댈러웨이 부인 세계문학의 숲 23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태동 옮김 / 시공사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꽃양배추보다 사람을 더 좋아해요(I prefer men to cauliflowers)”



그녀는 빅토리아 거리를 가로질러 건너며 인간이 너무도 어리석은 바보처럼 느껴졌다. 무엇 때문에 인생을 그렇게 사랑하고, 어떻게 그런 관점으로 인생을 보고, 여전히 꿈을 꾸는 걸까. 인생을 쌓아 올렸다가 허물어뜨리면서도 매 순간 왜 또 다시 지으려는 걸까. 이유는 오직 하늘만이 알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누추한 여인들, (자신들의 몰락을 마시며) 문 앞 계단에 주저앉아 있는 가장 비참하고 절망적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인생을 사랑한다. 그건 의회의 법령으로도 다스릴 수 없을 거라고 클라리사는 확신했다. 사람들의 저 눈빛 속에, 활기찬 몸놀림 속에, 터벅터벅 걷는 무거운 발걸음 속에, 고함과 아우성치는 소리 속에, 마차들, 자동차들, 버스들, 화물차들, 발을 끌고 몸을 흔들며 지나가는 샌드위치맨들, 취주 악대들, 손풍금 소리, 승리에 넘친 환호, 머리 위를 지나는 비행기가 내는 기이하고도 높은 소음 속에 그녀가 사랑하는 것이 있었다. 인생이, 런던이, 6월의 이순간이 있었다.


그녀는 이제 세상 누구에 대해서도 그들이 이렇다든가 저렇다든가 말하지 않을 것이다. 아주 젊은, 그러면서도 말할 수 없이 나이가 든 기분이었다. 그녀는 칼처럼 모든 것을 저미고 지나가지만, 그러면서도 밖에서 구경을 하는 듯했다. […] 단 하루라도 산다는 것은 아주, 아주 위험한 일이라는 느낌이 떠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이 영리하다거나 보통 사람들과 그리 다르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가정교사 대니얼스 양이 가르쳐 준 몇 가지 안 되는 지식으로 어떻게 인생을 헤쳐 올 수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하나도 아는 것이 없었다. […] 그런데도 그 모든 것이, 지나가는 택시들이,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피터에 대해, 또 그녀 자신이 대해서도, 나는 이렇다, 나는 저렇다고 말하지 않으리라.

-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극초반부 (번역은 시공사판, 열린책들판을 섞어 인용)

 
-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부터 울프는, 이런 서술들을 독자의 눈앞에 펼쳐놓는다.

"왜 사느냐?" Why live? (시공사, 148) 라는 물음.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이 물음에 천착한다. 이는 클라리사와 셉티머스를 비롯, 작품 속 모든 인물이 공유하는 질문이다. 사람은 대체 왜 살까? 클라리사는 거리에서 마주친 비참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 속에는 '(내) 인생이 무가치하다'는 느낌이 자리잡고 있다. 이를 직설적으로 말하면 곧 '죽고 싶다'는 욕망이기도 하다. 울프는 사실상 같은 의미인 말을 두 주인공, 클라리사와 셉티머스에게 분배해서 서로 다른 화법으로 말하게 한다.

그 와중에 '식물이냐 사람이냐' 라는 오래된 질문이 툭 던져진다.

그렇다. 사실 오래된 질문이고 그만큼 진부한 질문이다. 답도 뻔하고(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노래도 있지 않나). 물론 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질문을 던지고 풀어나가는 울프의 방식이란...! 결코 뻔하지 않다. 어떻게 뻔해지지 않느냐면 울프는 이 질문을 확고한 인간 혐오(=자기 혐오)를 바탕에 깐 채로(한 순간도 그걸 거둬들이지 않는다) 던지고 또 풀어나가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느낄 때, 인간이 싫어질 때 당신은 어느 쪽을 찾는가. 식물인가 사람인가. 식물과 사람 중 당신은 어느 쪽을 더, 혹은 덜 신뢰하는가. 소설 내내 이 질문은 변주, 반복된다. 전무후무한 식물과 인간의 대결이 펼쳐진다. 이 대결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현란하게 펼쳐지는 한편, 가장 훌륭한 태피스트리를 한땀 한땀 공들여 짠 중세 장인이 발휘했을 수작업적 섬세함을 동반한다.

-
콜리플라워. 버지니아 울프는 아마 콜리플라워를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게 아닐까. 나도 콜리플라워 좋아하는데, 그냥 막연한 좋음인 것이 아쉽다. 울프가 좋아한 방식으로 콜리플라워를 좋아해보고 싶다(울프는 좋아한 것으로 단정).

