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 길들이기 - [초특가판] 고전 10종
하워드 혹스 감독, 캐리 그란트 외 출연 / 맥스엔터테인먼트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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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양육(Bringing Up Baby)> 또는 <베이비 길들이기>(하워드 호크스, 1938). 영화 내용상 후자가 더 적절한 제목이다. '베이비'가 '아기'로 번역되는 보통 명사가 아니고 누군가의 이름(고유명사)이기 때문이다. 아니, 실은 사람 아기도 아니고 '표범'의 이름이다. 그렇다. 이 영화에는 '펫 표범'이 등장한다. '펫 표범'은 표범이 고양이과 동물이란 사실을 여실히 보여 준다. (위 동영상 참조)

 

 

<베이비 길들이기>는 정신 없이 오가는 만담조 대사의 주고 받음과 그만큼 정신 없는 상황 전개가 특징인 '스크루볼 코미디'다. 슬랩스틱이 적절히 가미되어 있어서 말 그대로 쉴새 없이 웃을 수 있다. 개봉 당시 최초로 아카데미 5개 부문 상을 휩쓴 프랭크 카프라의 <어느 날 밤에 생긴 일>(1934)이 스크루볼 코미디의 대표격이긴 한데, <베이비 길들이기> 역시 못지 않게 재밌다. 템포가 더 빠르고(더 정신 없고), 설정이나 캐릭터도 더 신선한 맛이 있다. 4년 사이에 이 장르도 진화했고, <베이비 길들이기>에 이르러 정점을 찍은 듯 보인다.

 

 

많은 로맨틱 코미디가 그렇듯, 이 영화도 주인공이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돈과 사랑을 동시에 거머쥐며 끝난다. 문제는 거기까지 가는 과정인데, 주인공의 계산된 이성적 노력은 모두 다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상황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택한 임기응변이나 자포자기적 행동이 '대박 반전'으로 이어진다.

 

 

미래를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계획된 행동보다 임기응변이 낫다. 애써 계획을 마련해놓고 혹시라도 계획대로 되지 않을까 불안에 떠는 것보다는 갑작스럽게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그때 그때 태도를 바꿔가며 대처하는 게 나은 것이다. 멋모르고 '나만의 원칙/신념/생활방식' 같은 걸 고수하다가는 큰코 다치기 십상.

 

 

임기응변이라고 했는데, 스크루볼 코미디의 경우는 스릴러, 액션 영화의 주인공들이 선보이는 임기응변과는 사뭇 다르다. 스릴러, 액션 영화의 주인공들은 이른바 '능력자'들이다. 지금은 일반인이지만 한때 '특수요원'이었다든가 하는 식. 그들에겐 나름의 행동 원칙과 신념이 있다. 대개 '불의를 참을 수 없다'라든지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든지 '가족(주로 딸)을 보호해야 한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요즘은 이 장르도 진화해서 '나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식의 원칙 아래 주인공들이 활약을 펼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변화는 '국가'나 '가족'을 생각할 겨를이 없어진, 오직 '나 자신의 생존'이 최우선 과제가 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스크루볼 코미디의 임기응변은 '내려놓기=자포자기'로 요약할 수 있다. 스릴러, 액션 영화의 주인공들이 '절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태도를 보이는 것과는 정반대라 하겠다. 영화의 주인공 캐리 그랜트는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자신의 계획을 하나씩 포기(당)한다. 박물관 기부금 백만 달러를 얻으려는 계획을 포기(당)하고, 약혼녀와의 결혼을 포기(당)하고, 급기야 자기의 정체성마저 포기(당)한다. 미친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전문 사기꾼으로 오인받아 유치장에 갇히기도 한다. 꽤 익숙한 상황이라고 느끼는 것도 당연한데, 이러한 상황은 스릴러, 액션 영화에서도 자주 제시하는 일종의 단골 설정이기도 하다.

 

 

<베이비 길들이기>의 캐리 그랜트 캐릭터는 히치콕의 스릴러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캐리 그랜트를 떠올리게 한다. 두 영화 모두에서 캐리 그랜트는 자기가 전체를 파악하고 있지 않은 어떤 상황에 휘말리게 된다. 다른 사람으로 오인된다는 것도 공통적이다.

 

 

스릴러, 액션 영화도 스크루볼 코미디도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 어떤 음모'에 휘말린다는 설정에 기반을 두고 전개된다. 계획은 쉽게 어그러지고 상황은 내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이건 영화에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이미 그런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베이비 길들이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여주인공 캐서린 헵번의 캐릭터이다. (여담인데, 또 다른 헵번인 오드리 헵번은 오랫동안 팬이었지만, 캐서린 헵번의 영화는 이번에 처음 봤다.) 이 영화에서 캐서린 헵번은 정신 없는 '좌충우돌' 캐릭터를 선보인다. 영화에서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멋대로' 행동한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캐리 그랜트와 결혼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무작정 들이댄다. 그러면서 캐리 그랜트의 계획을 깡그리 망쳐 놓는 것은 물론 공공 질서와 사적 소유권을 어지럽히며, 급기야는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정체성마저 포기하게(내려놓게) 만든다. '민폐 캐릭터' 중에서도 가히 최강이라 할만하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거의 '제정신'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인다.

 

 

물론 스크루볼 코미디답게도 그녀의 이런 '극악무도한' 민폐질은 나중에 그녀가 다름 아닌 '물주'의 조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리고 캐리 그랜트가 원하던 '기부금 백만 달러'를 확보해줌으로써 정당화된다.

 

 

스크루볼 코미디는 1930년대 초(대공황 직후)에 등장하여 2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까지 기간 동안 큰 인기를 끌었다. 돈의 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주식과 채권이 휴지 조각이 되고, 잘 다니던 직장에서 잘려 한 순간에 실업자로 전락하는 등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떤 '붕 뜬' 시대적 상황을 이 장르는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에 '한없이 가벼운 즉흥성'과 '자포자기적 유머'로 맞서는 것이다. 자포자기적 태도가 깔려 있다는 점에서 '시대와 맞선다'라는 표현이 과연 적절한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 어쩌면 그들에겐 '한없이 가벼운 즉흥성'과 '자포자기적 유머'말고는 다른 대안적 삶이 방식이 허락되지도 않았고, 상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

 


스크루볼 코미디는 '엉망진창 코미디'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스크루볼 코미디가 제시하는 세계는 엉망진창 세계다. 오래 공들인 계획도, 사회 질서도, 나 자신의 직업도 정체성도 일순간에 무너지거나 부정당할 수 있다. 말하자면 스크루볼 코미디의 세계는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는 세계, 가까운 미래조차도 계획할 수 없는 세계다. 이러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계획이나 신념이 무너졌다고 해서 좌절하지 않고, (캐서린 헵번의 캐릭터가 보여주듯) 애초에 모든 것을, '제정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오직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진다는 명분 아래) 다른 건 돌아보지 않고 일직선으로 맹렬히, 유쾌, 상쾌, 통쾌하게 질주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많은 '멘토'들의 다양한 조언은 결국 이러한 삶의 방식의 권유로 수렴하는 게 아닌가 싶다.

