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 불확정성의 과학을 열다 작은길 교양만화 메콤새콤 시리즈 4
이옥수 지음, 정윤채 그림 / 작은길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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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 독일에서 과학자의 삶을 산다는 것은 두 가지 중 하나의 선택을 의미한다. 조국을 등지고 망명자로 사느냐, 히틀러에 동조하든 그렇지 않든 결국은 동조자로 낙인찍힐 수 밖에 없는 협력 체계 속에서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나치의 요구를 묵묵히 수행하는 삶을 사느냐. 


독일로 돌아오는 배는 텅 비어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직전, 느린 중성자에 의해 일어나는 핵반응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엔리코 페르미를 만나고 시카고에서 돌아오는 하이젠베르크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유대인 아내를 둔 페르미는 무솔리니 정권 치하의 이탈리아를 빠져나와 미국으로 망명한다. 자신을 만나러 온 하이젠베르크에게도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연구가 주어지는 미국에서의 삶을 권한다. 어떤 선택이 옳을까. 하이젠베르크는 히틀러의 개가 된 또 다른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슈타르크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독일로 돌아오는 선택을 한다. 전후 독일 과학의 재건을 위해서다. 이 때 이미, 오토 한이 발견한 원자 핵분열이 폭탄의 형태로 이용될 것이고, 전쟁시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원자물리학자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폭탄 개발에 동원될 것임을 알아차렸다. 

 

 

하이젠베르크를 기다리고 있던 소집 영장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예상대로 막스 플랭크 연구소의 전신인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였다. 전쟁은 그가 평생을 존경하던 보어와의 관계도 파괴시킨다.  하이젠베르크가 자의이든 타의이든 원자로 실험을 계속하는 동안 독일군에게 점령당한 덴마크에 살던 보어는 후에 영국으로 도피하여 오토한의 핵분열 소식을 미국 망명 물리학자에게 전했고, 이들은 다시 아인슈타인에게, 아인슈타인은 루즈벨트 대통령으로 전달 전달, 맨하탄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그리고 보어는 맨하튼 프로젝트의 자문 역할을 맡는다. 이 때의 원폭 개발 경쟁에서 독일은 연합국이 벌인 다각도의 작전으로 우라늄 및 중수 확보에 어려움을 겪은 반면, 엄청난 비용과 우수한 망명 과학자들로 채운 미국은 폭탄 제조에 성공한다. 패전 이후, 원자로를 개발중이던 독일의 우라늄 클럽 연구자들이  흩어져서 억류 생활을 하는 동안 미국 네바다에서는 최초의 원폭 실험에 성공했고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26만명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간 이 소식에 1938년말 최초로 우라늄 원자에 중성자를 충돌시켜 바륨원자를 얻어내었던 오토 한은 절망감과 함께 죄책감을 느낀다. 진리를 찾기 위한 순수한 열망과 열정의 결과가 순식간에 엄청난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설마의 우려는 현실화되었다.

 

 

패전 독일은 12개국이 공동으로 만든 CERN 유럽공동연구소에 동참함으로써 독일 원자 물리학의 명맥을 이어나간다. 전승국이 규정한 원자로 가동 금지 조약으로 인해 독일이 원자로를 연구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후 하이젠브르크는 정부의 위촉을 받고 독일은 원폭 제조를 않겠다는 국제적 약속을 바탕으로 원자로 개발을 승인받는다.  그 전쟁을 겪고 히틀러를 겪고 원자로가 히로시마의 삶들을 어떻게 파괴했는지를 기억했던 그였지만 여전히 그는 새로운 원자로가 연구용으로 개발되기를 희망했다. 독일이 일본에 비교해 아무리 과거사를 열심히 청산했다고 하나, 그들의 피 속에 감추어진 나치의 잔재는 완벽한 청산을 보장하지 않은 듯하다. 정부는 원자로를 막스 플랭크 연구소 근처가 아닌 칼스루에 건설함으로써 원자 기술을 군사적으로 이용하려는 목적을 은밀히 드러낸다. 1957년 연방정부의 수상 아데나워는 '전술적 원자무기는 기본적 포병의 계속된 발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발언으로 핵폭탄 개발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하이젠베르크는 과학은 대화로부터 시작된다고 믿었다. 그의 삶은 뮌헨의 대학시절 그의 천재성을 처음으로 발견했고 그를 형편없는 실험 물리학 구두 시험 점수로부터 구제해 학위를 딸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조머펠트 교수,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간 동료 과학자 파울리 늘 대화했다. 이후 보어 축제에서 만난 보어교수를 찾아 덴마크 코펜하겐의 연구소에서 세계 곳곳의 뛰어난 과학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다. 괴팅겐에서는 보른과, 라이프치히의 교수 생활을 할 때에는 블로흐, 란다우, 훈트와 교류했다. 전쟁 중에는 오토 한, 카를 프릳리히, 전후에는 파울리 뒤러와의 대화를 통해 하이젠베르크의 과학은 진보한다. 그의 자서전 <부분과 전체>는 이렇게 삶의 한 부분으로서 과학자들과 교류했던 대화를 기반으로 한 자서전이었다.


