 써먹을려고 생각해두었던 그런 설정들을 자유자재로, 그만의 스타일 속여 녹여, 구사하고 있는 그가 부러웠습니다. 이와이 순지의 영화 <스왈로우 테일 버터플라이>를 보면, 일본 경찰이 일본어를 못하는 사람을 통역을 통해 심문하고, 고문을 가하는 장면이 나오는 데요. 그런 설정을 언젠가 써먹어 봐야 겠다, 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이런, 이게 뭡니까. 우리 찬욱씨가...... 선수를 쳐 버리고 만 겁니다. 멋집니다.




  그의 영화를 두고, 의견이 분분한가 봅니다. 이건 사기다. 아니다. 이건 예술이다. 사기건 예술이건 간에, 아니, 그냥 사기라고 칩시다. 그렇다고 해도 이정도로만 치면, 충분히 용서할만하지 않을까요?




  사실, 나는 그의 스타일이 마음에 듭니다. 그는 확연히 스타일 위주입니다. 스타일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죠. 그게 무슨 스타일이냐구요? 아, 이거 참, 스타일 구기네, 이렇게 말할 때의 그 스타일하고는 약간 다른 그런 것이죠. 어떤 영화가 생각이 나네요. 부산의 깡패들이 나오는 조폭 영화의 대표작 이라 할 수 있는 영화인데, 거기서 주인공 깡패가 어렸을 때 친구였던 다른 조직의 깡패를 죽인 혐의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뭔가 수를 쓰면 빠져나갈 수도 있는데도 혐의를 순순히 인정하고 말죠. 왜 그랬느냐는 또 다른 친구의 질문에 그는 대답합니다. ‘쪽팔려서.’




  아아, 쪽팔려서. 명언입니다. 물론 위에 언급된 영화와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의 스타일입니다만, 어느덧 우리는 스타일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겁니다. 폼생폼사의 위대한 시기가 도래했습니다. 찬욱씨는 칸에서 상을 탈 수밖에 없는 그런 사주를 타고난 겁니다. 그는 위대한 시기에 걸맞는 사주를 타고나 이제 세계 속의 위대한 한국인 감독이 될 겁니다. 사실, <올드보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스타일의 예고편에 불과한 거죠. 그 이전으로 소급해 들어가 <복수는 나의 것>을 보죠. 거기에서 ‘스타일’은 아직 부차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증거로 우리는 송강호와 신하균이 연기하는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비록 신하균이 ‘녹색 머리의 벙어리’로 나온다 해도 말이죠. 신하균이 신장을 도둑맞고 텅 빈 폐건물에서 배가 갈린 채 홀로 뒹굴며 신음할 때, 배두나가 엽기적인 전기 고문을 받고 잔인하게 살해당할 때도, 우리는 최소한 얼굴을 찌푸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온갖 만화적(사실 만화에서 출발했으니 당연하겠지만)이고 엽기적이고 잔인한 설정들로 치장되어있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반윤리적이고 반도덕적인 반전과 주제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사악한 주제를 담고 있는 <올드 보이>도 사실 스타일적인 측면에서는 최민식의 ‘레게 파마’를 오버하는 부분은 별로 없습니다. 굳이 있다면 유지태가 쓸 데 없이 메뚜기 자세로 요가나 하는 정도? 허리가 무지 아팠다던데....... 말하자면 찬욱씨는 이 때만해도 선을 그을 줄 알았다는 거죠. 요기, 요기, 이 ‘레게 파마’ 이것까지가 선이야. 더 이상 넘어가지 말자구. 아아, 그러나, 어떡합니까, ‘레게 파마’ 그 자체로 센세이션인 것을. 아티스틱하고 판타스틱한 것을. 사람들은 열광하고 말았습니다. <올드 보이>에서 ‘진짜 주제’가 뭔지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스타일, 스타일이 중요합니다. 일찍이 왕가위가 보여준 것을, 타란티노가 보여준 것을 우리의 찬욱씨는 마치 애국이라도 하듯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 선보임으로써 우리 대중들의 환호와 외국의 유수한 평론가들의 갈채를 한번에 얻어버린 겁니다. 그의 사주가 궁금할 따름입니다. 그의 영화는 어느 덧 컬트의 수준을 가볍게 뛰어넘어 진정한 ‘숭배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금자씨>에서 찬욱씨는 또 다른 도약을 합니다. 그는 이제 아주 가볍게 우리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나풀나풀 날아다닙니다. 그의 사주가 궁금할뿐더러, 이제 그의 머릿속을 갈라서 헤집어 보고 싶은 욕망이 뭉클뭉클 솟아오를 지경입니다. 영화에서, 이영애가 ‘개새’ 비슷한 어떤 것을 끌고 가서 죽입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진짜로 빛이 나기도 합니다. 정말이지 스타일 죽이는 어떤 총을 만들어 준 사내는 팔에 정말이지 멋진 문신을 하고 있습니다. 보다 직접적으로, 이영애의 입을 빌려, 감독은 말합니다. ‘무조건 아름다워야 해.’ 그래서 한겨울에 얇디얇은 땡땡이 옷을 입고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설정도 해봅니다. 허무함을 바탕색으로 하고 있는 알록달록 퇴폐미가 하늘을 찌릅니다. 지하 하숙방은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얼룩무늬 벽지가 발라져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올드 보이>의 감금방도, 보라색 선물상자도, 그러했습니다만. 하지만 정말 마음에 드는 것은 20세 유괴범 금자를 취조하는 공간입니다. 그 공간은 지하 하숙방과 달리 엄청나게 사실적인 그런 공간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찬욱씨는 균형 감각도 뛰어난 것 같습니다. 자신의 넘치는 재능을 제어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인 겁니다. 살인이 마치 반상회처럼, 하나의 파티처럼 벌어지는 폐교의 교실이라는 공간도 그렇습니다. 아아, 생각하면 할수록, 입술사이로 감탄사만이 비어져 나옵니다. 찬욱씨의 장기랄 수 있는 스틸 사진을 연상케 하는 정지된 화면들 역시 여전히 놀랍습니다. 매우 일본적인 화면들이긴 하지만.