 

 

1930-40년대에는 스크루볼 코미디가 인기를 끌었지만, 40년대 중반 즈음부터 50년대 후반까지는 스릴러와 (한층 어두운) 필름 느와르가 유행한다. 설정은 동일하지만 유행한 장르는 달랐던 것이다. 오늘날 스크루볼 코미디는 텔레비전 시트콤의 형태로 아직 존재하지만, 아무래도 지배적인 장르는 스릴러, 액션이다. 스크루볼 코미디는 현실이 아무리 '엉망진창'이라 하더라도 낙관적 희망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품고 있고, '자포자기적 정서'를 '유머'로 승화시키며, 그것이 선보이는 '난리법석'을 통해 관객들에게 어떤 '활력'을 전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게 먹히지 않는 시기도 분명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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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는 두 마리의 표범이 나온다. 하나는 길들여진, 그래서 위험하지 않은 '펫 표범'이고 다른 하나는 서커스단에서 사람을 해친, 길들여지는 데 실패한 난폭한 표범이다. 우리는 과연 (우리 안의) 표범을 길들일 수 있을까. 이미 정글과 같은 생존 경쟁의 장으로 변해버린 사회에서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고, 난폭하게 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정글의 법칙'을 거부하며, 혹은 적절히 컨트롤하며(길들여가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영화의 결말에서 두 마리의 표범은 모두 포획된다. 길들여진 '펫 표범'은 원 주인에게 돌아가고, 난폭한 표범은 목표 달성을 위해 제정신을 이미 오래 전에 내려놓은, 그 결과 '표범보다 난폭해진' 캐서린 헵번에게 잡혀 질질 끌려온다. 그녀처럼 우리 역시 제정신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 사실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표범과 더불어 살아왔으며, 각자 자신의 안에 표범 한 마리쯤은 키워왔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길들이고 제압하는 데 성공했느냐의 문제는 다른 문제일 것이다. 설령 어느 정도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표범을 길들이려는 가운데 우리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표범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난폭하게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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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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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혹시라도, 요즘 중고등학생들이 우연한 기회에 <우체국>을 읽는다면 아마도 이렇게 한 마디 내뱉지 않을까 싶습니다.

 

쩔어!”

 

(앞에다 요즘 학생들이 강조를 하기 위해 흔히 쓰는 속어를 한 마디 덧붙이면 부코스키가 좀 더 흐뭇해할 것 같습니다만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그런데 쩔어!”라는 짧은 독후감상은 여러 모로 적절한 감상인 듯합니다.

 

일단 <우체국>의 작가 찰스 부코스키와 그의 분신으로 보이는 주인공 헨리 치나스키가 굉장히 쩌는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쩐다'라는 표현은 일단 매력적이다, 멋지다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부코스키는 전 세계에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죠. 뭐 별 매력을 못 느끼는 독자도 있겠습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하지만 이런 반응을 보이는 독자라도 쩔어!’라는 표현에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작가가 자신의 저속함을 한없이 노골적이고 뻔뻔한방식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헨리 치나스키란 인물은 여느 소설에서 흔히 마주치기 힘든 캐릭터임은 분명합니다. 무엇보다 그는 항상 요즘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 그대로 쩔어 지내는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세 가지에 대해 그렇습니다. 여자, , 경마. 아차, 한 가지를 빼먹을 뻔했네요. 그건 바로 ’입니.

 

여기 한 편의 저속한 소설이 있습니다.

 

아니 우리가 읽은 게 과연 소설인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이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뭐 이딴 게 소설이라고!”라는 반응 역시 있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게 소설이라면 개나 소나 다 쓰겠네!” 그런데 어쩌면 이러한 반응이야말로 찰스 부코스키의 매력을 아주 잘 드러내는, 왜 그가 전 세계에 수많은 추종자들 거느리고 있는지 그 이유를 잘 설명해주는 반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 쓸 수 있습니다. 심지어 좌우명(정확하게는 묘비명이지만 좌우명이라고 봐도 괜찮을 것입니다)노력하지 마라인 사람도 썼으니 말입니다. 소설의 이론을 섭렵하지 않아도, 오늘날 인기 있는, 혹은 주목 받는 소설들을 훑어보고 참조하지 않아도, 글쓰기 전문인을 양성하는 국문과나 문예창작과를 나오지 않아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관심사가 오로지 여자, , 경마뿐인 부코스키라는 작자도 썼는데요 뭘. 그러니까 부코스키가 소설 마지막에 적고 있듯, 어느 날 문득, 아침이 되고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의식했다면, 그리고 때마침 아마 소설을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쓸 수 있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방대한 자료 조사를 하지 않아도, 마라톤으로 체력을 관리하며 정해진 시간 동안은 반드시 몇 매 이상의 글을 쓴다는 프로 작가적 마인드가 없어도, 정치적 올바름이나 인권 감수성에 대한 개념은 개를 줬어도, 현실에 대한, 소외 받는 존재들에 대한 작가적 고민이 없어도, (욕은 좀 먹겠지만)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이야기를 솔직하게 (혹은 뻔뻔하게) 쓰면 되는 겁니다. 뭐랄까, 안심이 되고 조금쯤 자신감도 생깁니다. 어쩌면 어쭙잖은 힐링 효과일 수도 있겠습니다.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온 (소설인지 뭔지 모를) 무언가를 읽었습니다. 여성 잡지에 실린 싸구려 소설 같기도 한 이 소설, 돈과 시간을 들여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읽어버리고 만 지금도 헷갈리는 것도, 고백건대, 사실입니다.

 

의의를 부여해보죠. 합리성과 효율성이란 이름 아래 개성을 말살하고 인간성을 황폐화시키는 현대의 물질·기계문명에 대한 반항과 비판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그리스인 조르바1950년대 미국의 비트(Beat) 제너레이션,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등장한 6-70년대 히피 세대의 감성이런저런 사회운동들성혁명 또는 성해방비타협적 정신일체의 권위에 대한 저항80년대 한국에서 시도된 민중문학 노동자문학…… . 그만 두겠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칫하면 정신이 이상해질 정도의 일입니다. 왜 사람은 책을 성실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왜 책에 쓰여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요? 왜 읽고서 옳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채 정보라는 필터를 꽂아 무해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일까요? 아시겠지요. 미쳐버리기 때문입니다. [...] 카프카나 횔덜린이나 아르토의 책을 읽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완전히 알아버렸다면, 우리는 아마 제정신으로는 있을 수 없을 겁니다. 서점이나 도서관이라는 얼핏 평온해 보이는 곳이 바로 어설프게 읽으면 발광해버리는 사람들이 빽빽 들어찬, 거의 화약고나 탄약고 같은 끔찍한 장소라고 느낄 수 있는 감성을 단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37-8.