-
울프는 삶을 혐오하고 인간을 혐오한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자기를 사랑하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각자 나름나름의 방식으로 자기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삶에 대한 혐오와 사랑. 자기 자신의 삶을 두고 한 사람의 내부에 존재하는 이 두 양립불가능한 감정을 그녀는 다룬다. 극히 섬세하고 예리하며 정확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또 묘사한다. 그런데 그 둘을 조화시키거나 중화시키거나 상쇄시키지는 못한다. 둘 사이의 균형점을 찾지도 못한다. 후자로 전자를 극복하지도 못한다. 극복한 '척'도 못한다(아예 생각조차 않는다).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지도(슬몃 끼워넣지도) 않는다. 자기 안에 있는 혐오와 사랑(및 그 양극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정직하고 또 정직할 뿐이다. 


이 정직함이 아마도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울프의 소설을 읽고, 사람이 너무 정직해서는 안 돼... 그럼 죽어...(사람들이 항상 하는 말이다) 라고 결론짓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도 있다. 빨리 결론짓고 싶은 유혹. 이 유혹에는 나도 쉽게 넘어가곤 한다. 쉽게 넘어가는 이유는 나도 살아야하기 때문이고 살고 싶기 때문이다. 


누구든 살아가는 데 환상과 자기 기만이 필요하다. 삶에, 인간의 존재에 이런저런 이유나 목적이나 의의를 갖다붙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설정한, 아니 대개는 어디서 급하게(=그만큼 절박해서) 빌려다 갖다 붙인 삶의 이유나 목적이나 의의가 환상과 자기기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외면하거나 아닌 척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부정직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울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철저하게 정직하다. 거짓과 기만, 시기와 질투, 원한과 정신 승리, 냉소와 혐오가 판치는 이 시대에, 이타주의와 공동체주의(인간은 더불어 살아야 한다!)를 외쳐대는 개인주의(인생은 어차피 혼자다!)의 시대에 '철저하게 정직한' 태도란 무엇일까, 그런 태도란 내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어떤 실제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나는 누구인가. 이 세계가 거짓, 기만, 시기, 질투, 원한, 정신승리(값싼 우월감), 냉소, 혐오로 가득 차 있다면 '그러한 세계의 일부'인 '나'는 무엇이며 어떤 존재인가. 나는 이 세계를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 맺고 살아야 하는가. 세계와 인간에 대한 나의 혐오는 정당한가.


삶이 지긋지긋하다고 종종 느낀다면, 그게 이 세계에 당연한 듯 만연해 있는 거짓과 기만 때문이라 생각한다면, 그래서 질식할 것 같은 느낌에 종종 시달린다면, 그러다 '스스로에 대해 철저하게 정직한 태도'란 대체 무엇일까, 과연 가능할까 하는 것들이 문득 궁금해졌다면 여러분은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읽어볼 수 있다.


-
"Are you honest?" 
이것은 <햄릿>에서 햄릿이 오필리어에게 하는 대사다.
"당신은 순결하오?"로 번역되기도 하는 이 대사는 "당신은 정직하오?"라는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정직함이 햄릿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듯 울프에게도 그랬던 것 같다. 

울프는 셰익스피어 빠이기도 하다. 
그녀는 작품 곳곳에서 셰익스피어를 인용하며 열심히 팬 인증을 한다.


-
판본들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면, 
한국어 번역 판본은 시공사, 열린책들, 책읽는수요일 출판사 세 종을 참고했다.
'어떤 게 좋다'라고 말할 수 없다. 각각 오역이 있고, 잘 된 부분도 있어서다.

잘 읽히기로는 시공사판이 잘 읽히는데 가독성을 살리느라 원문의 어순을 많이 바꿔놓은 게 아쉽다.

이 소설에서는 울프가 쓴 원문 어순이 뉘앙스상 상당히 중요하기에 한층 아쉽다. 
그래도 초반 장벽을 넘어설 수 있게 해준 번역이라는 점에서 가치는 있다.
울프의 소설을 두 장 이상 넘길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건 분명 이 번역본 덕택이었다.
울프 초심자나 문학비전공자는 시공사판으로 읽는 게 나을 듯하다. 
(물론 가독성을 살리느라 원문의 뉘앙스가 많이 훼손되었고 몇 군데 중요한 오역이 있다는 점을 알고 있을 필요는 있다.)
한편, 해설은 어려운데 괜찮다.
일반 독자가 접하기 힘든 석학의 논문을 번역해서 실어두었다는 건 큰 장점이다.

열린책들판은 원문의 어순을 잘 살려놓았다. 
하지만 가뜩이나 줄거리 및 상황 파악이 어려운 소설이라 초반에 잘 안 읽힌다는 게 문제다. 
그러나 울프의 서술 방식에 충실하려 노력한 덕분에 원문의 뉘앙스는 살아 있다. 
열린책들 해설도 괜찮다. 상당히 알차서 작품 이해에 도움 된다.
번역자 정말 수고 많으셨겠다, 싶다.

책읽는수요일판은 초반에 오역이 상당히 눈에 띄어 접어 두었는데,
모임 참가하신 분의 말에 따르면 후반부 번역은 괜찮다고 한다.
울프의 팬이고 <댈러웨이 부인>을 각별히 좋아한다면 이 판본도 읽어보면 좋겠다 싶다.
번역본에 따라 작품이 상당히 다르게 읽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좀 시간이 지나고 나서 이 판본으로도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
원문은 펭귄클래식 페이페백과 캠브리지 대학에서 펴낸 주석판을 참조했다. 
캠브리지판은 대학 도서관에 다른 책을 빌리러 갔다가 우연히 발견하고 빌렸는데 
본문 분량에 맞먹는 주석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정말 시시콜콜한 사실들까지 언급되어 있다.

