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 상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8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8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죄와 벌>을 쓸 당시, '아마도' 노름 빚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방탕한 행동과 그 일의 근본적 원인이랄 수 있는 내면의 탐욕과 방종은 가린 채, 초인에 관한 개똥철학을 내놓는다. 그는 물론 그 스스로의 입으로 직접 그 개똥철학을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철학은 소설 속 등장인물을 통해 설파된다. 이는 그의 간교함 또는 소심함의 소치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그를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라스콜리니코프라는 이름을 지닌 소설 속 등장인물은 얼마 간의 돈을 얻기 위해 짐승같은 전당포 노파를 죽인다. 그는 명백한 살인범이지만, 그가 살인을 저지른 논리는 꽤나 '매혹적인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니체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데... (흐음- 니체라... 니체를 들먹거려 나 자신의 저급한 매혹됨을 얼마 간이나마 숨겨보자는 속셈, 그래 인정한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던 라스콜리니코프를 사로잡은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인간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민망한 전당포 노파 같은 인간, 그리고 인간을 위한, 나아가 인류를 위한 어떤 위대한 철학을 지닌 젊은 청년 중 누구에게 더 돈이, 아니 한 끼의 따뜻한 식사가, 아픈 어머니를 위한 약값과 입원비가 필요한가? 누가 더 살 가치가 있는 것일까? 깊게 생각할 것도 없다. 대답은 뻔한 것이다. 생명은 모두 소중한 것이니까, 라는 개똥철학 앞에서라면 말이다.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을 때, 그것이 쓰여진 19세기 중반이 부르주아 문화가 정점을 지나 타락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역설적으로 타락이 진행되고 있던 바로 그 순간들이 정점이었다) 시기라는 점을 적극 고려해야 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보들레르는 그러한 타락을 맨 먼저 감지한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은 문화의 중심지인 파리 출신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문화적으로 변두리에 속하는 러시아 출신이었지만 이런 차이는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이 활동하던 때보다 대략 50여년 후의 릴케가 <말테의 수기> 첫 머리에서 적절히 묘사하고 있듯이, 도시란 그 본질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차이는 '파리', 그리고 '뻬쩨르부르그'라는 이름 뿐일지도 모른다. 도시에서, '이윤추구'라는 동기 이외에 서로 같은 경험이라곤 단 하나도 공유하지 않은 온갖 사람들이 모인 도시에서, 도스토예프스키와 보들레르는 정신적, 육체적 타락상을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목격할 수도, 또 그들 스스로 경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목격한 바와 경험한 바를 '객관화'하여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인 이들, 소위 작가라는 이들이, 부르주아 문화의 몰락을 감지하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19세기의 문학이란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이보게, 지금 우리 가라앉고 있잖나!" 그렇다고 해도 문학 앞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있을 것이다. 첫째, 몰락의 핵심 요소를 찾아내는 것. 둘째, 문학이 몰락에 대응하는 독특한 방식을 파악하는 것.

 

  작가는(혹은 문학이라는 추상명사는) 시대를 초월하려는 의지를 가진 자(것)이면서 동시에 '시대의 소산'이라고 말한다면 꽤나 일반적인 진술에 속할 것이지만 이 일반적 역설을 가만히 곱씹어 볼 필요는 있으리라.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이 어떤 위대한 통찰이라기보다 끈질긴 자기변명이라고 생각한다. 혹여 (니체의 '초인'을 들먹이면서) '초월에의 의지'에 방점을 둔다고 하더라도,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은 '무모한 꿈' 같은 것이다. 그는 스스로 살인을 저지를 만한 인물을 결코 아니었을 터, 그에게 필요한 것은 칼이나 도끼가 아니라 '종이paper'였다. 자신의 욕망을 마음대로 그려낼 수 있는 종이 말이다. '시대의 소산'이라는 측면에 방점을 둔다면, 그의 문학은 몰락에 대한 '(소극적 의미에서) 증언'과 '(적극적 의미에서) 반응'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자체 몰락을 촉진하고 또 피드백하는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인간의 도덕적 몰락을 매혹적으로 묘사할 줄 알았다. 이것이 라스콜리니코프의 도끼질을 매혹적이라 느끼는 근본적 이유다. 그 결과, 그의 소설에서 이를테면 '몰락에 대한 극복 의지'를 발견하기란 힘들게 되고 만다. 반대로 그는 몰락 그 자체의 과정에 집중한다. 몰락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것(물론 이는 이후의 월터 페이터, 오스카 와일드 등 유미주의자들에게서 두드러지는 점일 터이나), 즉 몰락의 문학적 형상화는 몰락을 역사의 당위로 여기게 만든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음미해볼 만한 점은 (당연하게도!) 아직도 인간의 몰락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문학의 죽음 내지는 종언'이 심심치 않게 회자됨에도 불구, 문학이 헤엄치고 뛰놀 물 웅덩이는 아직 깊고 넓다. 그것은 더러운 물 웅덩이가 아니라 넓고 깊고 푸른 대양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몰락'을 의식적으로 인식하는 한(그 몰락을 애도하든 반기든, 혹은 완전히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몽상가들 - 완전 무삭제판, 태원 5월 할인행사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 마이클 피트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은 영화를 통해 혁명이 가능하리라는 믿음이 결국 하나의 몽상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영화를 통해 사회를 바꾼다고? 당치도 않은. 영화는 사회는 고사하고 인간의 관습, 고정관념마저도 바꾸어 놓지 못한다는 것을 베르톨루치는 고전 영화를 삶보다 더 중요시하는 시네필들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영화를 보고, 숭배하고 그것을 흉내냄으로써 현실의 관습과 고정관념을 조롱하고 전복시키려는 그들의 행동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귀결된다. 영화와 삶이 일치된 세계. 그들은 영화를 통해 혁명으로 이어질 행동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방에 붙여진 마오의 사진이 그것을 대변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족적 세계를 구축해놓고 그 안에 머문다.

 

자족적 세계라고 했지만 그 세계는 불안정한 세계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 소울메이트이기도 한 쌍둥이 남매와 그들 사이에 초대된, 혹은 끼어든 미국인 청년. 이 셋은 안정적인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구축하지 못한다. 한편 그들이 구축한 자족적 세계란 사실 아버지의 집, 아버지의 서명이 담긴 수표가 없다면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사실 역시 우리는 고려해야 한다. 세 청춘남녀들의 행동은 진정 급진적 의미를 갖지 못한다. 단지 영화를 흉내낸 것, 혁명을 흉내낸 몸짓에 다름 아니다. 

 

도대체 가족주의를 깨지 못하고서야 공산주의란 게, 혁명이란 게 가능한가? 이 질문은 근대적 가족 관념이 부르주아적 의미의 소유 개념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는 점을 적극 고려할 때 유효할 것이다. 일찍이 엥겔스는 이 문제를 회피했다.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널리 퍼진 오해 중 하나가 생산 수단만이 아니라 여성(아내)까지 공유한다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말이다.