 

한 작가를 가로지르는 종횡의 맥락, 역사적·장소적 맥락을 살핌으로써 작가의 작업에 의의를 부여하고 작가의 문학사적 위치를 자리매김하는 건 분명 필요한 일이겠지만, 동시에 작가와 그의 작품을 어떤 한계 속에, 안전장치 속에, 차곡차곡 정리해서 책장에 가둬버리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사키 아타루 식으로 말하자면 “‘정보라는 필터를 꽂아 무해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일입니다.

 

 

문학은, 읽고 쓴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해로운 것입니다. 진지한 독서는 정신적 혼란을 초래합니다. 어설프게 읽었다가는 미쳐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안전장치입니다. 책에 너무 진지하게 빠져들지 않도록 제동을 걸어 줄 안전장치입니다. 책을 읽고 나서 뭔가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해서 '이 책은 좋은 책'이라 자리매김하는 작업이 곧 안전장치 역할을 합니다. '좋은 책'이라... <우체국>에 적용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런 이야기도 해볼 수 있겠습니다. 일생 동안, 우리를 보호해줄 안전장치를 보장 받자면 좋은 사람’(무해한 사람=“해치지 않아요.”)이 되어야다른 사람들로부터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받아야—합니.

 

존스톤 씨는 우체국에 30년이나 근무했어!”

그게 대체 이 일과 무슨 상관입니까?”

말했잖아, 존스톤 씨는 좋은 사람이라고!” (15)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그 사람들 모두 한 번 정도는 다 그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G.G.착한 사람이야.’ 하지만 이 착한 아저씨가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54)

 

, 그럼 이제 여러분은 훌륭한 직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항상 깔끔하게 행동하기만 하면 앞으로 남은 일생 동안 안전장치가 생기는 겁니다.”

안전장치라니? 감옥에 가도 안전장치는 있다. 27제곱미터 넓이의 공간을 쓰면서 집세나 각종 공과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소득세도 없고 양육비도 낼 필요 없다. 자동차 번호판 요금도 내지 않고 교통 범칙금도 내지 않고 음주 운전으로 체포되지도 않는다. 의료 진료는 무료. 비슷한 취미를 가진 친구들끼리 동료애도 쌓고. 교회도 다니고. 호모들도 만나고. 죽으면 장례도 공짜. (83)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란 곧 무해한 사람이란 것입니다. 그것을 보장해주는 게 ‘훌륭한 직업=안전장치라는 건 오늘날의 상식입니다. 상식을 따르자면, 훌륭한 직업을 갖고 남들로부터 좋은 사람(=무해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로 설정될 법합니다. 하지만 뻔뻔한 치나스키는 안전장치는 감옥에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할 만도 한 것이 평생보장 안전장치를 갖게 되는 대신 지불해야 하는 대가도 만만찮기 때문입니다. 치나스키의 우체국 시절 동료 G.G.는 자신이 집배원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오랫동안 봉사에 헌신해온’ 인물입니다. 그런데, G.G.20대부터 60대 후반까지 일했지만, 결국에 남는 건 일에 대한 혐오’밖에 없습니. G.G.를 보며 헨리 치나스키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우직한 말’, ‘어느 날 갑자기 멈춰 버린 낡은 차를 떠올립니다. 서슴없이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의 인생은 그리 멋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아예 똥 덩어리가 되어 버렸다.(53)” 똥덩어리라니, 치나스키 이 사람, 이거... 남의 삶을 너무 함부로, 과장해서, 단정해서 말하는 건 아닐까요?

 

지나간 11년이 머리를 뚫고 지났다. 이 일이 사람을 갉아 먹는 것을 봐왔다. 사람들은 흐늘흐늘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도지 우체국에 지미 포츠라는 직원이 있었다. 내가 처음왔을 때 지미는 흰 티셔츠를 입은 건장한 사내였다. 이제 그때 그 사람은 사라졌다. 그는 바닥에 가능한 한 가까이 붙어 앉아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로 버티고 있었다. 너무 피곤해서 이발도 못 했고 3년 동안 똑같은 바지를 입었다. 일주일에 두 번 셔츠를 갈아입었고, 아주 천천히 걸었다. 우체국이 그를 살해한 것이다. 그는 쉰다섯 살이었다. 퇴직까지는 7년이 남아 있었다.

난 못 버틸 거야.” 지미는 내게 말했다.

사람들은 녹아 버리거나 살이 뒤룩뒤룩 쪘다. 특히 엉덩이와 배가 비대해졌다. 줄곧 스툴에 앉아 있어야 하고 같은 동작과 걸음걸이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됐다. 어지럼증이 생기고 팔, , 가슴, 안 쑤시는 데가 없었다. 일하려면 좀 쉬어야 하기 때문에 낮에는 종일 잠만 잤다. 주말에는 일을 잊기 위해 술을 마셨다. 여기 올 때는 84킬로그램이었다. 지금은 101킬로그램이었다. 고작 오른 팔만 움직일 뿐이니까. (219-220)

 

그래요, 섣부른 단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치나스키에 따르면, 일은 사람을 갉아먹고 흐늘흐늘 녹아내리게 만듭니다. 일은 읽고 쓰는 것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사람을 미칠 지경으로 몰아넣습니다.

 

저녁인지 점심인지 먹은 후(열두 시간씩 근무를 한 후에는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된다) 나는 말했다. “이봐, 자기. 미안하지만, 이 일 때문에 내가 미쳐 가고 있다는 거 모르겠어? 저기, 그냥 포기하자. 그저 빈둥빈둥 누워서 섹스나 하고 산책이나 하고 얘기는 조금만 하자. 동물원에 가는 거야. 동물을 구경하자. 차를 타고 내려가서 바다를 구경하는 거야. 45분밖에 안 걸려. 오락실에 가서 게임도 하고. 경마장이나 미술관, 권투 경기에 가자. 친구도 사귀고. 웃자고. 이렇게 살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거야. 이러다 죽는다고.”

