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 미국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허먼 멜빌 외 지음, 한기욱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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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의 마지막 대목에는 이런 성경 구절이 나온다. 

"제왕과 만조백관과 함께 잠들었소."

걷고 있는데 이 구절이 생각났고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왜 울컥했을까 곰곰 생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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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헤밍웨이의 소설 제목으로 유명한 구절인데, 사실 이 구절은 18세기 영국 시인 존 던의 시 <묵상록>이 출처다. 

이 구절을 둘러싼 전후 맥락은 다음과 같다.


[자체로서 일체적인 완전함을 갖춘 섬과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 본체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다른 사람의 죽음은 나를 축소시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에 속해 있는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종(弔鐘)이 누구를 위해 울리는지 알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당신을 위해 울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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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모든 인간(인류)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
그러므로 누구를 위해 조종이 울리는지 알려고 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의 죽음은(그것이 누구든) '나'를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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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의 마지막 장면에서 변호사는 바틀비의 사망 사실을 알고 저도 모르게 저 인식에 도달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마지막에 변호사가 떠올린 성경 구절 "제왕과 만조백관과 함께 잠들었소"(욥기 3장 14절)는 바틀비의 죽음에 바치는 '추도사'다.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삶이고 죽음이지만 그래도 추도의 예를 갖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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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사. 

각각의 죽음에는 그에 합당한 추도사가 있어야 한다. 
어떤 사회의 어떤 죽음에 합당한 추도사가 없다면 만들어내야 한다.
어떤 세력이 추도를 거부한다면 종용해야 한다. 
어떤 사회가 합당한 추도의 방식을 찾지 못하고, 찾는 데는 관심도 없고, 오히려 추도를 지긋지긋해하는 분위기라면 그 사회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사회다. 

그런 상황, 그런 분위기에서 멜빌과 같은 작가들은 합당한 추도사를 만들어내고 예를 갖추는 일을 묵묵히 해왔다. 

멋지다. 멜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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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생각해보면 멜빌 소설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는 '모든 사람은 (무엇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틀비> 뿐만 아니라 <모비 딕>도 그렇다. 퀴퀘그와의 '진정한 우정'을 이야기한 챕터도 정말 흥미롭거니와 클라이맥스는 포획한 향유고래로 선원들이 경뇌유를 만드는 작업 장면을 그린 후반의 한 챕터다. <모비 딕>을 보면 멜빌이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윤리적 공통점을 찾으려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모두 혼자'이기도 하다. 가령 에이해브 선장 같은 독불장군은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절대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흰고래를 증오하는데, 그건 뭐라도 증오해야 할 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증오는 '사람들과의 연결을 끊고 고립된'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 내지 자괴감이었을 텐데, 그것을 투사할 외부의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에이해브 선장 같은 면모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우리는 모두 에이해브 선장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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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공통 요소를 찾던 멜빌은, (<바틀비>에서 보듯) 결국 그것이 '죽음'이라 말하기에 이른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 외에 어떠한 윤리적 공통점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곰곰 생각해보면 무척 슬프고도 절망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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