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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 그 삶과 음악 ㅣ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 15
말콤 헤이스 지음, 김형수 옮김 / 포노(PHONO) / 2015년 6월
평점 :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되면서도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위대한 예술가가 많지만 모든 예술가들이 다 가난하지는 않았다. 가난과 신분때문에 다가설 수 없는 상대를 향한 사무치는 연정을 예술로 승화시킨 예술가들이 많이 알려졌지만, 순전히 자신이 가진 매력으로 순탄하게 연인을 가질 수 있는 예술가들도 많았을 것이다. 리스트는 후자였다.
헝가리의 영웅, 오스트리아의 국민오빠, 유럽의 전 백작부인들의 마음을 빼앗은, 수려하고 훤칠한 외모와 당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기교를 가진 피아노 연주가로서의 그의 젊은 시절은 화려했다. 고달픈 애정문제를 제외하면 노년까지 그의 인기와 예술 인생은 순탄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자식을 잃는 아픔, 자식과 결별하는 아픔도 겪는다. 만화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장발로 초절정기교를 선보이며 누구도 시도해보지 못했던 화려하고 기술적인 피아노 연주를 하는 젊은 리스트는 예술가적 감성과 동료를 배려하는 의협심까지 갖추고 있던 엄친아였던 것 같다. 자신의 인맥과 음악계의 위치를 이용해서 쇼팽을 비롯한 많은 재능있는 음악가들을 지원하고 교류했고, 말년에는 그의 레슨을 받으려고 물밀듯 밀려드는 학생들에게 레슨비를 받지 않았다.
귀족 출신은 아니었지만 귀족보다 더 귀족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기에, 귀족이라는 소문을 불러왔고,그리 넉넉지 않은 가정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아이의 재능을 일치감치 알아본 부모의 헌신적인 교육열이 그를 모짜르트가 그렇게 했던 비슷한 나이대에 비슷한 데뷰와 성공과 영예를 누리게 했다. 오스트리아 동부 헝가리와의 국경 근방의 라이딩이라는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헝가리 국민으로 새기고 집시 음악에 대한 애정을 음악에 반영했으며, 늘 어떤 역사적 사건 속에서도 '조국' 헝가리에 대한 애국심을 표현하였다.
오스트리아 태생임에도 불구하고 헝가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된 이유는 자세한 설명이 없어서 잘 이해되지는 않지만, 그의 증조부가 하오스트리아 출신의 농노로, 헝가리 봉건 영지로 이사해 소작농이 되면서 선조때부터 헝가리인들과 교류하였고 영주와 주변인물 대부분이 헝가리인이서가 첫번째 이유일 듯하고,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 지역이 헝가리 북동부 평야라는 드넓은 공간을 향하는 곳이었고 그가 살았던 시절 두 나라의 구분선이 불분명했기 때문에,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헝가리로 인식했을 가능성도 있겠다. 어쨌든 리스트의 헝가리적 정체성은 평생 그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숱한 여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을 당대 최고의 연주자 리스트, 모든 예술적 성취가 어린 시절부터 순탄하게 시작되었음에도 뜻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사랑이 그것이다. 그의 사랑은 언제나 금지된 사랑을 향해 있었다. 당시 어린 나이에 집안끼리 정략 결혼의 희생이 된 젊고 매력적인 백작 부인들은 남아도는 시간과 예술적 재능과 이성에 대한 열정을 애정없이 결혼한 늙은 남편에게서 찾을 수 없었나보다. 리스트 삶의 여정에 있어서 끝까지 살아남은 그의 딸이 결혼한 상태에서 시작한 바그나와의 관계까지도 포함해 그들의 애정관계를 보면 <보바리 부인>은 혹시 당시에는 흔한 시대적 산물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인터넷을 치면 바람둥이라고 나오지만, 사실 이 책을 통해 그의 삶 전체를 훑어본다면, 그가 그리 바람둥이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단지 금기된 사랑에 끌리는 어쩔 수 없는 예술가적 기질이었을 지도 모른다. 첫번째 상대 마리 다구는 리스트가 22세 때 만난 일곱살 연상의, 두 자녀를 둔 백작부인으로, 둘은 오스트리아에서의 애정행각에 대한 비난을 피해, 연주회 도중 기절하는 시늉을 하고 스위스로 도피 생활을 하며 딸까지 낳게 되지만, 성격차이로 그들은 헤어진다.
특히 리스트의 두번째 사랑이자 진정한 후원자였던 카톨린 비트겐슈타인 부인은 그 자신이 친정에서 상속받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우크라이나 영지 때문에 친척들, 남편, 남편식구들, 카톨릭교구와, 러시아 정부 등의 이해관계에 휩싸여 수없이 많은 난관에 부딪힌다. 가까스로 로마 교황에게까지 올라가서 허락받은 결혼은 결혼식 직전에 철회소식에 봉착하는 좌절을 맞게 되고, 둘은 서로를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결혼을 포기한 채 따로 살아간다. 당시 그만한 사회적 위치에서 아무리 세상이 인정한 관계라고 하더라도 공식적인 동거는 불가능했었던 듯 싶다.