안 돼, 행크. 우리는 보여 줘야만 해. 아빠랑 할아버지에게 보여 줘야만 한다고…….” // 텍사스 시골 촌년이 할 만한 말이었다. // 나는 포기해 버렸다. (93)

 

공정을 기하기 위해, 치나스키의 근무 조건과 일의 특성을 잘 분석해볼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밤에, 12시간(+3H)을 근무합니다. 배달 업무든 우편 사무든, 쉴 틈이 거의 없는심지어 식사할 시간도 없는, 단순 반복 작업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하겠습니다. 직장에서는 동료애가 싹틀 여지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서로는 서로를 감시하거나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남들을 감시하고 괴롭히면서 때로 은밀한 쾌감도 느끼지만, 결국은 다 같이 녹아내립니다. 보다 높은 효율성과 정확성을 위해 배달 구역 구분표를 외우기도 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택배 업무와 유사하다고 보면 될까요. 그렇다면 모든 직업에 대해 일반화하기란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만약 치나스키가 스펙이 좀 더 좋았더라면, 하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이런 저런 상상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체국'에 취직하기 전, 헨리 치나스키는 직장을 백 개는 넘게 거친’ ‘떠돌이 막일꾼(=팩토텀)’이었습니다. 그가 이런 저런 불평들을 하면서도 11년 동안이나 우체국에 붙어 있었던 건 그나마 우체국 일이 쉬운 편에 속한 때문이라고 짐작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좀 예민한 편인 것 같습니다. 항상 아프고 환각에 들뜬 채 숙취에 찌든 몸(19)” 상태이니 그럴만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주변에는 유독 미친 사람들—정확히 말하자면 '그를 미치게 만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똑같았다. 어디에서 우편물을 배달하든 간에 항상 같은 이야기를 듣고 또 듣는다.

늦게 왔네요?”

매일 오는 집배원 아저씨는 어디 있우?”

안녕, 우체부 아저씨!”

아저씨, 아저씨! 이거 여기 오는 우편물 아니에요!”

거리는 미치광이와 맹추들로 가득했다. 대부분 좋은 집에서 살았고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뭘 하면 그렇게 먹고 놀 수 있는지 궁금했다. 자기 우편함에 편지를 넣지 못 하게 하는 남자도 있었다. 그는 차도에 서서 내가 오는 것을 두세 블록 전부터 쳐다보고 있다가 내가 가까이 가면 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순로를 배달해 본 적이 있는 다른 직원들에게 물어보았다.

거기 서서 손 내미는 남자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거래?”

거기 서서 손 내미는 남자가 누군데?”

그들도 다들 목소리가 똑같았다. (38-39)

 

 

치나스키는 거리는 미치광이와 맹추들로 가득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자신이 미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구분표를 외운답시고 모든 걸 섹스와 나이에 연관시켜외우는 건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니죠. 이런 대목도 있습니다.

 

, 그렇다면의사는 종이를 돌려준다. ‘이런 걸 외우고 싶지 않다는 게 미친 건 아니죠. 외려 이걸 외우고 싶다면 미쳤다고 해야 할 겁니다. 상담료는 25달러입니다.’ (132)

 

실제 의사의 말이 아니라 자가 분석이라는 게 함정이긴 합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치나스키가 극도로 자기중심적인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치나스키의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는 발언은 되는 대로 살아온 인생’ ‘존재 자체가 잉여인 처지에 대한 (어디까지나 자기입장에서의) 변명이나 자기합리화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어렸을 적부터 해온 대로 <우체국>에서 뭔가 교훈에 해당하는 걸 끄집어내보려는 노력을 기울여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해설을 참조하면 반복적 노동에 대한 혐오’,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이 이 소설에는 담겨 있다. 나도 모르게 한 마디가 툭 튀어나옵니다. 빌어먹을. 귀에 닳도록 들어온 소리. 들을 때마다 한 귀로 흘러들어와 다른 귀로 빠져나간 소리.

 

여기서 한 가지. 치나스키가 ○○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는 혁명가도 노동운동가도 아닙니다. 그는 노동 조건에 대해 불평은 하지만 뭔가 근본적인 잘못을 비판하거나 제도를 개혁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욕을 실컷 해주거나 무단결근을 하거나 아예 회사를 그만둬버립니다. 앗차, 사실 이런 식이어서는 곤란합니다. 노동 조건이나 관료주의에 물든 사회 분위기가 잘못되어 있다는 건 충분히 알겠지만, 이런 제멋대로의 방식혼자 미꾸라지처럼 도망치는 방식이어서는 누구라도 편들어주기가 쉽지 않으니 말입니다. 우리의 주인공 치나스키는 이런 저런 주의운동에 대해 경멸어린, 시니컬한 태도를 취합니다. ‘작가 워크숍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태도를 취합니다(그 자신 작가이면서도). 중요한 점은 부코스키는 신념에 차 뭔가를 주장하기 위해, 자신이 옳다고 믿는 뭔가를 입증하기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많은 문학종사자들처럼) 글쓰기 자체를 숭고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의 글쓰기에는 어떤 것이든 윤리라고 부를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의 글을 통해 독자들의 눈앞에 생생하게 드러나는 건 술과 섹스 때문에 정신이 너덜너덜해진, 그러면서도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작가의 모습입니다. 그의 글에서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나 기대가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회주변부의 잉여로서 그는 그저 혼자서 마냥 쩔어 있는’ 것입니다. 그의 소설에는 (요즘 소설들이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연대관계 맺음에 대한 고민도 없습니다. 자기반성도, 어떠한 종류의 깨달음도 없습니다. 그는 아주 일관성 있게, 언제나 변함없이 술과, 여자와, 경마에 쩔어 있을 뿐입니다. 일례로 그는 언제 어느 상황에서나 여자들에게 한 눈을 파는데, 가만 보고 있노라면 감탄이 나올 정도입니다.

 

그럼 애 아빠는?”

로이랑은 이혼했어. 쓸모 하나 없는 개새끼. 빈둥빈둥 놀면서 술이나 마시고 경마밖에 안 했지.”

저런.” (151)

 

어쩌면 페이는 세상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침착한 그녀가 자랑스러웠다. 더러운 접시를 씻지 않고 놔둔 것과 <뉴요커>나 보며 빈둥댄 것과 작가 워크숍이나 다닌 것 모두를 용서하기로 했다. 이 나이든 여자는 무관심한 세상에서 또 하나의 외로운 존재일 뿐이었다. (192)

 

저런이라고 치나스키가 말할 때 우리는 그의 뻔뻔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약과예요. “무관심한 세상에서 또 하나의 외로운 존재라고 뭔가 심금을 울릴 듯한 표현을 써놨지만, 잠시 후 그는 피부색이 거무스름한 간호사에게 한 눈을 팝니다....... ‘저런!’