  두서 없이 늘어놓다 보니, 하고 싶은 말을 하나 빼 먹었네요. 요는, <금자씨>는 이야기적인 측면에서 찬욱씨의 이전 두 영화보다 더 설득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타일적인 측면에서는 훨씬 더 무책임하다는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혹시, 행간에서 읽었습니까? 하하...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몇십 년을 계획한, 그리고 복수가 성공하자 죽어버린 <올드 보이>의 유지태는 사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캐릭터입니다. 그래서 그는 마치 변명처럼 말해야 합니다. 모래알이든, 큰 돌이든 물에 가라앉는 것은 같다나요. ‘비범한 미친놈’이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아가는’ 데 급급한 ‘보통사람’에게 복수를 하는 어이없는 형국입니다. 그래서 15년간의 감금기간이 필요했던 겁니다. 복수란 대개 자신과 급이 같은 인물에 대해서 행할 수 있는 것이죠. 상대방이 모르는 복수는 복수가 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15년간 감금을 통해 ‘보통사람’은 ‘비범한’ 프로타고니스트로 업그레이드 되어야만 하는 겁니다. 걸출한 안타고니스트에 어울리는. 반면에, <금자씨>의 복수의 대상은 커다란 사회악이며 미친 정신병자입니다. 뭔가 따로 설정을 하지 않아도 복수를 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복수의 과정도 한 절대적인 개인에 의해 집전되지 않습니다. 금자씨는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은 주변 사람들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데서 비롯되는, 그럼으로써 더욱 돋보이는 그런 카리스마입니다. 영화의 전체 흐름을 관통하는 ‘금자씨의 복수’라는 하나의 중심적인 결을 타고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엮어집니다. 복수의 준비과정이 그렇게 이루어지고, 또한 복수의 실행과정이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영화의 구조가, 그리고 복수의 과정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나무와도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땅 속으로 넓게 퍼진 뿌리, 그리고 튼실한 몸통, 그리고 몸통 위로 아름답게 펼쳐진 가지와 이파리, 아아, 그것들이 알맞은 세기의 바람에 흩날린다고 생각해 보세요. 나는 탄성을 내지릅니다. 비닐에 고인 저 피, 아~ 아름다워라.