당대에는 유럽을 통채로 흔들던 음악가의 음악이 왜 당대 비슷한 위치였지만 보다 보수적이었던 쇼팽이나 멘델스존, 브람스, 슈베르트에 비해 덜 플레이되는 걸까? 그의 음악은 젊은 시절 그의 한계를 뛰어넘는 현란한 연주 덕분에 작곡면에서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되었을 수도 있다. 당대 리스트의 음악은 진보적 젊은 시절 낭만파들의 음악적 관습을 깨고 화성의 파괴와 새로운 형식을 추구한다. 그들은 논쟁의 한복판에 있었다. 한계를 깨고자 시도하는 그의 음악은 때때로 너무 미래지향적이었고, '거슬릴 정도의 실랄한 화성과 불규칙적인 리듬 강세를 사용하여 마치 후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미리 듣는듯'하고, '극과 극을 오가는 화성과 전혀 타협하지 않는 작법으로 후대에게 예술적인 도전 과제를 부여'하기도 했다.
리스트 음악은 그의 생애동안 계속해서 개정을 거듭하여, 여러 판본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1926년에 쓴 <12개의 대연습곡>은 향후 <24개의 대연습곡>과 <초절기교 연습곡>의 초석이 되었고, 이것들은 여러번 손질되어 개정이 거듭되어졌다. 완벽해질 때까지 꾸준히 탈고를 거듭하는 쇼핑과 달리, 즉흥 연주에 능한 리스트는, 즉각적으로 생겨나는 영감들을 음악으로 옮겼고, 젊을 때부터 늘 인기 절정 상태의 리스트는 그러한 즉흥곡들을 바로 초연하고 출판하는 과정을 통해 수많은 곡들을 발표했다. 피아노 연주가로서의 주가가 높을 당시에는 교향곡과 가곡들을 피아노 편곡으로 바꾸고, 동료 음악가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스스로 피아노 곡으로 편곡한 그들의 음악을 초연에 연주함으로서 곡을 알리는데 일조하였다.
또한 피아노 음악의 여러 판본은 당시 피아노 발달사와 함께 한다. 지금 보다 힘이 약했던 피아노를 대상으로 한 작곡이, 오늘날의 그랜드 피아노와 같은 형태의 피아노를 만났을 때,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과다한 기교와 과시를 훝날 대폭 삭제 수정하게 되고, 후대의 피아니스트들도 연주 가능한 상태가 된 것이다.
이 책은 리스트의 생애를 세 기간으로 나누어 그의 사생활에 대해 전면 할애하고, 그 기간동안의 음악 세계를 다시 세 챕터에 나누어 리스트의 음악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워낙 많은 곡들을 설명하고 있어서 각각의 곡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읽을 수는 없지만, 대표적인 몇몇 곡들은 때로 페이지 전체를 할애하기도 한다. 요즘 신씨의 표절 문제가 한창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중요한 점은 리스트의 음악이 당대 어떤 음악가의 음악과 서로 연결되어 있고, 또 자신 스스로의 음악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점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어떤 예술도, 학문도, 백지 상태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선대의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영향받은 모든 것들이 체화되어 내것이 되고난 후,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 당대는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더욱 다른 사람의 곡을 변형해서 출판하는 것이 하나의 흐름이었었던 것 같다. 젊은 시절 피아니스트로서 유럽 곳곳을 순례하던 리스트에게 다른 음악가의 음악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한다는 것은 그 음악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과 같은 영예로운 면도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스스로의 음악을 계속해서 개정해나간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오늘날로 따지면 자기표절이라 주장할 틈도 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쩌면 만일 쇼팽처럼 일찍 죽었다면 위대해지지 못했을, 또 개정하지 않았으면 오늘날의 그랜드 피아노로 연주 불가였을 음악들을 위대한 음악으로, 영원히 살아있는 음악으로 완성시켰다.
몇일을 리스트의 음악을 들으며 다니는데, 전에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소개된 <파가니니 주제에..>를 비롯한 아주 유명한 몇몇 곡들을 제외하고는 매우 생소하고 낯설면서 현대적인 느낌이 많이 나는 것 같다. 때로 피아노 하나로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나 싶을 정도의 음악을 들을 수도 있다.
포노의 다른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본문에 나오는 음악들의 일부가 두 개의 CD로 제공된다. CD 포함 2만원이다. 책 두께는 333쪽으로 얇은편이지만 시리즈의 책 답게 체계적이고 아주 유용한 부록으로, 등장인물, 용어집, 음반수록곡 해설, 비교 연표, 등이 정교하게 잘 편집되어서 제공된다. 삶과 예술을 모두 한 권에 넣었으므로 아주 디테일한 내용을 볼 수는 없지만 음악과 함께 제공되고, 본문 중 CD에 들어 있는 곡을 언급할 때에는 트랙 넘버까지 친절하게 표시되어 있어서 이보다 더 친절할 수 없는 구조를 가진 리스트 입문용으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