 

부코스키의 글쓰기는 어떤 면에서 생활글쓰기에 가깝습니다. 사생활의 단면들과 자신의 속내를 여과 없이 그대로 옮겼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생활글쓰기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부코스키 식 글쓰기는 노력하지 않습니다. ‘있어 보이려고노력하지 않습니다. 달리 말해 ‘문학이나 소설에 걸맞은 글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문학은 원래 먹고 사는 데 도움이 안 되는 잉여적인 것이라지만, 부코스키의 글은 문학중에서도 잉여에 속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은 불편함을 느낍니다.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기분이 잘 안 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편함과 동시에 통쾌함도 느낍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부코스키가 자신의 시선을 사회로 돌리지 않고, 어떤 (작가라면 모름지기 지니도록 노력해야 할) 공평무사한 시선, 세상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지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의 시선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아닙니다. 오직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생활과 관심사에 집중된 시선이고(그 관심사란 건 앞서 말했다시피 여자(섹스), 술, 경마입니다.), 미래가 아닌 현재에 집중된 시선입니다. 말하자면 한계가 뚜렷한, 협소하고 편향된 시선입니다. 부코스키는 뭔가 의미 있는 글을 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자기 글을 좋은 글이라고 말해줄 것을 바라고 쓰지도 않았습니다. 이 사회의 문제와 치부를 건드리고 거기에 뼈아픈 일침을 가하기 위해 쓰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글은 오히려 '자기 자신의' 치부를 드러냅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이 드러내 놓은 것들조차 딱히 치부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그는 그런 것들을 뻔뻔하게 쓰고 자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 묘한 통쾌함과 안도감을 줍니다.

 

이러한 통쾌함과 안도감이 무엇으로 이어질지는 모르겠습니다. 문학을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많은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그냥 통쾌하고 말 일이 아니라고, 문학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뭔가 반감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문학은 어떠어떠한 것'이라는 규정에는 문학은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한다, 라는 일종의 '의미에 대한 강박'이 스며든 것 같아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글쎄요, 부코스키의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둘 수도 있겠습니다. 그대로 이어나가든, 뭔가 새로운 것으로 잇든 간에 말이지요. 하지만 한 가지, 뭐가 됐든 뭔가 의미 있(어 보이)는 것 이어야만 한다는 강박으로부턴 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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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사람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3
제임스 조이스 지음, 진선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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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그에게 가망이 없었다. 세 번째 졸도였기 때문이다. 매일 밤 나는 그 집 앞을 지나다니면서 (때가 방학 때였다) 촛불이 밝혀진 정방형의 창문을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밤이면 밤마다 나는 그 창문에 한결같이 희미하면서도 골고루 촛불이 밝혀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가 만일 죽는다면 어둠에 싸인 블라인드에 촛불이 비치는 것을 보게 되리라, 나는 전에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있었다. 시신의 머리맡에는 두 개의 촛불을 켜놓아야 한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에게 가끔 '나는 오래 살지 못할까 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부질없는 소리려니 생각하고 흘려 들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그 말이 적중하고 만 것이다. 매일 밤 나는 창문을 응시하면서 마비(paralyisis)라는 말을 나직하게 중얼거려보았다. 그럴 때마다 그 말은 언제나 내 귀에는 유클리드 기하학에 나오는 경절형(gnomen)이라는 말과 교리문답서에 나오는 성직 매매죄(simony)라는 말처럼 생소하게만 들렸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나에게 그 말이 어떤 나쁜 짓을 일삼는 죄받을 존재의 이름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그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공포감에 사로잡혔으나 이내 그 말에 오히려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것이 저지르는 끔직한 소행을 눈여겨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아졌다.

-제임스 조이스, <자매>, <<더블린 사람들>>

 

<자매>는 <<더블린 사람들>>에 실려 있는 15편의 단편들 중 첫 번째 단편입니다. 위의 인용은 <자매>의 첫머리. 그러니까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읽게 되는 문단인 셈. 제임스 조이스는 무엇보다 <율리시스>의 작가로 유명합니다만, 조이스를 <율리시스>로 처음 접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을까 싶네요. 아무래도 분량이나 난이도가 모두 '최상급'에 속하는 작품이니 말입니다(생각의나무에서 펴낸 번역본은 들고 다니면서 읽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판형이 크고 두껍습니다. 그래도 나름 '산책'에 관한 소설인데 산책 중에 읽을 수 없다니!!). 이래저래 독자들은 <더블린 사람들>(혹은 그 이름도 유명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통해 조이스를 처음 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위에 인용된 문단은 대다수 독자들에게는 [처음 만나는 조이스]인 셈입니다. 

 

조이스는 자신의 작품 여기저기에 떡밥(수수께끼)을 뿌려둔 것으로 유명합니다. 자신의 떡밥 뿌리기 실력에 꽤나 자신이 있었던지 자신의 작품 <피네건의 경야>를 두고 "앞으로 반 세기가 지나도 문학연구자들이 이 작품을 해석하지 못해 쩔쩔맬 것"이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후기의 일이고 작품 활동 초기에는 나름 친절함(?)이랄까, 독자를 배려하는 자세랄까,를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한 면모를 바로 위 인용문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촛불' 묘사는 <더블린 사람들>에 수록된 거의 모든 작품에 등장합니다. 위 인용에서 "창문에 한결같이 희미하면서도 골고루 촛불이 밝혀진 것"이라는 묘사는 '죽음-마비-혼수상태'에 대한 탁월한 시각적 이미지를 제공하며, 작품의 지배적 심상을 이룹니다. 죽음-마비-혼수상태는 조이스가 파악한 바, 당시 아일랜드의 정신 상태를 상징합니다. 빛은 빛이지만 주위를 온통 환하게 밝혀주거나 어떤 대상을 밝게 비춰주는 빛이 아니라, 단지 창문가에 어른거리고 깜박이는, 희미하고 뿌연 '촛불'의 빛을 통해 그러한 상태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더블린 사람들>의 다른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촛불'에 상응하는 묘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두 젊은이가 인파를 뚫고 걸어갈 때, 콜리는 이따금 몸을 돌려 지나가는 처녀들에게 미소를 던졌지만 이중의 달무리에 둘러싸인 희미한 보름달에 고정된 레너헌의 시선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는 뿌연 거미줄 같은 미광이 달의 표면을 가로질러 가는 것을 뚫어지게 지켜보았다. (<두 멋쟁이>, 92)

 

 

그녀는 참을성 있게, 거의 즐겁다 싶을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아무런 불안한 내색 없이 기다리고 있노라니 지난날의 기억들이 점점 미래의 희망과 비전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희망과 비전은 너무나 복잡하게 뒤얽혀서 그녀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그 하얀 베개도 더 이상 보이지도 않고, 그녀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숙집>, 120)

 

 

늦가을 저녁놀의 잔광이 잔디밭과 산책로를 뒤덮고 있었다. 잔광은 또 너저분한 보모들과 벤치에서 꾸벅꾸벅 조는 노쇠한 늙은이들에게 온화한 황금빛 먼지를 소나기처럼 퍼붓고 있기도 했다. 잔광은 말하자면 모든 움직이는 모습들, 예를 들면 자갈길을 통과하는 모든 사람들 위에 드리워져 깜박이고 있었다. 그는 그런 광경을 지켜보며 인생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인생을 생각하면 언제나 그리되듯이) 그는 슬퍼졌다. 그리하여 그는 잔잔한 우울감에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운명에 대항하여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작은 구름>, 126)

인용문들을 잘 읽어보셨나요? 읽어보면 '촛불'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뿌연 거미줄 같은 미광, 복잡하게 뒤얽힌 나머지 인물의 시선이 고정된 사물조차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만들어버리는 희망과 비전, 모든 움직이는 모습들 위에 드리워진 늦가을 저녁놀의 잔광 등이 바로 '촛불의 빛'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촛불의 빛은, 불안, 환멸, 우울감, 부질없음, 무기력, 마비 상태와 연관이 됩니다.