  문제는, ‘개새’를 비롯한, 스타일입니다. 사실, ‘개새’가 아닌 ‘개사람’인데, 그런 직유적인 이미지는 아무래도 좀 거친 느낌을 주죠. 구성의 세련됨에 비해 좀 거칠다 싶은 장면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습니다. ‘식탁 섹스’ 장면도 좀 거칠죠. 이름이 삐죽삐죽 삐져나오는 설정은 좋았습니다만. 웃음이 삐죽삐죽 비어져 나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왜 웃음이 나오느냐, 이 말이죠. 대다수의 관객은 또 함정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쓴웃음이 비어져 나오는데 쓴웃음인 대로 그냥 웃고 넘겨버리고 맙니다. 원래, 부르기가 무지하게 어색한 ‘생일 축가’를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서 어색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부르는 장면을 통해 찬욱씨는 결정적으로 입장 표명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보세요. 여러분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란 게 이래요. 이렇게도 뻘쭘하고 어색하게 살고 있는 거예요. 자, 내가 약간의 키치적인 수법들을 동원해 그걸 조금 비틀어 봤어요. 어때요, 충격적이라구요? 엽기적이라구요? 역겹다구요? 동의할 수 없다구요? 아주 약간 비틀어봤을 뿐인데요? 여러분이 평소에 생일 축가를 어떤 식으로 부르는 지 생각해 보세요. 어느 패밀리 레스토랑을 가면, 직원들이 우습기 짝이 없는 복장을 하고 불러준다는 그 생일 축가를 생각해 보세요. 어색해진 분위기를 감당 못하고 참석자 모두는 얼굴이 빨개지고 말죠. 어라, 어색하네? 왜 이래? 아냐, 이래선 안 돼. 급기야,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한바탕 어색한 웃음이 자리를 휩쓸고, 잠시 ‘천사가 지나가는 바람에 고요했던’ 자리엔 또 다시 명랑함과 즐거움이 깃들죠. 어색함은 어느새 잊혀지고 맙니다. 그것은 본질적인 게 아니니까요. 우리가 생일 파티 자리에 제격이라고 여겼던 게 아니니까요. 마찬가지로 우리는 <금자씨>를 보고 웃습니다. 웃음 한 구석에 불편함이 깃들어있습니다만 애써 무시합니다. 찬욱씨는 역시 멋져. 이젠 우리에게 웃음까지 선사하네. 이제 또 무슨 영화제에서 상을 탈려나? 그의 이름이 포털 싸이트의 검색어 순위에 오르고, 어느덧 정보의 바다는 박씨 천하가 됩니다. 박주영, 박지성, 박세리, 박찬호... 사실, <복수는 나의 것>이 나에게 훌륭했던 이유는, 영화를 보며 얼굴을 ‘마음껏’ 일그러뜨릴 수 있어서였습니다. <금자씨>에서는 미안하지만, 그게 안 됩니다. 몇몇 장면에서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어이가 없어서요. 그렇지만, 미안할 건 없겠죠? <금자씨>는 흥행가도를 질주하고 있고, 당분간 찬욱씨의 좋은 운도 계속될 것처럼 보이니까요.




  끝으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찬욱씨에 대한 질투심이 어려 있는 글입니다. 찬욱씨가 영화 첫 머리에서 금자씨의 입을 빌려 했던 충고를 받아들여, 이제 쓸 데 없는 질투는 그만두고 ‘나나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한 편, ‘금자씨’의 눈화장은 너무 심한 것이 아니었나, ‘금자야, 너 눈 화장이 그게 뭐니~’라는 최민식의 느끼한 한마디는 너무나도 시의 적절한 멘트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드는 것입니다.




  ‘찬욱씨, 거 스타일이 그게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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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키키 브라더스(CJ한국영화할인)
CJ 엔터테인먼트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와이키키 브라더스>

 

감독 임순례

출연 이얼, 황정민, 박원상, 오광록, 오지혜, 박해일, 문혜원

 

 

 

그새 시간이 많이 흘렀다. 엊그제 본 것 같은데 벌써 8년 전 영화다.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개봉한 2001년,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꿈 많은, 뭘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시절이었다. 문학이 좋았고, 음악이 좋았다. 이것들을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뭔가 그럴듯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그리 재미있지 않았던 것은. 영화의 주인공들은 삶에 찌들어 있었고 음악을 통해 뭔가 그럴듯한 일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게다가 꿈꾸는 것마저 할 수 없는, 아니 자발적으로 그만두어 버린 것 같았다. 답답하고 우울하고 청승맞고 구질구질했다. 밴드 멤버들이 하나둘 무너져가면서 그러한 느낌은 강화되었다. 강수가 대마초에 취해 불안한 웃음을 흘릴 때, 정석이 칼을 맞고 신경질적 발작을 일으킬 때 그랬다. 그리고 성인 주점에서 성우가 손님의 강요에 의해 벌거벗고 기타 연주를 하며 노래를 부를 때 그러한 느낌은 절정에 달했다.