 

엥겔스가 회피한 이 문제는 1960년대에 다시 대두된다. 1960년대, 신좌파들과 히피들은 혁명과 사랑을 동일시했다. 그들은 바리케이드 뒤에서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든 채 키스한다. 그러나 두 남자가 한 여성을 공유하는 게, 혹은 그 반대 역시, 가능한가? 키스하는 커플은 질투심 가득한 눈들에 둘러싸여 있었을 것이다. 어제 나와 키스한 이가 오늘은 다른 이와 키스하는 것을 본 이들 역시 질투심에 휩싸였을 것이다. 사랑은 항상 질투를 내포한다. 이렇게만 보더라도, 사랑은 근대적 관념이 확실하다.

 

인간은 '소유'를 통해 인간이 된다. '소유'는 근대 주체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가장 기본적 행위이다. '소유'가 없다면 모든 것은 모호해지고 만다. 이름, 재산, 여자, 명성, 각종 브랜드, 문화 상품들, 취향, 지식 등등을 '갖고 있지' 않는다면 인간은 그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망 속에 위치하지 못한다. 주체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관계망에 어떻게든 맞춰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체의 의지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맞춰나가려는 의지가 없더라도, 오히려 그 관계망을 벗어나려 하더라도, 주체는 어느덧 관계망에 포섭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영화 초반의 지포 라이터 장면을 통해 베르톨루치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주체를 규정하는, 인간을 주체로 만드는 이 사회적 관계망을 완전히 거부하려 들 때 인간은 혼란에 빠지고 희미해진다. 단적인 실례로 히피들은 마약을 상용했다. 혁명은 오직 내가 나 자신을 잊을 때만, 몽롱한 상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공산주의는 약의 힘을 빌어 달성될 수 있다. 물론 농담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보다 섬세한 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자족적 세계에 날아들어온 하나의 돌. 이것은 세 남녀를 현실 세계로, 혁명의 한 복판으로 이끌어낸다. 그러나 갈등은 남아 있다. 미국인 청년은 프랑스인 남매를 말리고 프랑스인 남매는 그런 미국인을 뿌리친다. 에뒤뜨 피아프의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가 어지러운 거리 장면 위로 들리면 엔딩 크레딧이 아래에서 위로 거꾸로 올라간다.

 

베르톨루치는 (영화를 통해) 혁명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세대다. 몇 십 년 후 만든 영화 <몽상가들>에서 그는 그러한 믿음이 순진한 것이었음을 인정한다. 혁명을 믿었던 젊은 시절의 행동들은 한때의 '치기' 같은 것이 된다. 그러나 <몽상가들>이 말하는 것이 그게 전부인 것은 아니다. 베르톨루치는 순진한 혁명가들의 젊은 날을 돌아보며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거리 앞에서 누군가는 망설이고 있고 누군가는 뛰어드는 장면에서 멈춘다. 여기서 크레딧이 위로 올라가는 것은 정말이지 의미심장하다. 오늘날 우리는 "혁명이 불가능하다"라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다. 현재는 물론이고, 과거에도 그랬으니까. 우리 선배들은 모두 실패했으니까. 그러나 그러한 결론은 당연히 섣부른 것이고 섣부름을 넘어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혁명을 어린 시절의 치기와 동일한 것으로 여길 수는 없다.

 

거리(혁명) 앞에서 혁명에 대한 회의를 보이는 사람과 망설임 없이 무작정 뛰어드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거기에서 멈춤으로써, 그리고 크레딧을 거꾸로 올림으로써 감독은 우리에게 지금(혁명에 치기와 동일하게 여겨지는)이 바로 진지하게 과거를 돌아보아야 할 시점이라고 제안한다. 이러한 제안은 혁명을 자신의 볼거리로만 대하는 데 익숙해진 오늘날 특히 울림이 큰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혁명을 재현한 영화, 혁명가를 다룬 책이 절찬리에 상영되고 베스트셀러가 되는 오늘날, 혁명은 흥미진진한 볼거리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영화를 통해 혁명이 가능하지 않음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세대에 속한다. 아니 애초에 그런 가능성 자체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우리에게 영화는 그것이 무슨 소재를 다루고 있든, 하나의 오락거리이며, 잘해봐야 문화자본이다. 물론 몇몇 시네필에게는 숭고한 예술일 수도 있을 것이고 수집가에게는 소중한 수집 대상일 수도 있다. 오늘날 영화의 존재 방식은 이 범주 안에서 구성된다. 오락과 자본, 예술과 취향 사이. 이런 시기에 베르톨루치는 영화와 혁명 간의 관계를 생각해보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낡은 오래된, 시대착오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꼭 필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영화가 우리 삶에 어떤 식으로든 의미 있는 것이라면 이 문제를 회피할 수는 없다. 영화를 통해 혁명이 불가능하다면 정확히 왜 불가능한지라도 우리는 물어야 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손택은 이렇게 주장한다. 연민은 쉽사리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까지 증명해 주는 알리바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그러니까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극복하고, 잔혹한 이미지를 보고 가지게 된 두려움을 극복해 우리의 무감각함을 떨쳐내야 한다고.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내지 소개글에서

----------------------------------------------------------------

  손택은 주장한다. 

  그러니까, 그는 항상 명료하게 주장하고, 명료하게 맞서 싸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라는 표현에서도 그의 명료함은 드러난다.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이런!) 그의 단점이다. 단정짓기. 레토릭의 문제라고나 할까. 그는 언제나 명료하게 문제를 짚고, 문제의 메커니즘을 파헤친다. 그리고 항상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그런데, 

  바로 그 적극적인 개입이 문제다. 적극적 개입의 내용을 잘 들여다 면, 결국은 당위의 문제로 귀결된다. 문제를 짚고 그 메커니즘을 파악하는 것은 손택의 몫이다. 그런데, 손택의 문체로, 글의 말미에서는 명시적으로 과제를 부과하고 있기도 한 바로 그 문체로 말미암, 우리는 손택의 작업 이상의 것까지(즉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뭔가 현실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는)를 떠맡아야 한다. 손택이 수사를 동원하여 명시적으로 표현한 그 과제는 그가 그것을 명시적으로 표현한 순간 그를 떠나버린다. 명시적으로 표현한 바로 행위로 인해 그는 뭔가 의미 있는 행위를 한 셈이 된다. 그가 지금까지 그만큼 힘들게 수고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가만 있을 수 없다. 게다가 손택이 과제가 무엇이다, 라고 가르쳐 주고 까지 있는데 말이다. 그가 명시적으로 표현한 순간, 그의 손을 떠난 그 과제는 고스란히 우리의 몫이 된다. 

  물론, 손택이 행동을 촉구하는 상대는 '우리'가 아니라 '미국 정부', 혹은 '보수파'일 수도 있다(아마 그렇게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손택의 책을 읽기라도 하느냐는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손택의 레토릭, 즉 '명료하게 발언하기'와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는 분명 어떤 근본적인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다.   

  그 문제점이 어떤 것인지는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으나, 보다 자세한 메커니즘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그러기 위해 일단, 손택의 책이 널리 읽히는 점에 착안, 그 독자층을 둘로 구분지어 생각해 보도록 하자. '진보적 지식인'과 '잘사는 보수파'로.