소설 속 인물이 실제 울프의 지인 중 누구를 모티프로 한 것인지가 설명되어 있고,

울프가 쓴 소설 속 표현들, 비유들에 대해서도 그와 연관되는 영문학(사)적 맥락들을 짚어주며 어디서 끌어온 것인지도 상세히 설명한다.

울프가 반복, 강조해서 쓰는 특정 표현들이 소설 전체에서 몇 번 반복되는지도 정리되어 있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많이 받았다.


#막독19기 세번째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필경사 바틀비 - 미국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허먼 멜빌 외 지음, 한기욱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필경사 바틀비>의 마지막 대목에는 이런 성경 구절이 나온다. 

"제왕과 만조백관과 함께 잠들었소."

걷고 있는데 이 구절이 생각났고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왜 울컥했을까 곰곰 생각해봤다.


-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헤밍웨이의 소설 제목으로 유명한 구절인데, 사실 이 구절은 18세기 영국 시인 존 던의 시 <묵상록>이 출처다. 

이 구절을 둘러싼 전후 맥락은 다음과 같다.


[자체로서 일체적인 완전함을 갖춘 섬과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 본체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다른 사람의 죽음은 나를 축소시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에 속해 있는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종(弔鐘)이 누구를 위해 울리는지 알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당신을 위해 울리는 겁니다.]


-
'죽음'으로 모든 인간(인류)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
그러므로 누구를 위해 조종이 울리는지 알려고 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의 죽음은(그것이 누구든) '나'를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
<필경사 바틀비>의 마지막 장면에서 변호사는 바틀비의 사망 사실을 알고 저도 모르게 저 인식에 도달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마지막에 변호사가 떠올린 성경 구절 "제왕과 만조백관과 함께 잠들었소"(욥기 3장 14절)는 바틀비의 죽음에 바치는 '추도사'다.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삶이고 죽음이지만 그래도 추도의 예를 갖추는 것이다. 


-
추도사. 

각각의 죽음에는 그에 합당한 추도사가 있어야 한다. 
어떤 사회의 어떤 죽음에 합당한 추도사가 없다면 만들어내야 한다.
어떤 세력이 추도를 거부한다면 종용해야 한다. 
어떤 사회가 합당한 추도의 방식을 찾지 못하고, 찾는 데는 관심도 없고, 오히려 추도를 지긋지긋해하는 분위기라면 그 사회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사회다. 

그런 상황, 그런 분위기에서 멜빌과 같은 작가들은 합당한 추도사를 만들어내고 예를 갖추는 일을 묵묵히 해왔다. 

멋지다. 멜빌. 


-
가만 생각해보면 멜빌 소설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는 '모든 사람은 (무엇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틀비> 뿐만 아니라 <모비 딕>도 그렇다. 퀴퀘그와의 '진정한 우정'을 이야기한 챕터도 정말 흥미롭거니와 클라이맥스는 포획한 향유고래로 선원들이 경뇌유를 만드는 작업 장면을 그린 후반의 한 챕터다. <모비 딕>을 보면 멜빌이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윤리적 공통점을 찾으려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모두 혼자'이기도 하다. 가령 에이해브 선장 같은 독불장군은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절대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흰고래를 증오하는데, 그건 뭐라도 증오해야 할 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증오는 '사람들과의 연결을 끊고 고립된'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 내지 자괴감이었을 텐데, 그것을 투사할 외부의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에이해브 선장 같은 면모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우리는 모두 에이해브 선장들이 아닌가.


-

사람들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공통 요소를 찾던 멜빌은, (<바틀비>에서 보듯) 결국 그것이 '죽음'이라 말하기에 이른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 외에 어떠한 윤리적 공통점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곰곰 생각해보면 무척 슬프고도 절망적인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괴한 라디오 존 치버 단편선집 1
존 치버 지음, 황보석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교외의 체호프


‘체호프의 후예’라고 불리는 작가들이 있다. 레이먼드 카버는 '미국의 체호프’로 불리고, 앨리스 먼로는 '캐나다의 체호프’라 불린다(무성의한 명명이다…) 그 밖에 윌리엄 트레버, 존 치버가 있다. 


이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체호프의 후예라고 불리는 이유는 뭘까? 단편을 주로 써서라고 할 수도 있겠고,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비슷해서, 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설명은 추상적이어서 와닿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가 생각해볼 점은 하나 또 있다.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체호프식 관점과 태도가 오늘날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어떤 면에서 도움이 되는가―어떤 위안이나 교훈, 깨달음을 주는가―하는 것이다. 