 

왜 이런 비관적인 영화를 만든 걸까. 궁금했다. 2001년에 나는 이 영화가 꿈이 생활과 현실에 의해 압사당하는 필연적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짐했던 것 같다. 쉽게 압사당하지 않을 거라고.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왔을까? 아마도 치기였으리라.

 

생각해보면, (지금도 그렇지만) 몰락하는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에 매료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와 다자이 오사무가 좋았다. 만약 압사당한다 하더라도 그들처럼 압사당한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어떤 몰락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령 자신의 몰락에 대해 타인 혹은 사회 탓을 하면서 구차하게 불만을 늘어놓거나 하지 않는 몰락은 아름답다. 지하생활자나 다자이의 궤변과 수다가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최대한 삼가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독백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한다. 자신의 성격과 기질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가령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병든 인간이다. ... 아무래도 간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낙오자들의 변명이 아니다. 그렇게 여겨질 확률이 높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의 독백은 주관이 섞인 불만이나 자기 변명이 아니라 놀라운 자기 반성이다. 물론 일반적 의미에서의 반성과는 다르다. 일반적 의미의 반성이란, 그것을 수행함으로써 잘못과 오류를 뉘우치고 수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하생활자에게 반성은 자기 발전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는 결코 뉘우치지 않는다.

 

사실 변명이나 반성은 어떤 논리적 비약을 반드시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이지 않다. 나 자신의 개인적 몰락에 대한 원인으로 사회(타인)라는 심급을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회를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변명과 반성은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 둘 모두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자신이 기질과 사회의 요구가 불일치한 데서 찾는다. 단지 전자는 사회 탓을 더하고 후자는 자기 탓을 더한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지하생활자의 자기 반성이 변명도 일반적인 의미의 반성도 아닌 이유, 더불어 그가 낙오자가 아닌 이유는 자신의 기질에 대해 말할 뿐 사회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서 자신과 사회 모두를 객관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꿈을 지니고 있는 한, 그는 필연적으로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 낙오자가 되지 않으려면 세상과 타협하면서 꿈의 크기를 축소시켜야 한다. 그런데 꿈을 축소시키는 방법이 아무래도 기질상 서툰 이들이 있다. 그러면 말이 많아지고 불평과 불만으로 그 말을 채우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실은 그런 심정에서 소설을 썼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 첫머리의 "나는 병든 인간, 비열한 인간" 운운은 문자 그대로의 자기 고백으로 읽혀야 마땅할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은 몰락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개인의 내면과 당대 사회에서 진행되는 몰락을 객관화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방법도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취한 방법을 참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소설이 아니라 영화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펜이 아니라 단지 비춰지는 그대로를 포착할 뿐인 카메라를 도구로 삼는 영화는 소설과 달리 내면을 보여줄 수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많은 영화들은 내면을 보여주는 척한다. 할리우드에서라면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전형적 실패담으로 만들었을 확률이 높다. 꿈을 버리지 않은 이들이 세상에 도전하다 처참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영화 말미에 희미하지만 분명한 희망을 남기는 식으로 말이다. '너희들의 도전은 비록 실패했을 망정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영화는 극장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정말 말 그대로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와이키키 브라더스>같은 영화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요새는 잘 나오지 않지만) 노래방에서 반쯤 벌거벗은 미녀들이 해변을 뛰어다니는 화면을 볼 때마다, (극히 드물겠지만) 버스를 운전하며 우는 마을버스 기사 아저씨를 볼 때마다, 이 영화는 다시 떠오를 것이다. 혹은 사는 게 힘들어 울고 싶을 때 이 영화는 다시 떠오를 것이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어설프다. 아름답게 몰락하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 아직도 믿는다. 그 방법에 대해 자못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틀렸다. 아름답게 몰락하는 방법 따윈 없다. 물론 아름답게 사는 방법도 없다. 삶도 세상은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이 말에 대해서는 섣부른 단정이라며 동의하지 않을 이도 많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에 깃들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꿈은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정짓고 절망하는 대신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굳이 삶과 세상을 아름다움과 연결시키려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 한번쯤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태도에는 세상에 대한 불만과 불평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닌가? '아름다움은 우리 주변 사소한 것들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불만과 불평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포기하지 않는 꿈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 말함으로써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꿈을 포기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정말이지 객관적으로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아름다움은 사소함 속에 깃들어 있다'라는 믿음이 얼마나 순진한 것인지를 정확하게 짚어주고 있는 영화라고도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성우가 늦은 오후 좁은 하숙방에서 작곡을 할 때, 개장 전의 업소에서 혼자 노래를 부를 때(그리고 그것을 인희가 지켜보고 있을 때)이다. 이 장면들을 통해 관객들은 성우가 꿈을 버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안도한다. 그러나 이 장면들에 이어지는 장면은 그러한 안도감에 균열을 낸다. 순간의 아름다움은 피칠갑한 정석의 난입과 뒤이은 발작에 의해, 친구 수철의 죽음을 알리는 문자에 의해 파괴된다.