  진보적 지식인은 손택의 책을 읽고 나서 어떤 생각을 할까? 일단 택의 논지에 '공감'한다. 혹은, 자신이 미처 생각지 못한 메커니즘 손택이 파악하고 '명료하게' 지적한 데 대해 '탄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탄복은 곧 미처 깨닫지 못한 것에 대한 '깨달음'을 의미하는, 깨달음은 손택의 '명료한' 결론("바로 이것이야말로...")에 힘입, 실제적 행동에 대한 요청이 된다. 진보적 지식인은 현실 사회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며, 사회를 변혁하고자 하는 의지를 지닌 사람이다. 그러므로 손택의 결론은 그에게 일종의 의무로 다가온다. 뭔가 실제적 행동을 해야 한다는 의무. 그러나 개인적 깨달음에서 기인한 실제적 행동이란 과연 어떤 형태일까? 또한, 그게 얼마나 유효할까? 게다가 그 개인이 지식인이라면, 깨달음과 더불어 오는 '실제적 행동의 요청'에 대한 응답은 결국 기껏해야(기껏이란 표현에 양해를!) 또 다른 저술 활동의 형태로 나타날 뿐이다. 만약 그가 진정으로 실제적인 어떤 행동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치더라도 그 실제적인 행동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에(책에 나와있지 않기에)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다. 손택의 책을 읽음으로써 구체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연민'을 수단으로 위험하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관한, 그 상세한 메커니즘뿐이다. 진보적 지식인인 독자는 자신이 감명 깊게 읽은 책이, 행동을 촉구하는 명료한 어투는 있되, 그 행동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전혀 밝혀져 있지 않는 책이라는 사실에 안도할는지도 모른다(그것들이 밝혀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나 할까?). 그렇다면, 결국 '인식 차원에서의 변화 내지는 심화'라는 결과만이 독서 행위가 남긴 유일한 실제적 성과이며 유일한 실제적 행동일 따름이다.

 
  이번엔, 부유하고 어느 정도의 교양을 갖춘 보수파가 손택의 글을 '다 이해하며' 읽었다고 해보자. 보수파는 애초에 실제적 행동을 하려는 의도가 없다. 대개 보수파는 현실에 만족한다. 그러나 손택의 글을 이해하고 손택이 논지에 최소한의 공감을 지닐만한 교양 수준은 갖추었다. 그래 내친 김에 공감에 이어지는 깨달음도 얻었다고 치자. 그리고 예의, 명료한 어조로 표현된 '실제적 행동의 요청' 부분에 이른다. 

  이부분이 핵심이다. 편의상 진보적 지식인과 부유한 보수파로 독자층을 구분지었지만, 사실은 그럴 필요도 없다. 독서 행위는 기본적으로 대리 만족적인 행위란 점을 염두에 둔다면 말이다. '명료하게 말하기'와 '적극적으로 개입하기'가 지니는 근본적인 문제는 이러한 점과 얽혀 있다. 

  '실제적 행동'이 마치 당위인 것처럼 서술함으로써 행동을 촉구하는 것은 아무런 실제적 행동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 누군가(주로, 진보적 지식인)에게는 행동에 대한 부담을 지니게 하는 결과만을 가져다 줄 뿐이며, 그래서 기껏해야 '또 다른 저술 행위'(바로 이를 통해 행동에 대한 부담 역시 제거된다)로 이어지는, 일종의 '악순환'의 고리를 생성할 뿐이다. 현상을 둘러싼 '말'만이 무성해진다. 말을 함으로써 (가져 마땅한) 부담은 제거된다. 물론 인식의 변화와 심화라는 제한적인 성취는 남는다 하더라도.

  누군가(주로, 보수파)에게 손택의 책은 문자 그대로 대리 만족이 될 뿐이다. 그것은 그가 그 스스로의 지위와 (보수적) 가치관을 감안한다면 결코 하지 못했을 말을 손택이 대신 명료하고 속 시원하게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공공연히 손택의 고정 독자임을 자랑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실제적인 변화는 없다. 단지 그의 큰 책장에 약간의 변화가 생기는 것만이 언급할만한 유일한 실제적 변화다. 

  양식 있음의 표지로 손택의 책은 종종 애용되곤 한다. 손택이 그의 책 속에서 가장 경계했던 일이 그가 쓴 책에 대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의 내용에 대해, 그 책이 전해준 깨달음에 대해, 그 책이 촉구하는 '실제적 행동'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는(진보적 독자이든 보수적 독자이든) 실제적 행동을 끝없이 지연해도 좋은 알리바이를 얻는다. 무언가에 대해 말함으로써 우리는 가져 마땅한 부담을 은근슬쩍 쾌락으로 바꿔버린다. 이때, 우리가 나누는 말은 꼭 책의 내용을 다 이해하고 하는 말이 아니어도 좋다. 책을 다 이해하지 못했거나, 심지어는 책을 거의 읽지 않은 경우에도 말하기는 가능하다. 최소한 책의 날개에 적힌 저자와 책에 대한 소개글 정도만 읽어도, 아니 책을 구매하기만 해도, 책장에 손택 컬렉션을 '눈에 띄게' 일렬로 꽂아 놓기만 해도, -에 대해 말하기는, 즉 부담을 쾌락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우리가 눈물(혹은, 얼굴 근육의 찡그림)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연민으로 순화하듯(바로 이것이 손택의 지적하는 바 인데), 우리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기'를 통해, 타인(손택)의 밀도 높은 고민과 현실에 끊임없이 개입했던 치열한 의지를, 가져 마땅한 '부담'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쾌락'으로 바꾸어 받아들이는 데 쉽게 성공한다. 

  결국 인간은 언어 속에 존재한다. 언어로 성곽을, 난공불락의 성곽을 쌓는다. 언어(발화 행위를 통한)가 벽돌이라면 레토릭은 성곽을 단단하게 만드는 모르타르 같은 것. 

  물론 성곽의 두께와 높이, 견고함에 차이는 있을 수 있다. 매우 낮고 약한 성곽도 있다. 그러나 성곽을 높고 견고하게 만들고자 하는 지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 동일하다. 그 지향을, 쉬운 말로 표현하자면 이기심이다. 주체를 확고하게 세우고자 하는 이기심. 그런데 그 이기심은 목표(주체를 확고하게 세우고자 하는)가 뚜렷한 데에 비해 직접 발설되지 않는다. 이기심은 언어를 통해 머나먼 우회로를 돈다. 

  얼마나 멀리 우회하느냐가 중요하다. 비교적 직접적으로 발설되는 이기심은 이기심으로 인식된다. 비난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러나 비난이 대상이 될지언정, 그것은 최소한 솔직하고 순수하다. 머나먼 우회로를 도는 이기심, 이것이 내로라하는 글쟁이들의 방식일 터, 그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기는 커녕, 찬사를 받기도 하지만, 결국은 궁극적인 목표 달성을 위해 머나먼 우회로를 돌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종착지는 정해져 있다(벤야민처럼, 우회로를 돌다 아예 삼천포로 빠져 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드물다). 모든 길은 '주체'로 통한다. 잘 씌어진 글, 논리적으로 구성이 완벽한 글, 이념적으로도 윤리적인, 균형이 잡힌 글을 보면 나는 두렵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연수, 연애의 윤리를 탐색하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달로 간 코미디언>


 

1단계: 너를 흡수하고 싶어

 

  연애란, 가장 밀도 높은 관계 맺음이라 할 수 있을 터, 여기엔 마땅히 윤리의 문제가 개재된다. 여기서 ‘윤리’를 바꾸어 말하면, 최소한의/본질적인(그러니까 에티켓의 차원과는 다른) ‘예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끔, 예의 없는 것들이 때문에 탈이 난다. 슬퍼지고, 괴로워진다. 짜증이 난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 물론, 이해할 수 없지만.