 

'마비'는 조이스 연구자들이 작품 해석의 키워드로 꼽고 있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신적) 마비'니, '죽음'이니, '혼수상태'라고 해도, 솔직히 무슨 말인지 감이 잘 안 옵니다. 아일랜드가 겪어온 식민의 역사라든가 (조이스가 이 소설을 쓴) 1910년대 아일랜드의 사회상, 대영제국이라는 체제 내에서 아일랜드-더블린의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지위 내지 입지와 결부시키면 언뜻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피부에 와닿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꼭 그것이 쓰여진 시대적 배경을 속속들이 알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조이스-아일랜드-식민의 역사-변방성]. 이런 연결 고리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읽고 해석하는 건 물론 필요한 일이겠지만, 다른 한 편으론 소설 읽기를 재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일,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축소시켜버리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더블린 사람들>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조이스가 작품에서 구사하는 고도의 상징을, '복잡하게 뒤얽힌' 해석 과정 없이, 피부에 와닿는 것으로 느낄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없을지를 생각해봤습니다. 힌트는 <자매>의 첫머리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발견한 힌트는 단순합니다. 뭔고 하면, 소설 속의 어린 화자를 따라 '어떤 단어를 나직하게 중얼거려 보는 것'을 시도해보는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맥락도 없이 갑자기 어떤 단어가 떠오를 때가, 또한 그 단어를 (특정한 방식으로) 발음해보고 싶을 때가, 그래서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그 특정한 방식을 찾을 때까지) 실제로 여러 번 반복해서 중얼거려 볼 때가 있습니다. <자매>의 어린 화자에게 그것은 '마비' 즉 '퍼랠리시스'라는 단어였죠. 아마도 어린 화자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나 용례는 잘 몰랐을 것입니다. 단지 그 단어 자체의 '발음'에, 또는 발음과 함께 머릿속에 떠올랐을 단어 자체의 '생김새'에 매력을 느낀 것이겠죠. 어쩌면 죽어서 누워 있는 플린 신부에게 배운 단어일 수도 있겠네요. 여기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조이스가 아무 '맥락 없이' 떨궈놓은 이 '마비'라는 단어를 둘러싸고 또 가로지르는 나름의 맥락을 독자 입장에서 추측하고 재구성하는 것이 <더블린 사람들>을 읽는 재미라는.

 

어떻게 생각하면 조이스는 우리에게 ‘어떤 단어를 나직하게 (그리고 반복해서) 중얼거려 보는 것’의 매력과 중요성을 알려주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의식 중에 중얼거리는 말들이 각자에게 있을 것입니다. '파푸아 뉴기니'라든가 '릴레함메르'라든가, 아니면 제가 종종 중얼거리는 말인 "아오, 빡세!"라든가. 덧붙여 '빡세'를 'baxe'라고 써놓고, '빡세'와는 다른 혀놀림으로 'baxe'라고 발음해 보기를 시도해보고 그 뉘앙스의 차이를 음미해본다든가.

 

참 쓸데없어 보이는 짓입니다(하지만 쓸데없어 보이는 짓만큼 우리가 사심 없이 몰두할 수 있는 일도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몰두하는 쓸데없는 짓은 우리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간혹,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어떤 것, 우리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 극복의지를 갖게 하기는커녕 반대로 한없는 무력감에 빠져들게 하는 것, 그래서 우리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돌면서 초조함과 불안과 거부감과 분노를 촉발하지만, 무엇이 우리를 그러한 상태가 되게 하는지 도대체 표현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조이스가 제시하는 해결책이 머릿속에 맴도는 그 어떤 것을 '중얼거려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양한 억양과 어투로, 그리고 나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매번 다르게 중얼거려 보는 것'. 물론 그것은 여전히 ‘중얼거림’에 불과합니다. 명료한 발화가 아니라 중얼거림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점이 조이스의 매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하자면, 조이스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표현의 영역으로 끌어들이지 않습니다. 억지 주장을 하지도, 진리에 해당하는 어떤 명제를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많은 것을 모호하게, 고도로 상징적인 방식으로 표현했고 그것을 애써 설명/해명하지 않고 그러한 형태 그대로 내버려둡니다.

 

그러나 그의 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비슷한 것들을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중얼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누군가는 ‘마비’라는 단어를 직접 입 밖에 내어 말하고, 누군가는 그저 갈색 눈썹이 달린 눈을 끔뻑거리고 있을 뿐이지만, 우리는 서로가 비슷한 것에 고통받고 있고 결박되어 있음을 문득 깨닫게 됩니다.

 

-

<더블린 사람들>을 읽다 발견한, '중얼거림'의 사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꼭 '나직한' 중얼거림은 아니라는 게 함정?!). 여러분은 어떤 단어 혹은 문구를 반복해서 중얼거리곤 하시나요?

 

나는 그가 이미 외워둔 그 무엇을 되풀이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의 마음이 자기 말씨 중 어떤 낱말의 매력에 홀려 같은 궤도를 자꾸만 천천히 빙빙 돌고 있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때로는 그는 누구나 다 아는 어떤 사실을 단순히 언급할 뿐이라는 투로 말하는가 하면, 때로는 목소리를 낮추어 다른 사람들이 엿들어서는 안 될 모종의 비밀이라도 얘기해주듯이 신비스러운 어조로 말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말투에 변화를 가하면서, 단조로운 목소리로 에워싸기도 하면서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 했다. (<뜻밖의 만남>, 41)

 

 

일행이 별실에서 나갈 때 그녀는 그의 의자에 스치듯 살짝 닿자 오, 죄송해요 하고 런던 억양으로 말했다. … 그는 자기 옆을 부딪고 지나치며 죄송해요! 라고 말하던 그 큰 모자를 쓴 여자를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어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167, 169)

 

 

그는 아들의 단조로운 억양을 흉내 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성당에. 성당에 갔다, 이 말씀이지! (<맞수들>,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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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미애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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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주문한 <모차르트>가 도착해서 읽고 있습니다.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쓴 평전으로, 부제는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입니다.