먼저 체호프의 관점을 복습해보자. 체호프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 <상자 속의 사나이>의 제목은 체호프가 인간과 세계를 대하는 관점을 압축적으로 말해준다. 즉 체호프는 인간을 ‘상자 속 존재’로 본다. 사람들은 각자의 상자 속에서 세상과 그 세상을 이루는 타인들을 바라보며, 평생 이 상자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인간관이 의미하는 세계관은 이 세계에서 서로 간의 진정한 대화와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들 각자 입장과 사정이 다르고,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이 다르며, ‘뭣이 중헌지’ 가치의 우선 순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세계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가족 사이에서도, 가장 친밀한 소우주라 할 수 있는 부모와 자식 사이, 혹은 형제 사이, 사랑으로 맺어진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서도 대화와 소통, 진정한 상호 이해는 불가능하다. 카버와 먼로, 치버의 소설들은 이 점을 보여준다. 


간혹 자기 자신을 한 걸음 떨어져서 보게 될 때가, 스스로를 객관적 관점으로 바라보게 될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의 입장과 진리와 가치관이 얼마나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인 것이었는지, 고집, 변덕, 질투에 다름 아닌 것이었는지를 문득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런 인식이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사랑은 변한다하더라도)”. 이것은 인간에 대한 체호프의 또 다른 명제다. 정리하자면, 체호프는 인간은 상자 속 존재이며, 그러한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봤다. 결코 긍정적인 내용은 아닌(우리 삶에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이 명제, 그리고 이 명제가 녹아 들어 있는 ‘체호프의 후예들’의 작품들을 어떻게 읽고 받아들이냐는 각자의 몫이 되겠다.  


-

존 치버는 ‘교외의 체호프’로 불린다. 이러한 별명이 붙은 이유는 그가 미국 중산층의 삶과 그 삶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교외’를 자주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외가 과연 어떤 공간인지 그 속성을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교외는 여름 한철 또는 겨울 한철을 보내는 휴양지다. 즉 일상에서 분리된 곳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일상에서 분리되기를 바라는 마음(욕망)’이 투영된 장소이다. 그곳은 형제들이 유지비를 분담하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집일 수도 있고(<참담한 작별>), “교통사고와 빈곤,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마련하려는 안전한 오두막일 수도 있다(<그저 그런 날>). 또 누군가는 몇 년 전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던 곳”을 찾기도 하며(<하틀리 가족>), 여름에만 시골집에 살며 농부 생활을 즐기려는 뉴요커도 있다(<여름 농부>). 


요컨대 교외라는 장소는 각자의 바람 혹은 욕망이 투영된 곳이며, 각자의 결핍을 (상상적·일시적으로나마) 메워주는 곳이다. '어딘가 돌아갈 곳이 있다,’ ‘(이 복잡한 일들을 떠나) 마음 놓고 쉴 곳이 있다’는 사실(실은 믿음)이 인물들에게는 큰 위안이 된다. 이곳에서 인물들은 일상의 피곤, 일상의 트러블을 잊고서 ‘휴식의 시간’을 갖고자 한다. 


“그 침울함에서 빠져나오라고. 거기에서 빠져나와. 지금은 그저 여름날일 뿐이야. 너는 너 자신의 시간을 망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시간을 망치고 있어. 우리에게는 휴가가 필요해, 티프티. [...] 우리 모두가 다 그래. 그런데 너는 모든 일을 긴장되고 불쾌하게 만들고 있어.” (<참담한 작별>, 49)


간이역에서부터 힘스 북쪽에 있는 그들의 농장까지 차를 몰아가는 동안 폴과 버지니아의 대화는 소박한 농장과 서로에 대한 애정에 국한되었고, 그 이상의 것, 수지 타산이나 전쟁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화창한 아침에 오픈카를 타고 가는 시간을 망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일부러 피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아래층 샤워 배수관이 새고 있다고, 7월 어느 아침에 버지니아는 폴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이야기했다. 시누이인 엘렌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마스턴 부부가 점심을 먹으러 들렀었고, 그리고 이제 아이들이 애완동물을 가져야 할 때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그녀가 미리 생각을 해보고 하는 이야기였다. (<여름 농부>, 214-215) 


물론 이 휴식은 거짓과 가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가령 <참담한 작별>에서 아버지의 별장은 의도적으로 낡은 분위기를 내도록 지어진 것이다. 또 더 중요하게는 휴양지에서는 대화가 국한된다. 서로의 ‘즐거운 시간’을 망치지 않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이 있고 해도 되는 말들이 있다. 휴가지에서 하는 말과 행동들은 ‘행복’이나 ‘즐거움’, ‘안정된 삶’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나무’가 그 ‘뿌리’를 드러낸다(<참담한 작별>의 결말. '패밀리 트리'라는 상징을 지녔을 나무 뿌리가 상징적 '가족 살해'의 도구로 쓰이는 이 소설의 결말은 무척 인상적이다). 


교외는 거짓과 가식의 공간이다. 