 

  연애가 기본적으로 전제하는 것은 자아와 타자의 합일이다. 물론 그런 합일이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동원되는 것이 환상이다. 환상 속에서 대상은 숭고해진다. 연애란, 자아가 대상을 숭고하게 만들기 위해 골몰하는 그 과정 자체다. 정말이지, 오로지 그 작업에만 골몰한다. 그리하여 세계는 그 대상을 위주로 재해석된다. 세계는 새로운 빛을 발한다. 세계는 꽃밭이 된다. 흡족한 자아.

 

  이것이야 말로 연애의 핵심이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 그러니까 연애가 연애에 어울리는 국면으로 접어드는 순간, 관계의 밀도가 증가하여 분기점을 넘어서는 순간, 그러니까 그저 친밀한 사이에서 사랑(함부로 쓸 수 없으나)하는 사이로, 질적 변화가 이뤄진 순간, 바로 그 순간 연애의(관계의) 윤리는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다.

 

  결국, 연애란, 상대를 흡수하고자 하는 욕망을 (비교적) 거리낌 없이 드러내도 좋은 상태인 것. 상대를 내 안으로 받아들이고, 그 역으로 상대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비교적) 거리낌 없어진 상태. 이것이 기본적으로 자아 중심적인 욕망임은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다음 단계: '시선'과 '이야기'를 나누다


 

  연애의 맨 처음 국면에서 서로 주고받는 것은 시선일 것이다. 상대의 시선이 특별하게 다가올 때, 우리는 직감적으로 안다. 아니, 느낀다. 연애, 혹은 사랑, 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도 전에, 몸 안의 피가 먼저 반응한다. 혈액이 몸을 도는 속도가 빨라진다.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당연히, 체온이, 아주 약간이지만, 상승한다.

 

  시선이 오간 후, 주고받게 되는 것은 이야기다. 귀에 상대의 말소리가 들어오고, 상대의 말소리에 담긴 말의 내용이 들어온다(아무래도 중요한 것은 말의 내용보다는 그 소리 자체일 것이다. 물론 내용도 중요하다. 관계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아무래도 내용이다).

 

  서로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상황에 이르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다. 그러므로 매우 소중하다. 물론 시선을 주고받는 것 역시 흔하게 발생하는 상황은 아니다. 대개의 경우, 하나의 시선은 (그것이 아무리 진심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상대의 시선과 교감하지 못한다. 하나의 시선은 상대의 표면에 닿아 미끄러지거나, 맞닿게 되더라도 오해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운이 나쁜 경우, 치한이라는 오해를 사게 된다). 서로의 시선이 교감하는 경우는 가끔, 아주 가끔, 아아주, 아아아주 가끔 일어나는 일이다.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시선의 맞닿음이란 새로운 우주가 탄생하는 것에 버금가는 효과를 자아내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야기의 교감이란 시선의 교감을 통과한 후에 이뤄지는 것이니 만큼, 굉장히 드물고 소중한 경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탄생한 우주의 빈 공간을 채우는 작업이 이야기의 주고받음, 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나는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라고, 교감, 이라고 쉽게 말했지만,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완벽한 주고받음, 교감, 이란 있을 수 없다. 시선의 교감, 역시 마찬가지다. 교감, 이라 여길 수는 있을 테지만, 그것은 필연적으로 착각이다.

필연적 침묵

 

  김연수 소설의 주요 모티브를 연애로 보는 것이 허용된다면(이미 많은 논자들이 지적한 바 있다), 그의 소설의 주제는 연애의 윤리에 관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그는, 아니나 다를까, 연애 중에 있는, 그러니까 사랑에 빠진 두 인물이 주고받는 이야기에 집중한다(시선이 아니라 이야기인 이유는 그가 지면에 글을 쓰는 소설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라면 시선에 대해 훨씬 경제적으로 다룰 수 있기에 그런 주제를 다루는 것이 가능하지만, 소설에서 시선에 대해 묘사하려면 단지 그 묘사만으로 책 한 권 분량은 너끈히 소요될 것이다. 물론, 그런 시도도 나름의 의미는 있겠지만, 그렇다면 대체 진도는 언제 나간단 말인가? 손도 안 잡고 키스도 안 하고, 서로 쳐다보다가 끝나는 소설이라. 독자들은 지겨워하며 책을 덮어버릴 것이다. 안 그래? 요즘 누가 프루스트를 읽는단 말인가?).

 

  그나저나, 단순히 말해, 김연수 소설의 윤리는 사랑에 빠진 두 인물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주지해야할 사실은 김연수가 이야기의 주고받음이 결코 완벽할 수 없음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당사자들은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남자 인물은. 그의 소설에서 남자 주인공은 결코 여자를, 여자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토록 충만하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순간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렇기에 남자는 더더욱 여자의 결별선언[달로 간 코미디언]을, 혹은 분신자살[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어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어쩌면, 남성의 이야기 방식과 여성의 이야기 방식이 본질적인 차이를 갖고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이런 가설을 뒷받침하려면, 그의 소설에서 남성과 여성이 서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내용과 방식을 면밀히 검토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인데, 시간이 없고 귀찮아서 생략. 누군가 다른 평론가가 이미 했을 수도 있고. 또 하나 언급할만한 사실은, 그의 소설에서 뒤에 남겨지는 이는 항상 남성이라는 것. 이것은 자칫, 독자들로 하여금, 여성이란 결국 알 수 없는 존재, 라는 식의 여성에 대한 남성의 부정적 판타지를 강화하도록 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을 테지만, 그보다는 남성의 이야기 방식에 어떤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가 스스로에 대해, 혹은 상대에, 세상에 대해 이야기 하는 방식을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그가 지닌, 그러나 인지하지는 못하고 있는 어떤 폭력성[비윤리성]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종국에는 소설 속의 그 역시 알게 된다. 그는, ‘연애를 망친 건 나’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떠남의 행동을 하는 건 언제나 여성이지만, 그렇다고 그 결과를 근거로 그녀가 연애 도중에도 불성실했다고, 진심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비난하는 건 윤리적이지도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다. 그런데 대부분의 남성들은 그렇게 비난한다. 그러한 비난조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간신히 그녀가 떠난 빈 자리[견딜 수 없는 쓸쓸함]를 채워 넣으려는 것이다. 이는 분명 비윤리적이며 비논리적이지만, 그 심리적 메커니즘을 이해한다면, 한편으론 안쓰러운 몸부림이기도 하다. 김연수의 장점은 이 모든 연애의 메커니즘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도 적나라한 묘사만으로 그치지 않고 안쓰러움까지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연민’으로 불완전함을 감싸 안는다. 김연수는 여성을, 정확히 말하면, 남성이 착각한 여성을 그 착각으로부터 구원해내는 동시에, 남성을, 그의 착각을 빌미로, 또한 그가 홀로 남겨진 후에 보이는 비윤리와 비논리를 빌미로, 쉽게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무심한 듯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는다. 밝혀내되, 함부로 비난하거나 함부로 분노하지 않는 것. 이것이 김연수의 장점이다. 이러한 시선[태도, 윤리]이 가능한 이유에 대해, 그가 남성 작가이기 때문, 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려니와, 김연수의 소설에 나타나는 여성 캐릭터에 대해 비난하는 것 역시 부당하다.