 

관객이 영화에 기대하는 역할--즉 세상은 그래도 아름답다라는 환상을 부여하는 것--을 완전히 배반하는 이러한 장면 전개는 아마도 의도적인 것이리라. 그러나 만약 영화가 여기서 그쳐버렸다면 나는 실망했을 것이다. 영화 역시 답답하고 우울하고 청승맞고 구질구질한 영화에 그쳐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영화는 예상치 못한 순간 비관의 정서를 탈피한다. 그것도 극도로 답답하고 우울하고 청승맞고 구질구질한 상황에서 말이다. 

 

노래방에서 탈의를 강요당한 성우가 노래를 부르다 화면을 응시하면, 나체로 테이블 위에서 춤을 추는 남녀가 희미하게 보이고, 화면 속에는 비키니를 입은 금발 미녀가 해변을 뛰어다니고 있다. 그런데 그 화면은 곧 어린 시절의 성우와 친구들 장면으로 바뀐다.

 

여기서 성우는 현실도피를 하고 있지도 (만약 현실도피라면 회상 장면이 이어졌을 것이다), 꿈을 이루지 못한 자신의 인생을 회한이라는 정서로 물들이고 있지도 않다. (영화 속 다른 인물들이 "우리/내가 왜 이렇게 됐지?"라고 말하는 반면, 성우는 한번도 그런 말을 하고 있지 않다.) 나체일지언정, 노래에는 관심도 없는 속물들 사이에서일지언정, 그는 어쨌든 지금도 계속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 때 진리라고 믿어왔던 것을, 숭고한 것으로 여겼던 것을 쉽게 내던지는 데 익숙하다. 적어도 현실에,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그렇게 말하고, 또 그런 말을 듣고 버럭 화를 냈던 이들도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말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술이라도 취했다면 거기에 (아무도 믿지 않을, 그 말을 하는 자신도 믿지 않을) 기나긴 변명들이 덧붙는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다만 그런 것이 부질없는 짓임을 나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8년 만에 다시 보면서 얼마간 깨닫게 되었다.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취해있을 시간에 살아있으라. 말할 시간에 연주하라. 현실 탓을 하면서 꿈을 버리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몰두하는 대신 꿈과 관련된 일을 단 한 조각이라도 실행에 옮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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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상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8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8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죄와 벌>을 쓸 당시, '아마도' 노름 빚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방탕한 행동과 그 일의 근본적 원인이랄 수 있는 내면의 탐욕과 방종은 가린 채, 초인에 관한 개똥철학을 내놓는다. 그는 물론 그 스스로의 입으로 직접 그 개똥철학을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철학은 소설 속 등장인물을 통해 설파된다. 이는 그의 간교함 또는 소심함의 소치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그를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라스콜리니코프라는 이름을 지닌 소설 속 등장인물은 얼마 간의 돈을 얻기 위해 짐승같은 전당포 노파를 죽인다. 그는 명백한 살인범이지만, 그가 살인을 저지른 논리는 꽤나 '매혹적인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니체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데... (흐음- 니체라... 니체를 들먹거려 나 자신의 저급한 매혹됨을 얼마 간이나마 숨겨보자는 속셈, 그래 인정한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던 라스콜리니코프를 사로잡은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인간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민망한 전당포 노파 같은 인간, 그리고 인간을 위한, 나아가 인류를 위한 어떤 위대한 철학을 지닌 젊은 청년 중 누구에게 더 돈이, 아니 한 끼의 따뜻한 식사가, 아픈 어머니를 위한 약값과 입원비가 필요한가? 누가 더 살 가치가 있는 것일까? 깊게 생각할 것도 없다. 