침묵한다는 것은 동의한다는 것이다. 이 때 원자물리학자 18명은 원자무기개발을 반대하는 괴팅겐 선언을 발표한다. 독일의 핵무장에 반대하며, 어떠한 핵개발 연구에도 참여하지 않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연방의회 선거 결과는 아데나워의 승리를 가져다 준다. 원자물리학은 궁극적으로 우주의 비밀을 밝혀내려는 노력으로 양태된 것이었고 그곳에는 인생과 우주의 통찰이 농축되어 있는 비밀의 핵심이지만 그곳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인간은 파괴를 낳았다. 그 파괴가 궁극적으로는 나치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나머지 세계들을 구원했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승자의 자만은 아닐까.

 

이 책은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에 관련된 원자 이론들을 하이젠베르크의 인생을 따라가면서 그와 교류했던 과학자들, 그 과학자들에게서 영향 받은 원자 이론의 백그라운드 등을 20세기 초반 격동 하는 유럽의 역사적 전개와 함께 상세하게 그림으로 설명된 책이다. 만화책이지만 대상은 성인이고, 기초 물리학에 대한 상식은 필수다. 따라서 일반인이 읽기에 때때로 다소 난해한 부분도 있지만, 하이젠베르크의 저서 <부분과 전체>라는 제목처럼 전체의 맥락속에서 읽는다면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라 할지라도 그 부분이 차지하는 전체속의 부분에 대한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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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4 0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15 2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맙습니다 (일반판)
올리버 색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알마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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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실제 사이즈다. 


펜이 함께 있으니 얼마나 수첩같은 크기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하다.  


평생을 뇌를 다친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그 상실의 깊이 속에서 이해하고자 했던 그는 80전후에 쓴 자서전을 막 끝내고 나서 암진단을 받는다. 살 날이 6개월 밖에 안남았고, 그것이 거의 틀리지 않음을 알았을 때 남긴 진짜 마지막임을 알고 쓴 네 개의 에세이들이다.


주기율표를 좋아했던 소년은 매년 생일 때마다, 새롭게 먹은 나이와 일치하는 원소를 떠올린다. 열한살의 나이에, 나는 나트륨이야 라고 말했던 소년은 유대인으로서 소수인으로서, 학살과 비난의 시대를 살아남았고, 수은의 나이가 되기 전 아직 암 소식을 듣기 전, 그는 94세의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인생에서 팔심대가 가장 즐거운 시절 중 하나였다는.. 여든 살이 되면 감각과 기억 등 모든 신체의 능력에서 쇠퇴의 징후가 너무나 뚜렷이 드러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자주 에너지와 생명력이 넘치는 것 같고 늙었다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고 했다. 삶이 아직 활력이 있을 때였다. 죽음의 그림자를 전혀 감지하지도 못했을 때 쓴 글이 첫번째 글 수은이다. 


이제 6개월이라는 시간이 남아있을 거란 걸 알았을 때, <나의 생애>를 썼다. 진단을 받은 직후의 심경을 담담하게 적어 내려간 내용이다. 그는 데이비드 흄이 곧 죽을것을 알고 쓴 빠르게 써내려간 짧은 자서전 <나의 생애>를 떠올렸다. "지금 나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삶에 초연하다." 흄에 비해 '격렬하게 열광하고, 어떤 열정에 대해서든 극단적인' 자신이지만, 삶의 끝에 도달한 심경은 비슷했다는 거였다. 


지난 며칠 동안 나는 내 삶을 마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일종의 풍경처럼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삶의 모든 부분들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느낌을 절실히 받게 되었다.(p27)


그리고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지각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 살았다는 것에 감사했다.


<나의 생애>를 신문(뉴욕타임즈)에 발표한 후, 몇 달이나마 삶을 연장할 가능성을 믿고 수술을 받은 그는 세달 가량 수영도 하고 여러활동을 할 수 있을만큼 건강해졌고 그동안 <나의 주기율표>를 썼고, 건강이 극도로 나빠진 죽기 직전 마지막 달에  <안식일>을 썼다.  <나의 주기율표>에는 색스가 사랑한 화학과 물리,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새로운 핵물리학과 물리학과 생물학에서 등장할 무수한 돌파구들을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슬퍼했고 <안식일>에는 자서전인 <온더 무브>를 읽지 않은 내게는 약간은 충격적인 개인의 취향, 부모와의 갈등 등의 죽음을 앞둔 개인이 주마등처럼 스쳐간 일대기가 적혀져 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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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6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6 1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6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6 1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6 1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6 1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6 1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양이라디오 2016-09-26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리뷰 고맙습니다.