관리자들

교외-휴양지는 ‘(날씨가) 가장 좋을 때’를 골라 ‘즐기기 위해’ 찾는 곳이다. 그러나 그 ‘가장 좋음’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요리사, 정원사, 보모 등 ‘관리자들’이 그들이다. <그저 그런 날>에서 스웨덴 출신 요리사 그레타와 아일랜드 출신 하녀 아그네스가 주방에서 나누는 대화, 정원사 닐스 런드의 항의는 휴가지의 일상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관리자들의 존재와 노동을 드러낸다. 


또한 이 ‘일상 관리자들’은 시골 별장 말고 도시에도 존재하는데, 엘리베이터 운전수인 찰리,(<가난한 자들에게는 슬픈 날, 크리스마스>), 클랜시(<바벨탑의 클랜시>), 아파트 관리인 체스터(<아파트 관리인>)와 같은 사람들이 그들이다. 여러 세대가 모여 사는 거대한 주거 공간에서 이들은 일종의 부품처럼 존재한다. 오직 크리스마스와 같은 특별한 날이나, 누군가 불행에 빠져 자살을 하려드는 날, 몰락한 한 가구가 이사를 가는 날에만 이들은 대화 상대가 될 수 있다. 이 두 작품은 또한 동정심의 실체와 한계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삶의 축’으로서의 헛된 환상

존 치버의 소설들은 인물이 어디서 어디로 가느냐를 두고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즉 도시에서 시골로 가는 사람들(주로 중산층)이 있고,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다. 덧붙여 세 번째 분류도 가능한데, 그건 (도시의 아파트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다룬 작품들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분류에 속하는 작품들의 주인공들은 가난하거나 몰락 직전의 상황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다.  


존 치버의 소설들은 인간 욕망의 헛됨을 파헤치고 풍자한다. <부서진 꿈들의 도시>나 <황금 단지>는 성공과 부에 대한 환상이 어떻게 깨지는지를 다룬다. 부와 성공에 대한 환상은 물론 헛된 것이고, 그러니 독자들에게는 그런 환상에 매달린 인물들의 모습이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치버는 모든 인간에겐 어떤 식으로든 매달릴 환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서술한다. 헛됨의 농도는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모든 이이게는 환상이 필요하다. 환상의 다른 이름은 꿈-이상이며, 그것은 곧 한 사람의 세계관의 축이자 삶을 지탱하는 축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부와 성공에 대한 환상은 사회가 주조해낸 환상이라는 점에서 주체적인 꿈-이상과는 다르다. 하지만 이 둘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분리할 수도 없다. <부서진 꿈들의 도시>와 같은 작품은 희곡 작업이라는 ‘주체적인 꿈’과 부와 성공이라는 ‘헛된 환상’이 서로 긴밀히 얽힌 채로 한 사람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와 당신의 '가장 좋은 모습'

좀 더 복잡한 플롯을 가진 <서턴 플레이스 이야기>는 환상이 깨지면, 세계와 인간에 대한 믿음도 깨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오로지 치명적인 위험이라는 관점에서만 도시를 보았다. 하나하나의 맨홀 뚜껑, 움푹 꺼진 구덩이, 옥외 비상계단들이 음화 필름에서 명암이 역으로 강조되는 것처럼 한낮의 광휘보다도 더 두드러졌고 그는 센트럴파크의 사람들과 푸른 나무들이 불경스러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턴 플레이스 이야기>, 201)


이 소설에는 칵테일 파티가 일상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젊은 부부, 일요일의 미사가 중요한 보모 할리 부인이 등장한다. 젊은 부부에게는 칵테일 파티에서 ‘세련된 옷’을 입고 오는 손님들을 만나는 게 중요한 일상의 교류인데, 이 소설집 전체에서 파티나 옷에 대한 묘사들(특히 밍크나 모피 코트)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다. 왜냐하면 ‘파티 옷차림’이란 한 사람의 ‘가장 좋은 모습’이며, 그런 의미에서 ‘가장 좋을 때의 휴양지’와 의미상 상통하기 때문이다. 


휴양지를 방문한 중산층이 그 장소의 ‘가장 좋은 모습’만 볼 수 있는 것처럼, 파티장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가장 좋은 모습’만을 본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을 계속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 삶은 가장 좋은 모습이 가리고 있는 이면의 어떤 것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 이면의 모습, 각자가 품고 살아가는 비밀이 겉으로 드러났을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가령 클래식을 듣기 위해 거금을 들여 산 라디오가 이웃의 내밀한 불행과 비밀을 들려주기 시작할 때(<기괴한 라디오>), 우리는 그러한 타인들의 삶에 대해, 그리고 (그와 별로 다르지 않은)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이 브래드버리 - 태양의 황금 사과 외 31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8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는 1920년에 태어나서 2012년에 타계한 SF, 판타지 작가다. 최근까지 살아 있었던 셈. 2012년에 이 작가가 타계했을 때,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추도사를 하기도 했다고. 오바마 역시 레이 브래드버리의 팬이었던 셈. 



레이 브래드버리는 대개 'SF 작가’라 불리긴 하는데, 우리가 통상 이해하는 과학 소설(Science Fiction)로서 SF를 쓴 작가는 아니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작품들은 환상(판타지)적 색채, 동화적 색채가 짙다. 