무려 '사회학적 고찰'이다 보니 읽는 게 마냥 쉽지 만은 않습니다. 어째서 '사회학적 고찰'이 필요하고 중요한지에 대해, 엘리아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개인적 운명, 유일무이한 인간이자 유일무이한 예술가로서 그의 운명은 그가 처한 사회적 상황, 즉 당시 음악가들이 궁정 귀족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의 사례에서 우리는 사회학자들의 장인적 기술을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한다면, 한 개인의 삶의 문제들을, 그의 인격이나 업적이 아무리 일회적이고, 비교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후세에게 전기 형식으로 이해시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를 이루려면 그의 어깨에 지워졌던 사회적 강제를 명료하게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이 경우엔 18세기의 예술가가--자기 시대의 다른 사회적 인물들과의 상호의존성으로 인하여 만들어내는 결합태의 검증 가능한 이론적 모델을 완성해내는 일이다. (24-25)



엘리아스는 모차르트의 '어깨에 지워졌던 사회적 강제'에 대해 하나하나 서술하고 있습니다. 논의의 골자는 이렇습니다. 모차르트는 천재였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사회는 아직 '낭만적 천재'의 개념을 몰랐다. 따라서 천재를 천재로 대할 줄 몰랐고, 천재에게 합당한 자리 역시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음악가들의 궁정에서의 서열은 '과자 제조공' '요리사' 또는 '시종'과 같았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하인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궁정 아첨꾼'에 해당했다, 고 엘리아스는 적고 있습니다. 때문에 '궁정 음악가'들은 그들의 '낮은 신분'에 맞게 "음악적 취향뿐만 아니라 의상이나 전체 인간적 특징에 이르기까지 궁정의 행동 규범 및 감정 규범에 맞춰야만"(26)했다고 합니다. 마치 승진 기회를 노리고 있는 대기업 직원이 상사의 규범에 맞게 행동(그리고 감정)을 조절하는 것처럼요.

말하자면 모차르트는 '천재 시대 이전의 천재'였던 셈인데, 바로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모차르트를 이해할 수 없다고 엘리아스는 쓰고 있습니다.

천재에게 합당한 자리를 마련해줄 수 없었던 사회. 거기서 모차르트는 뭔가 공정하지 않음을 느꼈고, 분노를 터뜨렸으며, 자신의 방식으로 그것에 대항하여 싸웁니다. 하지만 그것은 "시종일관 개인적인 투쟁"이었고, "바로 그 때문에 그는 투쟁에서 질 수밖에 없었다"고 엘리아스는 또한 쓰고 있습니다.

베토벤과의 비교도 (짤막하지만) 흥미롭습니다. 엘리아스는 "모차르트의 음악에는 궁정-귀족적 전통이 깊이 각인"되어 있었던 반면, "베토벤은 이 전통을 박차고 나왔다"(48)고 서술합니다. 모차르트보다 15년 늦게 태어난 베토벤은 모차르트를 속박한 '궁정'으로부터 자유로웠고, '자유 시장'에서 '자유 예술가'로서 작업했으며, 자신의 음악적 환상을 일관성 있게 추구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음악 청중에게 자신의 취향을 강요할 수 있었다"(59)고 합니다. 물론 엘리아스는 이 ('자유 시장'이 보증하는 한 존재할 수 있는) '자유 예술가'상에 대해서도 비판적 논의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모차르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오페라'들 역시 다음과 같은 맥락을 염두에 두고 보면 흥미롭습니다. 당시 오페라는 음악 장르 가운데 가장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엄청난 인적, 재정적 자원이 필수였던 탓에 (여차하면 유랑 극단에 의해 무대에 올려질 수 있었던 연극과는 달리) 전적으로 궁정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49)고 합니다. 

 

모차르트는 과연 신의 축복을 차고 넘치게 받은 천재일까요? 위대한 예술은 천재들의 전유물인 걸까요? 엘리아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는 예술가의 착상(환상, 상상)은 (예술의) 재료 및 사회(특히 양자가 지니는 한계)와 연관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위대한 것으로 만든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가 자발적으로 발휘한 '예술가적 양심'이었다고 말합니다.

좀 길지만 다음의 인용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술가의 착상이 재료 및 사회와 동시에 연관된다는 것은—첫눈에 그 관계가 명백하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결코 우연이 아니다. 각각의 예술 영역을 특징짓는 재료들은 무한히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예술가의 자의에 강하게 저항한다. 한 예술작품이 탄생하려면 개인의 환상은 이 재료들 중의 하나 속에서 재현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변형시켜야 한다. 예술가가 되풀이하여 나타나...는 환상과 재료 사이의 갈등을 극복함으로써 환상은 형태를 가지게 되고 한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며 동시에 의사소통의 수단, 즉 반드시 예술가의 동시대인들은 아니라 하더라도 타인들의 공감의 대상이 된다.

어떤 예술가도, 즉 모차르트조차도 힘 안 들이고 창작할 수는 없다. 모차르트의 음악에서는 강물처럼 흐르는 환상의 물결이 재료의 고유성과 거의 완벽하다 할 정도로 융화되어 있고 음의 형태는 오랜 기간 동안 놀라우리만치 가볍게 그의 의식 위로 떠올랐으며 그 음의 풍부한 독창성은 뛰어난 음 형태의 내재적 일관성과 무리없이 결합되어 있지만, 모차르트는 어떤 작품에서도 지켜보는 양심의 눈 밑에서 검토하고 개정하는 수고를 면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훗날 "작곡하지 않는 것보다 작곡하는 일이 더 쉽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시사하는 바가 많은 발언이며 그 신빙성도 상당히 높다. 언뜻 보기에 이는 신의 은총을 듬뿍 받은 사람이 내뱉는 말쯤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조금 깊이 들어가보면 그것이 고뇌에 지친 인간의 고통에 찬 절규임을 알게 된다.

모차르트는 사랑받고 싶다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했지만, 이 고통을 때론 장난기 어린 우아한 작품들을, 때론 깊이 심금을 울리는 작품들을 창조함으로써 극복하였다. 그가 이 작품들을 통해 추구했던 성공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도 바로 지나치게 엄격한 그의 양심 때문이기도 하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재능을 의식하고 있었고 그 재능을 지나칠 정도로 자신의 의무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이 의무를 배반했더라면 한결 수월하게 지나갔을 경우에조차 그는 그것을 저버리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한 것이 순전히 그의 결정만은 아니었다. 그를 그렇게 몰고 간 것은 부분적으로 자기 강제였지만, 다른 한편 하나의 결정이기도 했다. 모차르트가 별다른 자기 성찰 없이 자신의 예술가적 양심을 그가 필요로 했던 청중의 사랑과 갈채를 상실할 정도로까지 추구했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라도 그는 ‘한 인간으로서’ 후세의 감탄과 찬사를 받을 만하다.