CREBBP 2016-09-26 21:2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고양이라디오님
 
황금레시피 - 전국 화제의 맛집 비법을 담은, KBS 2TV 생생정보
KBS <2TV 생생정보-황금레시피> 제작팀 엮음 / 이밥차(그리고책)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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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드디어 나왔군요. 이거 하나면 집반찬, 찌개, 맛집 요리 만사 O.K. 반찬이 없는 게 흠. 집반찬 편으로 2탄 기대해요. 뭐 하나 할 때마다 황금레시피 찾느라 휴대폰에 반찬 죄 묻히고.. 이제 이 책으로 요리 레서피 천하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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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런 가족
전아리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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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의 삶을 동경해본 적이 있나 자문해본다. 돈이 많으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정말 좋겠네 라고 바란적은 있지만, 실제로 삶의 격이나 차이를 느낄만큼 큰 부자를 만나보지는 못했고, 설사 그런 사람들이 내 인생을 스치고 지나갔대도, 차이를 확연하게 느낄만큼 다른 족속이지는 않았다. 이 책에서 이 가족들의 일상적 모습은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작품 속에서 부자가 가난한 자들에게서 자신들을 구분하는 삶의 형식 때문이었다. 돈이 가져다주는 그 우월감이 그들을 그렇게 보이도록 한 것일까. 둘째 딸 혜린이의 경우는 두 부모가 부자라는 점 말고는 자신 스스로의 능력이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그녀가 그녀보다 덜 가진 나머지 사람들에게 품는 그 경멸과 우월의식은 대체 뭔가. 이런 도발적이고도 모난 소시오패스의 가시 같은 여성, 일일 아침 드라마에서 말고도 진짜로 있는건가. 도대체 한국 사회가 아무리 막장 사회로 돌아간다 해도, "가난뱅이 새끼"라는 대사가 그렇게 나오나.  가난이 어째서 경멸받아야 되는건데?  수많은 가난한 자들이 묵묵히 어쩔 수 없이, 혁명을 하지 못해 견디기 때문에 초극소수의 부자가 더욱 더 부자가 되고 있는데 말이다. 


소설 내용은 사실 위와 관계가 없다. 사실 매우 명확한 주제를 전달하는 이 소설의 주제도 위의 내용과는 관계가 없다. 혜윤, 혜란, 미옥, 용훈은 한 가족이다. 진환, 진욱은 각각 두 딸의 남친이다. 용훈은 성공한 기업의 회장이고, 미옥은 성공한 갤러리 주인이고, 혜윤은 성공한 집안의 성공한 딸이다. 혜란은 별로 스스로 성공할 필요가 전혀 없는 악의적인 철부지 둘째인데, 성격은 못돼 처먹었고, 얼굴 하나는 끝내주게 예쁘다. 할머니까지 대가족이 늘 아웅다웅하면서 자란 나는 가족끼리는 늘 그렇게 아웅다웅하면서 지내는 건줄만 알았었다. 부러울 거 없는 부와 성공을 가진 집안에서 각자 자신의 할 일들을 알아서 착착 하는 집안이라면 그리 할 말이 많지 않을 거 같고, 그래서 별로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살아도, 그게 딱히 불행을 뜻하는 이상징후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제나 모범생이고 착하고 똑똑하고 배려심 깊은 첫째 혜윤은 집안의 이런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으로 인해 집안이 온통 뒤집어지고 그동안 조용하고 말없던 가족이 한바탕 싸우면서 사람사는 훈훈한 온기를 되찾는다는 내용이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사랑하는 행위가 동영상으로 유출되면 여자만 피해자가 된다. 사랑하는 것이 어째서 손가락질 당할 이유이며, 그런 동영상을 보면서 은밀히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대중이면서, 한 사람을 끝도 없이 추락시키기 위해 동영상 배포라는 게 작금의 사회에서도 유효하다는 현실이 씁쓸할 뿐이다. 혜윤은 어느날 조용한 가족에게 파문을 던진다. 동영상이 유출되었다는 거다. 사건의 발단은 여기부터다. 그런데  몇페이지 안넘어가서 동영상 유출은 자작극임이 밝혀지고, 그로 인해 가족은 혼란을 겪는데, 몇가지 이해되지 않는 사건들이 있다. 혜윤이 애초 동영상을 촬영한 이유가 그 지긋지긋한 침묵과 고요한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고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걸 백번 양보해서 이해한다고 쳐도, 그녀를 사랑한다는 진욱의 행동은 완전히 이해불가다. 계속 혜윤이가 하라는 대로, 혜란이가 하라는 대로 생각도 없이 끌려다니더니, 나중에 스스로에게 가한 그 충격적 행동은  납득하기 어렵다. 