SF를 썼지만 과학적 사실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쳐 나가는 식으로 썼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문장과 이미지가 매우 아름답다. (그래서 <멋진 신세계>로 유명한) 올더스 헉슬리 같은 작가는 레이 브래드버리를 ‘시인’이라 불렸다고. 또 미스터리, 공포(horror)에 해당하는 작품도 많이 썼기 때문에 ‘에드거 앨런 포의 후예’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들에는 ‘인간이 만든 어떤 것’(=새로운 발명품)이 거의 반드시 등장한다. <안개 고동>에서는 거대한 등대와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고동, <날틀>에서는 날틀(=비행기), <저 너머의 드넓은 세계>에서는 (편지를 쓸 수 있는) ‘문자’, <태양의 황금 사과>에서는 ‘태양 탐사 우주선’이 발명품에 해당한다. 또 다른 작품들에서는 '로켓', ‘발전소’, '인공 태양', ‘테마 파크’, ‘타임 머신’, 심지어 ‘운동화’ 등이 발명품으로 등장한다. 


말하자면 레이 브래드버리에게 인간은 무언가 새로운 것, 훌륭한 것을 만드는 존재다. 훌륭한 발명품은 세계를 변화시킨다. 인간의 잠재력을 끌어올려 인간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존재로 변모시킨다. 그런데 그는 이 새로운 발명품을 갖고 어떤 편리함이나 물질적 이득, 과학의 발전과 연관시키며 소설을 쓴 게 아니라 ‘감정’과 연관을 시킨다. 이게 이 작가의 특별한 점이다. 게다가 이때 ‘감정’이 꼭 인간의 감정인 것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안개 고동>에서는 거대한 등대와 고동이라는 발명품과 심해 괴물의 ‘기다림’과 ‘외로움’이 서로 연관되어 다뤄진다. 그는 감정이란 게 오직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존재들의 것이라고 본다. 이 세상, 이 지구와 우주가 인간만의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오직 이 점에서 보더라도 레이 브래드버리는 특별하다. 


-
<안개 고동>은 미국 교과서에도 실린 소설이라고 한다. 거대한 등대가 있고, 그 안에는 엄청나게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고동이 있다. 인간들이 만든 것이다. 이 고동 소리를 듣고 심해 괴물이 해안을 방문한다, 는 이야기. 이 심해 괴물의 정체는 정확히 알 수 없고, 아마도 공룡의 일종이 아닐까, 라고 막연히 추측을 하고 있는 상황. 작가는 이 막연함을 막연함 그대로 내버려둔다. 괴물의 정체를 정확히 밝히는 데는 별 관심을 쏟지 않는다. 괴물을 잡아다가 해부를 한다거나 유전자를 채취한다거나 하는 실험 계획 같은 건 소설에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대신에 작가는 소설 속 인물의 대화를 통해 이 괴물이 만약 멸종한 공룡 중 살아남은 한 마리라면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는 점에 관심을 쏟는다. 이게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심이고 관점이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그런 관점에서 공룡과 인간을, 그리고 그 두 생명체가 모두 존재했던 이 지구의 역사를 바라본다.


<안개 고동>은 모든 동료(?) 공룡들이 다 없어진 상태에서 심해에 100만년 동안 웅크리고 있다가 커다란 고동 소리를 듣고 그게 다른 공룡의 소리인 줄 알고 물 위로 나왔는데, 알고 보니 인간이 만든 고동의 소리였다… 라고 줄거리를 정리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되게 허무한 이야기고, 별 다른 스토리도 없는 이야기다. 그런데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얼마나 작고 유한한 존재인지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심해 괴물의 ‘100만년 동안의 기다림’을 ‘인류  역사(호모 사피엔스부터 계산해도 겨우 1만년)’ 와 비교하는 비교적 관점이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의식 표면으로 자연스레 부상(emerge)하듯 떠오른다.  


-

부하들은 그가 소리 높여 말하기를 기다렸다. 모든 서늘함과 흰색과 반갑고 상쾌한 날씨를 한데 그러모아, 마음속에 떠오른 단어를 입 밖에 내기를 기다렸다. 그들의 눈에, 선장이 입안에서 아이스크림 덩어리를 굴리듯 그 단어를 만들어 내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우리가 갈 수 있는 방향은 우주에서 단 하나밖에 없지.”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그들은 기다렸다. 빛에서 도망쳐 빠르게 차가운 어둠 속으로 움직이는 우주선에서, 그들은 기다렸다. 


“북으로.” 선장이 중얼거렸다. “북으로.”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함께 웃었다. 무더운 오후에 한 가닥 바람을 만난 사람들처럼. 

- <태양의 황금 사과>, 247.