모차르트와 같이 그토록 경이로운 인간의 인격 구조에 대한 간략한 언급은 인간 모차르트와 예술가 모차르트를 마치 별개의 두 사람인 양 나누어 말하는 습관이 자명성을 상실케 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과거 사람들은 인간 모차르트를 천재의 이상형에 들어맞도록 이상화하려 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술가 모차르트를 일종의 초인으로, 인간 모차르트에 대해서는 가벼운 경멸감을 가지고 다루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그에게 합당치 못한 평가이다. (88-90)

 

 


 
엘리아스의 <모차르트>는 그가 이전에 했던 작업들, 특히 <궁정사회>나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서 논의됐던 점들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비롯한 18세기의 음악적 양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고정된 사회적 구조이자 틀'이었던 궁정 사회를 잘 이해해야 한다는 논의나, 모차르트의 죽음을 '사회적 실존의 좌절' 즉, '사회적 죽음'으로 본 것이 흥미롭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신동'으로 여겨져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나중에 죽음을 앞두고서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자신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누구에게서도 얻을 수 없어 '스스로를 포기'하다시피 죽어 간 모차르트의 생애는 그 자체로 매우 드라마틱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차르트의 생애를 한 개인의 드라마로 내버려두지 않고 한 편의 '사회학적 드라마'로 서술한 것이 엘리아스의 [모차르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용어나 설명이 다소 어렵게 느껴지긴 하지만, 분량이 짧은 편이어서 찬찬히 읽다 보면 비교적 부담없이 사회학적 논의를 흡수할 수 있습니다. 기분이 내킨다면, 모차르트를 틀어놓고 읽어나가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http://youtu.be/rfeoBc4fD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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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이크가 본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나누리 옮김 / 필맥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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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자신을 문제로 삼으라"고 멋지게 말했듯이 자신에게,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대답을 구하는 인간은 자신을 더 분명하게 인식하고 통찰하기 위해 자기 인생의 길을 마치 지도처럼 펼쳐 보게 된다. 그는 다른 누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때 갈림길이 나타난다. 이 갈림길은 어느 자서전에서나 볼 수 있다. 인생의 묘사인가 체험의 묘사인가, 타인을 위한 예증인가 자신을 위한 예증인가, 객관적이고 외적인 자서전인가 주관적이고 내적인 자서전인가, 즉 단순한 사실의 전달인가 자신에 대한 보고인가로 길이 나뉘는 것이다. 앞의 길이 언제나 대중을 향하는 경향을 띠고 교회나 책에서 볼 수 있는 고해처럼 상투적인 표현방식을 사용한다면, 뒤의 길은 독백하듯이 생각하는 것이어서 대부분 일기의 형식만으로 충분하다. 괴테, 스탕달, 톨스토이와 같이 정말로 복합적인 성격의 사람들만이 이 두 길의 완전한 통합을 시도했고, 그 결과로 자신을 영원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자아성찰은 그저 준비단계일 뿐이지 깊이 숙고하는 단계는 아직 아니다. 모든 사실은 그 자체로 그대로 있으면 진실로 유지되기가 쉽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려 할 때 비로소 예술가의 진짜 고난과 고통이 시작되고, 정직성이라는 영웅적인 태도가 요구된다. 형제애를 발휘해 인간의 일회성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타인과 소통하고자 하는 본능적 충동이 우리를 몰아붙이지만, 그만큼이나 반대의 충동, 즉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에 대해 침묵하려는 의지가 기본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보호와 침묵의 의지는 수치심을 통해 우리에게 말한다. [..] 인간의 수치심이 지닌 근본적인 비밀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는 본질적 특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가장 잔인한 모습과 불쾌한 모습을 노출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도록 한다는 데 있다. 읽는 사람이 조롱하는 미소를 지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자서전을 쓰는 사람이 가장 빠져들기 쉬운 위험한 유혹인 것이다.

 

- 슈테판 츠바이크,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서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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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깊이 읽기를 염두에 두고, 그러니까 '톨스토이' 때문에 읽기 시작했지만, [서문]이 오히려 인상 깊은 책입니다.


'톨스토이'에 관한 글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 빛과 어둠의 두 초상>(자연사랑, 2001)에도 똑같이 실려 있습니다. 다만 번역은 다릅니다. 문단 구분도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카사노바...>는 본래 저자인 츠바이크가 카사노바-스탕탈-톨스토이로 이어지는 정신적, 예술적 발전 단계를 상정하고 쓴 책이기 때문에 필맥 출판사본을 읽는 게 합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소 인위적 발췌 편집이긴 하지만) ['톨스토이' vs '도스토예프스키' = '빛' vs '어둠']의 구도 역시 무척 땡기는 구도이긴 합니다. 러시아 문학에서 둘이 차지하는 비중을 봐도 그렇고, 둘의 라이벌 관계를 감안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원래 슈테판 츠바이크는 전기(평전critical biography) 작가로 무척 유명하죠. 그런데 그 많은 평전들을 그저 무턱대고 써낸 것이 아니라 나름의 체계를 염두에 두고 썼습니다. 이 점이 다른 평전 작가와 그를 구분하는 점일 것입니다.

 

가령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는 [세계의 거장들/대가들(Baumeister der Welt)] 시리즈의 세 번째 권에 속합니다. 원제는 번역하면 '삶의 세 시인' 정도가 되겠네요. 하지만 국내 번역본에서는 이 제목을 빼고, 대신 '츠바이크가 본'이란 구절을 집어 넣었습니다. 국내에서 츠바이크에 대한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음을 감안한다면, 굳이 이렇게 제목을 변형시킬 필요가 있었나 싶어요. 하긴 뭐 '삶의 세 시인'이란 제목 역시 구매욕구를 상승시킬 만한 제목은 아닙니다만.......

 

 

참고로 [세계의 거장들] 시리즈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카사노바...> [서문] 첫머리의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1권 <마신(데몬)과의 싸움(Der Kampf mit dem Damon)> : 횔덜린, 클라이스트, 니체

- 마성적인 힘에 쫓겨 자신과 현실세계를 뛰어넘어 무한의 세계로 들어선 유형


2권 <세 명의 거장들(Drei Meister)> : 발자크, 디킨스, 도스토예프스키

- 현존하는 현실 곁에 소설이라는 우주를 만들어 제2의 현실을 구축, 즉 '서사적으로 세계를 재창조한 사람'의 유형


3권 <삶의 세 시인(Drei Dichter ihres Lebens)> :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 (대우주를 있는 그대로 그리기 보다) 자아의 소우주를 세계 속에 펼쳐나간 유형. '주관주의적 예술가' '자서전'이라는 예술 형식은 어떤 것인가를 탐색.  

 

1권에서 다루는 인물들이 걸어간 길이 '무한 세계'로 이어진다면, 2권에서의 길은 '현실 세계'로 이어집니다. 3권에서의 길은 '자기 자신'에게도 이어지게 됩니다. 어쨌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츠바이크는 3이라는 숫자를 좋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뤄지는 작가들의 면면이 화려한 가운데, 1권이 특히 끌립니다. 하지만 국내에는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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