 

  김연수 소설에서 나타나는 남성과 여성의 이야기 방식의 차이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꼼꼼한 정독을 바탕으로 한 보다 심도 있는 논의가 요구되는 부분이므로 더 이상의 논의는 차후로 미루자. 내가 여기서 중점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앞서 말했듯, 김연수가 이야기의 주고받음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근본적인 것이라기보다 메타적인 것이다. 김연수 소설의 등장인물 자체와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김연수의 소설 쓰기 전략에 집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논의가 시시하고 뻔해질 공산이 크다. 그럼에도, 시시하고 뻔한 논의를 하려는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 김연수 글쓰기 전략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명시적으로 밝히는 작업을 먼저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이런 것이야 말로 문학평론가들이 주로 하고 있는 작업이지 않은가).

  일단, 김연수에 따르면, 인물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는 상대를 변화시킨다. <달로 간 코미디언>에서 주인공 여자는 남자의 이야기 때문에 남자와 사귀게 되고, 마찬가지로 남자의 이야기 때문에 그와 헤어지고, 또 떠난다. 이야기는 현실적인 추동력을 지닌다. 신화나 판타지의 세계에서 말[주문]은 주술적 힘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지만, 그것은 과학적 패러다임에 기반한 현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다가오기 마련이지만, 사실 말 또는 이야기는 현실적인 추동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여전히 주술이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은 말 그대로(literally) 받아들여질 필요가 있다. 

 

  위에서, 이야기가 상대를 변화시킨다, 라고 했는데 이 말 역시 엄밀하게 다시 쓸 필요가 있다. 이야기는 나와 상대(너)의 관계를, 그것도 특정한 국면에서의 나와 너의 관계를 변화시킨다. 김연수 소설의 남성 주인공이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상대를 변화시키리라는 걸 알고 있다. 그는 이야기의 주술적 힘을 알고 있으며, 그리하여 이야기를 통해 상대를 변화시키고자 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상대를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이고자 한다. 이야기의 마력.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문제는 남성의 이야기가 항상 그의 의도대로 관철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의 이야기를 다른 맥락에서 받아들인다. 당연하다. 둘은 서로 다른 존재니까. 그의 착각, 오해, 환상과는 무관하게 그녀는 그의 이야기를 다르게 이해한다. 그가 무심코 던진 농담이 그녀에겐 치명적인 상처가 된다. 그러니, 그녀는 떠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리하여 그녀는 알게 된다. 이제 필요한 것은 대화가 아니라 침묵이다. 이야기의 주술에서 풀려난 그녀, 침묵의 윤리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말없이’ 떠난다. 홀로 남겨진 ‘그’에게 그것은 거대한 수수께끼로 다가온다. 풀려지지 않은 거대한 의문은 곧 거대한 빈 공간으로, 틈새로, 간극으로 그에게 다가오는데, 이를 바꿔 말하면, 꼭 그만큼 그는 자아 이미지에 손상을 입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그녀들이 남겨 놓은 말없음의 자리를 채워 넣으려 몸부림친다. 그것은 분명 이기적인 몸부림이다. 게다가 그 빈 자리는 일차적으로는 꾸깃꾸깃 구겨진 신문지 같은 비논리과 비윤리로 채워진다.


  그러나 그의 몸부림은 이기적인 몸부림이지만, 안쓰러운 몸부림이기도 하다. 어찌됐건 그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자아 이미지에 손상을 입는다는 것은 상당히 치명적인 사태다. 그것도 거대한, 손상을 입었단 말이다. 그렇다면 그 손상을, 빈 자리를 어떻게 채워 넣는다지? 빈자리의 거대함에 경악한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신문지를 구겨 넣는다. 그러고 나서는? 방법은 없다. 침묵의 윤리에 대해, 그 역시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말을 너무 많이 했음을 내심, 무의식적으로 후회하고 있는, 부끄러워하고 중이다. 그 역시 서서히 이야기의 주술에서 풀려나고 있는 중이다. 이야기의 세계를 떠날 때가 온 것이다. 이제, 뭔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할 때다.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라는 듯 그녀가 저기 멀리, 보이지도 않는 먼 곳에서 그를 향해 손짓한다. 어쨌든, 행동에 착수할 때가 왔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몇 가지 방법

 

  후회와 부끄러움의 도가 지나치게 되는 경우, 선택은 죽음 혹은 떠남일 터이다. 그러나 그는 죽거나 떠나지 않고 남아서 계속 이야기를 들려준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계속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을 지키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철학자의 윤리일 뿐, 그것도 비트겐슈타인처럼 ‘지행일치’에 대해 일종의 강박을 지녔던 괴짜 철학자의 윤리일 뿐, 소설가의 윤리는 아니다. 아포리즘을 써놓고 소설이랍시고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며, 백지로 남겨둘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시에서는 가능하지만). 그러므로 그는 그의 후회와 부끄러움을 무릅쓴다. 무릅써야만 한다. 소설은 무엇보다 이야기이므로 씌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약, 우리가 페이지를 넘길 때, 면을 가득 채운 새로운 글자들과 마주하는 대신 백지와 마주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소설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낙장이 있거나 파본인 경우엔 무상으로 교환해 준다. 게다가, 음, 택배비도 무료다.

 