대답은 뻔한 것이다. 생명은 모두 소중한 것이니까, 라는 개똥철학 앞에서라면 말이다.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을 때, 그것이 쓰여진 19세기 중반이 부르주아 문화가 정점을 지나 타락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역설적으로 타락이 진행되고 있던 바로 그 순간들이 정점이었다) 시기라는 점을 적극 고려해야 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보들레르는 그러한 타락을 맨 먼저 감지한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은 문화의 중심지인 파리 출신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문화적으로 변두리에 속하는 러시아 출신이었지만 이런 차이는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이 활동하던 때보다 대략 50여년 후의 릴케가 <말테의 수기> 첫 머리에서 적절히 묘사하고 있듯이, 도시란 그 본질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차이는 '파리', 그리고 '뻬쩨르부르그'라는 이름 뿐일지도 모른다. 도시에서, '이윤추구'라는 동기 이외에 서로 같은 경험이라곤 단 하나도 공유하지 않은 온갖 사람들이 모인 도시에서, 도스토예프스키와 보들레르는 정신적, 육체적 타락상을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목격할 수도, 또 그들 스스로 경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목격한 바와 경험한 바를 '객관화'하여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인 이들, 소위 작가라는 이들이, 부르주아 문화의 몰락을 감지하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19세기의 문학이란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이보게, 지금 우리 가라앉고 있잖나!" 그렇다고 해도 문학 앞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있을 것이다. 첫째, 몰락의 핵심 요소를 찾아내는 것. 둘째, 문학이 몰락에 대응하는 독특한 방식을 파악하는 것.

 

  작가는(혹은 문학이라는 추상명사는) 시대를 초월하려는 의지를 가진 자(것)이면서 동시에 '시대의 소산'이라고 말한다면 꽤나 일반적인 진술에 속할 것이지만 이 일반적 역설을 가만히 곱씹어 볼 필요는 있으리라.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이 어떤 위대한 통찰이라기보다 끈질긴 자기변명이라고 생각한다. 혹여 (니체의 '초인'을 들먹이면서) '초월에의 의지'에 방점을 둔다고 하더라도,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은 '무모한 꿈' 같은 것이다. 그는 스스로 살인을 저지를 만한 인물을 결코 아니었을 터, 그에게 필요한 것은 칼이나 도끼가 아니라 '종이paper'였다. 자신의 욕망을 마음대로 그려낼 수 있는 종이 말이다. '시대의 소산'이라는 측면에 방점을 둔다면, 그의 문학은 몰락에 대한 '(소극적 의미에서) 증언'과 '(적극적 의미에서) 반응'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자체 몰락을 촉진하고 또 피드백하는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인간의 도덕적 몰락을 매혹적으로 묘사할 줄 알았다. 이것이 라스콜리니코프의 도끼질을 매혹적이라 느끼는 근본적 이유다. 그 결과, 그의 소설에서 이를테면 '몰락에 대한 극복 의지'를 발견하기란 힘들게 되고 만다. 반대로 그는 몰락 그 자체의 과정에 집중한다. 몰락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것(물론 이는 이후의 월터 페이터, 오스카 와일드 등 유미주의자들에게서 두드러지는 점일 터이나), 즉 몰락의 문학적 형상화는 몰락을 역사의 당위로 여기게 만든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음미해볼 만한 점은 (당연하게도!) 아직도 인간의 몰락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문학의 죽음 내지는 종언'이 심심치 않게 회자됨에도 불구, 문학이 헤엄치고 뛰놀 물 웅덩이는 아직 깊고 넓다. 그것은 더러운 물 웅덩이가 아니라 넓고 깊고 푸른 대양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몰락'을 의식적으로 인식하는 한(그 몰락을 애도하든 반기든, 혹은 완전히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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