단편 <태양의 황금 사과>의 마지막 장면이다.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서술이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태양의 황금 사과>도 겉보기엔 되게 허무맹랑하고 별 것 아닌 이야기다. 미래의 어느 시점, 태양 탐사선을 타고 일군의 탐사 대원들이 미션을 수행하러 태양에 가까이 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미션 내용은 태양을 한 컵 퍼내는 것.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면 점원들이 아이스크림을 한 스쿱 퍼내는데, 마치 그런 느낌으로 태양을 한 컵 퍼내서 갖고 오는 것—이것이 바로 태양 탐사 미션의 내용이다. 



왜 이런 미션을 수행하는 걸까? 이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을 아는 유일한 존재는 태양이며 태양에만 그 비밀이 숨어 있기 때문에. 게다가 재밌기도 하고. 여기까지 와서 술래잡기를 하며, 태양을 한 대 때리고 도망갈 수 있는 기회니까. 사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오직 작은 벌레 같은 인간들이 헛된 자존심 때문에, 사자의 콧등을 쏜 다음 그 입에서 도망치려고 시도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자기네가 해냈다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게 말이지! (<태양의 황금 사과>, 현대문학, 243-244) 



요컨대 재밌기 때문에, 태양을 한 대 때리고 도망갈 수 있는 기회니까, 라는 것. 별다른 이유는 없다. 인간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며, '해냈다'라고 한 마디 말할 수 있는 성취감 때문이다. 



온도조절기가 고장 나는 바람에 대원 한 명이 죽지만 태양 성분을 한 컵 퍼내는 데 성공한 후,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서 부하들은 선장의 말을 기다린다. 임무에 성공했으니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느냐고. 



선장은 곧바로 말을 하지 않고, “입안에서 아이스크림 덩어리를 굴리듯” 단어 하나를 만들어내어 중얼거린다. "북으로."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함께 웃는다. 무더운 오후에 한 가닥 바람을 만난 사람들처럼. 끝. 이게 전부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에서 인간들은 로켓을 만들어 우주로 발사하기도 하고, 거대한 등대나 비행기를 발명하기도 하며, 문자를 쓸 줄 아느냐 모르냐를 두고 서로를 질투하고 속상해하기도 한다. 성벽을 쌓고 전쟁을 일으켜 이웃 마을을 정복하기도 하며, 8일 간의 수명을 11일로 연장시키기 위해 전투를 벌이기도 한다. 이 모든 인간의 활동은 따지고 보면,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헛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헛된 일 하나를 함께 수행하고 마친 후 우리는 함께 웃을 수 있다. 무더운 오후에 한 가닥 바람을 만난 사람들처럼. 그 상쾌한 한 순간을 맛보기 위해 우리는 지난 여름의 폭염과 헬조선에서의 이 팍팍한 삶을 견뎌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백치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16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근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의 불가피한 해명

— 나 죽고 난 다음에야 무슨 일이 있건 말건Apres moi le deluge


어제 아침에 우리 집에 공작이 왔다 갔다. 요컨대 나보고 자기 집에 와 있으라는 설득이었다. 나는 그가 반드시 이런 얘기를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내가 확신했던 바였지만, 그는 별장에 있는 ‘사람들과 나무들 사이에서 죽는 편이 용이할 것이다’라는 말을 단도직입적으로 했다. […] 나는 그에게 ‘나무’이야기는 난데없이 왜 하느냐고 물었다. 왜 그가 ‘나무’라는 단어를 끄집어 냈을까? […] 내가 나무 밑에서 죽든, 창밖의 벽돌을 보고 죽든, 그것은 매한가지이며 생명이 2주일밖에 남지 않은 내가 격식을 따질 처지냐고 공작에게 말하자, 공작은 즉시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견해에 따르면, 푸른 숲과 깨끗한 공기는 나에게 어떤 육체적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에, 나의 동요와 ‘나의 꿈들’이 어쩌면 호전될지 모른다고 했다. 나는 다시 웃으면서 그가 꼭 유물론자처럼 말한다고 한마디했다. […] (595)



-
폐병쟁이 이폴리트의 ‘해명’. 

살 날이 2주 정도밖에 안 남았다는 설정이다. 


사실 ‘유서’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이폴리트 자신은 굳이 ‘해명’이라고 부른다. (간혹 ‘고백’이라 부르기도 한다.) 


폐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이폴리트는 자살을 결심한다. 그러니까 위의 ‘해명’은 자신의 자살 결심이 어째서 정당하고 필연적인지를 사람들 앞에서 해명한 것. 뭐 간단한 얘기다. 어차피 죽을 거 미리 죽겠다는 것. 다른 방도는 없다는 것. 근데 이 내용으로 도스토옙스키는 수십 페이지를 거뜬히 채워넣는다. 원고 깡패! 


폐병에 걸린 이폴리트가 집에 누워 있으면 창밖으로 이웃집 돌벽이 보인다는 설정이다. 이웃집이 메이예로프 씨네 집이어서 ‘메이예로프의 담장’이라고도 불린다. 괜히 멋져 보이는 네이밍이어서 평론가들이 작품 해설이나 평문에 (you know?__다들 알지?__의 느낌으로) 종종 쓰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실은 이런 단순한 의미인 것. (메이예로프 씨는 소설 등장 인물도 아니다. 그러니 딱히 몰라도 된다. 돌벽으로 충분.)