  어찌되었든 계속 쓴다는 것, 여기서 김연수의 글쓰기의 윤리, 조금 다른 식으로 (세속적으로) 표현하자면 김연수 글쓰기의 전략이 드러난다. 그 전략이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기 위해 짜낸 전략일 터인데, 이러한 전략은, 그리고 그런 전략을 이끌어낸 그의 고민[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은, 물론 김연수 혼자만의 것은 아니며, 최근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기는 하지만, 최근의 고민과 전략인 것만도 아니다. 최근의 전략 중, 형식적 실험의 전략을 택한 이로 윤성희가 있다. 정영문은 예전부터 쭉 이 주제에 몰두해 온 경우다. 윤성희와 정영문의 전략은 그런데, 서로 대척점을 이루고 있다. 윤성희가 그 (반드시 있어야 할) 침묵의 빈 공간을 빈 공간 그대로 생략함으로써 ‘겸손하게’ 드러낸다면(생략함으로써 드러낸다는 점에서 보면 역설적이기도. 얼핏, 윤성희의 최근 소설은 뻔한 가족이야기를 내용으로 하고 있고, 그것을 어설픈 유머를 통해, 낭만화[서정화]하는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그가 새로운 리얼리즘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마르케스류의 환상적 리얼리즘과는 다른 것이며, 박민규류의 대책 없는 무규칙 이종 우주적 리얼리즘(?)과는 또 다른 것이다. 윤성희의 유머는 사실, 유머가 아니다. 곁다리가 아니다. 짧은 단문의 연쇄 속에 몇 개의 서사를 겹쳐 넣을 수 있는 능력만으로도 일단 놀라운 것이라 할 수 있을 터인데, 그 사이 사이 반짝이는 유머들까지! 그것은, 리얼리즘에 대한 진지한 천착에서 나온 유머, 아니 윤리라고 보는 것이 옳다. 동문서답의 윤리랄까. 그런 것을 윤성희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글쓰기의 윤리를 획득한다면, 정영문은 빈 공간을 과도하게 채우려는 전략을 취한다. 그런데 이때 그가 채우려 드는 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그저 말 뿐인 말, 한참을 계속 되지만 읽다보면 문장의 뒷부분이 앞부분을 통째로 지워버리는 그런 말들이다. 그러므로 시각적으로 보기에 페이지에 넘쳐나고 있는 그 말들은, 마침표가 대체 어디 있는지 찾아보기 힘든, 쉼표와 쉼표로 연결된 그 문장들은, 결국 침묵과도 같은 것이다.

 

  김연수의 경우, 그는 침묵에 대해 직접 말하는 전략을 취한다. 윤성희가 침묵 그 자체를 사이사이에 끼워 넣음으로써, 정영문이 쓸데없는 말을 넘쳐나게 함으로써 위악적으로 획득한 그 침묵의 윤리에 대해, 김연수는 직접 말한다. 이거야 말로, 인파이터다. 김연수가 우리 소설사에서 소중한 존재가 되는 이유다. 가령, 이런 거다.

 

 … 나는 아무도 없는 편집실에 앉아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들어. 처음에는 이야기를 따라가지만, 나중에는 감정의 흐름을 지켜봐. 그럴때면 그들의 인생이란 이야기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이야기 사이의 공백에 있는 게 아닐까는 생각마저 들어. 그런데 편집은 목소리 사이의 공백을 없애는 일이잖아.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에서 기침이나 한숨 소리, 침 삼키는 소리 같은 걸 찾아내서 없애는 거야. 그러면 이상하게 되게 외로워져. 그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릴 테이프를 잘라내면 외로워진단 말인데……. 어, 저게 뭐지?

- 「달로 간 코미디언」

 

  그녀가 그에게 들려준 편집 이야기는 분명, 김연수 자신의 이야기다. 작가의 목소리가, 비록 작중 인물의 목소리를 빌었다는 최소한의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비교적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은 소설적 역량의 부족으로 볼 수도 있는 문제다. 그런데, 인용된 부분의 백미는 “말인데……. 어, 저게 뭐지?”의 부분이다.

 

  작중인물로 하여금 이야기 사이의 공백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면서, 김연수는 말줄임표의 심연, 공백을 또 다른 층위[소설 내적 층위]에서 동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결과 그의 직접적인 교훈(주제 의식)은 생경하게 드러나지 않고, 소설 내적 논리 속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흡수되게 된다. 물론 여기서 ‘작위’를 느끼는 독자도 있을 수 있겠지만.

 

  ‘작위’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어지는 부분에서 김연수는 그녀가 “어, 저게 뭐지?”라고 하며, 말을 중단한 사실적 이유까지를 제시하는 동시에(부엉이였다), 그 사실에 해석까지를 덧붙인다. 이런 식으로,


  그리하여 인생이 바뀌는 순간의 망설임이나 두려움은 릴 테이프를 돌려가며 그녀가 가위로 오려낸 조각들과 함께 사라졌다. 어디로? 우주 저편으로. 마치 그 말을 하면서 호수의 윤곽을 따라 왼쪽으로 크게 방향을 틀던 붉은색 아스팔트 산책길의 모퉁이에서 그녀가 “저게 뭐지?”라고 말하며 달려가 바라본 부엉이처럼 말이다.

- 「달로 간 코미디언」


  작위적이다. 아니, 그렇게 평가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아, 그렇지만, 사변적이고 작위적인 냄새가 나는 걸 코를 막는다고 맡지 않을 수 있을까? 글쓰기의 윤리에 있어서, 그리고 그 방법론에 있어서 나는 김연수에 심정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작위적이란 혐의를 완전히 벗겨 낼 수는 없다. 아니, 모든 소설은 (인간 의지가 개입된 창작물이란 점에서) 작위적, 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그렇게 말함으로써 김연수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김연수는 정말이지 작위적이다. 그는 소설가다운 뻥을 치는 데 능숙하지 못하다(김영하와 비교해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그는 끝까지 정직하며, 끝까지 윤리적이고자 한다. 그의 소설의 작위성과 인물, 사건의 전형성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문제의 핵심(본질과는 다른)을 곧바로 파고드는, 적의에 찬 상대의 숨소리와 시선을 눈 바로 앞에서 느끼는 인파이터의 절박함, 문제의 거대한 허리를 부여잡고 온 힘을 다해 씨름하는 씨름꾼의 절망감. 그럼에도 반칙을 하지 않는다. 일단 자신이 동의한 도덕이라면, 자신의 내면에 확고히 세워진 윤리라면, 예외 없이 지킨다. 대충 모호하게,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가는 법이 없다. 그게 그의 매력. 그를 개인적으로 만나보고 싶게 만드는. 허리라도 부여잡고 울고 싶게 만드는. 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두 번째 전략은, ‘역사’이다. 김연수가 빈 공간에 채워 넣는 것. 그리고 역사에 관한 탐색을 위해 김연수의 주인공들은 비로소 ‘행동’을 한다. 그와 그녀가 주고받던 이야기의 세계가 다분히 자족적이고 개인적인 장소였다면, 그녀가 떠난 후에 그는 역사 속으로 내팽개쳐진 셈이다. 역사란, 우리 모두의 이야기, 라고 할 수 있을 터, 사실 오늘날의 우리는 역사에 별 관심이 없다. 모두가 개인주의자이며 쾌락주의자일 뿐, 역사에는 관심이 없다. 누구나 연애를 하고, 또 하려고 하지만, 적어도 섹스 파트너라도 두려고 하지만(그걸 연애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연애의 윤리에 대해 고민하는 이는 없다.

 

  일견 연애 서사로 파악할 수 있는 김연수의 소설들이, 그의 치열한 고민들이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지점이 역사인 것은, 역사야말로 연애의 윤리를 획득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란 점에서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 왜 당연한가? 왜 연애와 역사가 결부되는가? 연애란 다분히 (착각과 오해가 개입된) 자아 중심적 서사임은 앞에서도 말했다. 그 자아 중심성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타인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소한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타인의 이야기란 곧 타인의 역사다. 타인의 역사란 곧 우리 모두의 이야기, 곧 ‘역사’다.

 

  그리하여 자신을 떠난 '그녀'들을 이해하기 위해 그녀들의 뒤를 쫓던 김연수의 '그'들은 이야기의 후반에 이르러, 필연적으로 역사와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그 자신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그녀의 역사(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의 역사(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들은 지금껏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역사의 무게와 크기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위압감에 경악하면서도 역사의 끄트머리를 놓지 않고 나름 치열하게 탐색한다. 김연수 소설의 서사 구조를 도식적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역사에 대해 별로 관심 없는 남성 주인공이 등장하는데(학생 운동을 하기는 하나 신념은 없다, 라는 식으로 형상화된다), 그는 멋지고 당당하고 (무엇보다도) 섹시하지만, 뭔가 상처(이 역시 모호한 매력의 한 요소)를 지니고 있는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

 

  그녀의 멋짐과 당당함과 섹시함에 홀려, 그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최소한 그렇게 믿게 되고) 그리고 그녀를 '이해'하려고 하지만, 그는 그녀의 상처에 대해 알지 못한다. 알려고 노력은 하지만, 그녀는 쉽게 그 상처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쉽게 말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그나 독자들은 답답하겠지만) 그녀의 침묵에 대해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런 이유로 그는 그녀의 상처를 대충 덮어둘 수밖에 없는데, 일단 상처를 외면하기로 하면, 연애의 핑크빛 국면이 펼쳐진다. 그러나 그 국면은 언제 파국으로 치달을 지 모른다. 덮어두긴 했지만 상처는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다. 나아가 그는 그녀가 왜 스스로의 상처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는지, 거기까지도 (어렴풋이 나마) 알고 있으며, 그것이 그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적 태도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그녀의 상처를 그가 감당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 자신 아주 잘 알고 있기에 그렇다. 상처가 열리는 순간, 다시 말해 진리가 발설되는 순간, 관계는 파탄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진리 자체는 결코 발설되어서는 안 된다. 다만 진리를 둘러싼 이야기들(그것들 중 일부는 진리에 육박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서스펜스가 발생한다)이 오간다. 



  이야기가 오가고, 오가지만, 그것은 결코 진리가 아니기에, 그의 내부에 서서히 불안감에 피어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자괴감과 죄책감이 결합된 불안감이다. “내가 너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거야?” 즉, “우리, 사랑하고 있는 거야?”라는 식의, 부정의 대답이 예정된 부가 의문문 같은 질문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그거 사랑 맞아? 어리석은 질문이다. 그는 사랑을, 진리를, 타인의 상처를 온전히 이해(감당)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스스로 아주 잘 알고 있음에도 계속적으로 사랑 타령을 하는 이유는 뭘까? 어리석어서?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최소한의 노력만큼은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렇다면, 그것은 가식적 태도인가, 윤리적 태도인가? 한 마디로 판단키는 어려운 문제. 

 

  사랑이라니, 선영아, 라는 식으로 대답한 적도 있는 김연수지만, 아무래도 그런 식으로 눙치고 지나가기엔 성에 차지 않았나 보다. 김연수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정면으로 뛰어든다. 뛰어드는 곳은 역사다. 그녀가 직접 들려주지 않은, 침묵의 윤리에 의거, 들려주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그 이야기(그녀의 상처의 원인)를 듣기 위해, 김연수 소설의 인물들은 (직접 뛰어들던 기세는 좀 무안하게도) 어쩔 수 없이 우회로를 택한다. 그 우회로는 바로 우리 모두의 이야기, 즉 역사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진다.

 

  인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 비단 신체 뿐 아니라 영혼이라는 주장이 그 아무 근거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 주장되어 왔으며 또한 널리 받아들여져 왔음을 안다. "영혼이 없다면 쓸쓸하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영혼을 믿고 싶어요." 이건 영화, <기담>에서 나오는 대사이지만, 영혼의 존재를 믿는 이들이 지하철 안내 방송처럼 자동적으로 말하는 가장 흔한 근거이기도 하다. 물론 논리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근거’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저 허무함을 회피하기 위한 값싼 욕망에서 비롯된 발언인 것은 아닐까.



  신체와 영혼이란 개념쌍을 다음과 같이 바꿔보면 어떨까? (인간) 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은 신체 뿐 아니라 그 신체에 새겨진 그/녀의 역사, 즉 이야기(story)라고. 곧 신체-이야기.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그/녀의 신체와 배경과 기타 조건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역사까지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고.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한 그/녀의 이야기를, 나아가 그/녀의 말하는 이야기 방식까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고(그것을 ‘가면’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는 ‘유령’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참고로, 김연수 데뷔작의 제목은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이며, 최근의 소설집은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란 제목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연애에 있어서 말이 통한다는 것은, 이야기가 통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야기’야말로 ‘영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나귀들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여행과 출국, 이주에 대해서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이야기들을 듣고 자랐다. 그러나 우리가 들은 이야기들은 모두 어느 정도는 동화와 같은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여행을 사랑하고 즐기게 된 이후로 여행은 패션이 되어 버렸기에 거기에 무거움의 표상으로서의 진정한 단절이 언급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빅브라더의 통제 시스템없이도 인간은 매우 자연스럽게, 언제나 모든 경우에 '연락 가능한 상태'에 놓인다... 그 증상은 조지 오웰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우리가 전제주의에서 멀어질수록 놀랍게도 더욱 뚜렷해지며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허용하고 즐기기까지 한다는 점이다. 이제 '닿을 수 있는 상태, 연락 가능한 상태'에 머무는 것은 항생제나 방부제처럼 우리의 (사회적) 목숨을 지탱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언제나 연락 가능한 상태가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이제 여행은 없다는 사실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자주 여행을 떠나는데, 어떤 종류의 단절도 끼어들 틈이 없고 어느 누구와도 진정한 의미의 이별을 경험하지 않으며 그야말로 돈 이외에는 아무것도 지불할 일이 없다.
 

  ... 그와 같이 간혹 약속된 부유함을 포기한 젊은이에 대해서 들을 때마다 나는 비슷한 결정을 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생각나곤 했다. 그런 젊은이들의 경우는 죽음을 앞둔 노인이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결정이리라. 비트겐슈타인의 일생의 많은 부분이 나를 감동시켰지만 그중에서도 그가 막대한 유산상혹을 포기했고 시골의 무지한 농부들의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자진해서 그가 사랑해 마지 않던 문학이나 예술, 위대한 정신도 갖추지 못한 작고 가난한 마을 트라텐바흐의 교사로 간 일은 매우 인상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사건을 넘어서 멀고 먼 '여행'에 속하는 일이었다.