근데 도스토옙스키는 이 ‘돌벽’ 상징을 꽤 자주 사용한다. '돌벽'을 넘어서는 게 도스토옙스키에게는 중요한 주제다. 그의 소설 등장 인물 갖는 핵심 과업인 것이다. 그러니 독자는 돌벽에 대한 인물의 태도가 어떤지를 잘 살피면서 읽어야 한다. '돌벽' 상징은 항상 ‘돌벽’의 형태로만 제시되는 건 아니고, 수정궁, 철도, 2x2=4라는 수학 공식, 기계장치로서의 자연 등의 형태로 변주되어 제시된다. 


<백치>에서 이폴리트는 집에 누워서 돌벽을 보고 죽겠다며, 이 돌벽이 자기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른 사람들은 모를 것이라며 옹졸하게 고집을 부린다. 


그런 이폴리트에게 ‘백치 성자’ 미쉬낀 공작이 제안한다. 사람들과 나무들 사이에서 죽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이폴리트는 당연히 이 제안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어차피 죽을 건데 나무 밑에서 죽든, 돌벽을 보고 죽든, 그것은 매한가지가 아닌가?


그런데 이 제안이 기억에 남았던 것인지 자신의 유서(=해명) 첫머리를 이 돌벽과 나무 이야기로 시작한다. 사실 그는 공작이 그런 제안을 한 게, 아니 그보다 자기에게 진지하게 말을 걸어준 게 실은 무척 반갑고 고마웠던 게 아닐까 싶다. 물론 고맙단 말은 절대 안 하고 틱틱거리며 시비를 걸지만 말이다. 


-

일주일 전엔가 오랜만에 동네 천변 카페에서 된장질을 하고 있는데 문득 가지런히 서 있는 나무들, 나무들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들과 사람들이 한 프레임 안에 있는 모습을 보는 게 너무나 오랜만이어서 반가웠고 동시에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읽고 있던 카프카의 편지글을 덮어두고 한참창밖을 봤다. 


-
체호프 작품에는 나무가 상당히 자주 등장한다. '난데없이'의 느낌으로 등장한다. 자작나무, 소나무, 보리수, 버드나무 등이...... 나무들이 사람을 막 비웃기도 하고 그런다. 체호프는 나무가 있는 풍경을 소설 속에 자주 제시한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에 나무는 가끔 등장한다. 그리고 내 기억에... 카프카 작품에는 나무가 거의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앞으로 눈여겨 볼 일이다.)


-

창 밖으로 나무가 보이는 풍경을 지닌 카페는(집은 말할 것도 없고) 무척 드문 것 같다. 


요 몇 년 동안 우리 동네에서는 오래된 단독 주택을 허물고 4-5층짜리 빌라를 올리는 공사가 계속, 쉼 없이 진행 중이다. 엊그제는 철거 직후의 모습을 봤는데, 5-6미터 정도 되는 나무 두 그루가 뿌리째 뽑혀 잔해들과 함께 널브러져 있었다.


우리집 앞 집은 반지하층이 있는 다세대주택인데, 그 반지하층에 사는 할머니 한 분이 거의 매일 1층 문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아 있곤 한다. 할머니가 없을 때 그 앉은 자리에서 뭐가 보이는지를 시험해봤다. 돌벽이 보였고 좁은 골목길이 보였다. 짧은 골목길 끝에는 또 다른 돌벽이 있었다. 그래도 가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일까? 폐지 줍는 할머니나 이웃 아주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간혹 봤다. 가끔 내게도 말을 거신다. ‘아따, 금세 갔다 오네.’ 편의점에 도시락 사러 나갔다 오면 이렇게 한 마디 던지곤 하신다. ‘아, 네. ㅎㅎ’ 민망하고 어색한 짧은 대답이 우리가 나누는 대화의 전부다. 


-
나무가 바라다보이는 풍경이 있었더라면 나무에 대해서, 또 그밖의 것들에 대해서 몇 마디 더 주고 받는 게 좀더 용이했을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을 했다. 아니 꼭 무슨 대화를 주고 받지 않더라도 그냥 한 동네 이웃이니까 같이 보게 되는 무언가가... 크고 아름다운 무언가...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무언가... 아니 꼭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더라도 그냥 그 자리에 있으니까 보고 있게 되는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이래서 옛날 소설이나 동화 보면 마을 노인들이 서낭당에 나무 뽑지 말라고 결사 반대하고 그랬던 걸까 싶고. 


-
'돌벽을 보고 죽는 것’과 ‘사람들과 나무들 사이에서 죽는 것.’ 이것은 매한가지가 아니다. 양자의 차이를 깨닫는 게 어쩌면 도시 계획의, 우리 미래 삶의 첩경일지 모른다. 이 차이가 피부에 와닿을 때는 이미 늦을 것이다. (지금이 이미 늦었나...) 도시 계획 입안자들에게 <백치> 일독을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