 

  ... 자신의 교육을 이해할 수 있는 몇몇 머리 좋은 소년들에게 그는 깊은 애정을 기울였고 방과 후에 그들을 남게 해서 라틴어를 비롯한 특별 과외 수업까지 베풀었다. 그러나 그들의 부모는 아무도 아이들을 상급 학교에 진학시킬 마음이 없었고 마침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리란 공포에 미리 사로잡혀 버린 학생으로부터 공부를 그만두고 공장에 취직하겠다는 통보를 받고 만다. 그는 절망을 느꼈다. ... 그는 황무지에서 이상의 광채를 찾아 헤맸던 것이다. 바로 황무지에 있기 때뭉에 더욱 빛나는 그 광채, 출신과 환경에 의해 훼손당하기 이전의 인간의 마음속에 별처럼 빛나는 지성과 숭고한 정신을 발견하기 원했다. ...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고 그는 트라텐바흐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미움만 받은 채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 배수아, <당나귀들> 251-3면

 

------------------------------------------------------------------------

 

  .... 라고 배수아는 쓰고 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아마 트라텐바흐에서 어떤 책에서도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그의 결과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참담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갈데없는 이상주의자였던 비트겐슈타인은 시골 마을에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 한다. 굳이 시골의 무지한 이들에게 간 이유가 있다. 그도 역시 존 로크의 '백지설'을 신봉한 것일까. 아니면 당시의 학문적 풍토와 문화적 분위기에 깊이 실망한 탓일까. 

 

  무지한 이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전달하는 것이 여러모로 '효율적'임을 계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떤 식으로 설명을 하든 결국 그가 낭만주의자라는 사실을 드러내기엔 모자람이 없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이란 게 언제 어디서나 존재함을 그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전 재산을 포기하고 시골 마을로 향했을 것이다.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나 마음 놓고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서. 

 

  하지만 이런 식의 결정은 그가 성 안토니우스처럼 사막으로 들어가거나 할 때에만 완벽히 그 의도가 실현되는 그런 결정이다. 조금은 상투적인 말이 되겠지만, 우리 삶은 낭만성(이상)과 현실성이 상보적 계열을 이루고 있는 선분이며, 그 선분 어딘가의 지점에 우리들 각자가 위치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낭만성(이상)의 극단으로 치달았다. 젊은 나이에 전재산을 포기하며. 그가 누렸던 모든 학문적, 문화적 성과들을 포기하며. 그리고 무식쟁이들 속으로 들어갔다. 

 

  이상을 추구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고독을 동반한다. 모두에게 동시적으로 추구되는 이상이란 없다(증거: 모든 혁명은 실패로 끝난다.) 아니 그렇게 추구될 수 있는 이상은 더 이상 이상이 아닐 것이다. 이상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막으로 들어가야 했다. 깊고 깊은 동굴로, 갈라진 빙하의 틈새로. 그리고 고립된 그 장소들에서 그 나름대로의 꿈을 꾸어야 했다. 

 

  젊은 낭만주의자였던 그가 했던 것은 시골의 무식쟁이들의 자식들을 현혹하여 사막으로, 동굴로, 틈새로 같이 가자고 한 것에 다름 아니다. 가진 자였던 그가 못 가진 자들의 틈으로, 학문과 문화를 누렸던 그가 학문과 문화가 없는 (그에게는 사막처럼 느껴졌을) 불모의 공간으로 '하강'하기란 쉬운 일이었을 터. 그러나 시골의 무식쟁이들이 도시로, 압도적인 문명과 문화의 공간으로 끼어들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만 방심하면 압사하게 될지도 모른다! 본능적인 공포. 

 

  전재산을 포기한다는 것은 (특히, 젊은이로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위대하다. 그러나 이후의 행보를 통해 그는 자신의 위대성을 과시하려 한 셈이다. 그는 어쩌면 자신의 시도가 결국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시골에서 교육자 노릇을 자처한 것은 이미 한 극단으로 기울어진 선분상의 자신의 지점을 수정하여 균형감각을 회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일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었던 그로서는(+100) 현실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0)만으론 균형 감각을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현실의 무게(-100 이상)에 짓눌린 사람들을 찾아간다. +100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을 결코 갖지 못하게 하는 현실의 무게를 체감하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배신감과 참담함, 마을 사람들의 미움이 뒤따라 온다. 그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래도 그는 행복할 것이다. 내면의 균형 감각을 찾았으니까.

 

  그의 시대와는 달리, 지금의 세상은 모두가 교육과 문화의 혜택을 받고 있다. 대중 매체란 게 생겨 모두들 똑같은 것을 보고 들으며, 책도 구하기가 쉬워 언제든지 원하는 책을 읽을 수 있다. 마음만 있다면! 가공할 만한 건 인터넷이다. 이제 시골로 내려갈 때, 비트겐슈타인처럼 안이한 마음으로 내려갔다가는 큰 코 다치기 십상이다. 일류대 진학 비법이나, 재테크 요령이라도 숙지하든가, 아니면 최소한 마을 노인들 컴퓨터 교본이라도 들고 가야지, '학문의 순수성'이라든지, '이상' 같은 걸 들이대면 미움만 두 배로 늘어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살아서 마을에서 나오는 것조차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를 정의하자면, 취향의 시대, 라 할 수 있겠다. 물론 과거에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취향'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이 한정되어 있었다. 취향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이 제한되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들 대다수가 '무취향'이거나 '저취향'이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속물'. 더더욱 큰, 본질적인 문제는 누구나 취향을 가지고 있고 취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현재도 역시 대다수가 무취향이거나 저취향이라는 것이다. 다 버리고 내려갈 시골도 없다. 어디든 네트워크가 깔려있다. 벗어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처럼 영웅적인 행위를 우리는 결코 할 수 없다. 그가 한 것처럼 깨달음의 과정을 천천히 밟아 나가 균형에 도달할 여유도 가질 수 없다. 그처럼 행동하면 어떻게 될지 우리는 모두 '이미' 알고 있다.

 

  모든 것이 이미 알려진 시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복제하며 살아간다. 비트겐슈타인은 신해철에 의해 복제된 바 있다. 문제는 그렇게 하면서도 우리가 그렇게 하는 지 알고 있지 못하다는 데 있다. 모두들 '창의성'과 '독창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생각해보면 거의 매일 '신선한' 것들이 튀어 나오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루함을 느낀다. 어느덧 '창의성'과 '독창성'이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냥 안방에 앉아서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거나 마우스를 클릭만 함으로써 그 모든 것들을 얻을 수 있다. 새로운 것들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으며, 그리하여 어떤 것도 결코 진정으로 새롭지 않다. 

 

  재밌는 것은 알고 보면 누구나 거기서 거기일 데이터베이스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모두 다름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다만 주장하기에만 그치고 있지 않다. 실제로 소통에 힘겨워하고 있다. 재미있는 현상이다. 어차피 거기서 거기일 정보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차이를 느끼고 그것 때문에 힘겨워하다니. 

 

  취향을 결정짓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남과 다른 나로 규정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현대 사회에서, 그게 '정보'가 아님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결국 선분상의 위치인 것인가? 내 안의 '우선 순위'의 문제인 것인가? 이상적인 것을 우선시하느냐, 현실적인 것을 우선시하느냐?

 

  진정성이 상실된 현대에, 무슨 취향을 가졌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하는 생각은 이미 누군가 했던 생각이고, 내가 하는 행동은 이미 누군가 했던 행동인 것이다. 이런 깨달음만이 현대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깨달음인 것 같다. 이 역시 진부한 깨달음이지만. 비트겐슈타인이 부럽다. 뭘 어쨌건, 그의 결심은, 그의 이상은, 그의 환멸은, 뒤이은 그의 깨달음은 온전히 그의 것이니까. 이런 부러움도 현대인만이 가질 수 있는 부러움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