훈훈하게 마무리되는 결말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서로 말하지 않으면 감정의 골이 깊어진다는 것이다. 싸우더라도 서로 많은 말을 하면서 살자라는 게 주제다.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말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미 감정의 골이 깊어져서 말로 입는 상처보다는 침묵이 그어놓은 벽이 서로를 서로에게서 보호해주는 것일 경우다. 노력해도 안되는 사람들은 헤어져야 한다. 그런데 그 헤어짐이 말처럼 간단한 게 아니라, 용돈을 주고 먹여 살리고 부를 상속해줄 가족을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러니, 그렇게 필요보다 증오가 큰 서로를 무관심으로 견디면서 살아가는 거다. 하지만 최소한 다시 한 번 시도해볼 수는 있다. 막장 콩가루인채로 그대로 사는 게 섹스 동영상이 유출되는 거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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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0-12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우면 헤어져야 합니다.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울텐데 말이죠..ㄷㄷㄷㄷ
잘 봤습니다.

아울러 당선작 ~~ 축하드리구요 ~~

CREBBP 2016-10-12 14:04   좋아요 1 | URL
그쵸 서로 견질 수 없는 사이라면 서로의 미래를 위해 헤어지는 게 나을 때도 있죠. 감사합니다
 


불꽃같은 사랑은 언젠가 빛과 열이 약해져서 서서히 꺼지는 순간이 있겠지만, 약속이 실현되면 인연은 계속된다. 그러나 때로, 약속이 실현되기 전에, 약속을 만들기도 전에 인연은 끝난다. 짧고 긴 만남이 끝나고 끝과 끝 사이에 남아있는 물건들, 만져지는 것들, 망막이 초점을 맺으면 그 물건에서 반사되는 빛을 뇌신경 회로에서 처리되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만남을 회상시켜준다. 어리석었던 첫 끌림과 바보같았던 사랑과 또 그렇게 수순을 밟고 지나간 언쟁들과 싸움들을 기억한다. 기억과 결합해 과거를 과거 속에 버려두지 않고 자꾸 현재에 끌고 오는, 그리하여 잊고 싶은, 잊어야 하는, 과거의 시간을 붙잡아주는 물건들이 있다. 왜 우리는 그런 것들을 쉽게 버리지 못할까. 그것은 또다른 나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닐까. 혹은 또다른 너 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 너와 내가 박제된 과거 속에서 아득한 망각 속으로 가라앉지 않고 자꾸 떠올라 자맥질할 때 우리는 안다. 이제 그 물건이 떠나야 함을. 떠난 사람은 이미 떠난 것이고, 떠났지만 내가 보내지 못한 것들은 버림이라는 의식을 통해 기어코 외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라리오 박물관은 제주에도 있다. 제주에 있는 뮤지엄은 탑동모텔, 탑동 자전거샵, 탑동 시네마로 구성되어 있다. 낡고 오래된 근대식 건물을 완전히 허물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스란히 남겨놓은 것도 아닌 상태로 반쯤 부수고 반쯤 남겨놓았다. 과거의 흔적은 그렇게 지워진 것도 아니고 남아있는 것도 아닌 채 하지만 앙상한 뼈대와 세월이 짓이겨놓은 때국물 자국으로  남겨졌다. 탑동모텔의  오래된 객실 내, 타일로 만들어진 네모나고 깊은 욕실이 인상적이었다. 때궁물과 낙서와 바랜 흔적들로 남겨진 더러운 침대와 바닥의 일부와 문짝들은 다시 작품이 되어 전시되었다. 스스로의 목적과 이별하고, 실연당해 남겨진 낡고 더러운 건물의 잔해들이 새로운 목적이 된 박물관의 전시물이 되어 스스로를 기념한다.  이렇게 돌고 돌다보면 무엇이 남겨지고 무엇이 떠날까.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을까.


떠나보내면 잊혀질까. 버리면 기억조차 사라질까. 수많은 견딜 수 없는 나날 속에서 보낸 시간들이 견딜 수 있는 시간으로 변했다면 그걸 견딜 수 있을까. 뮤지엄이 한쌍씩 두 개 있는데 입장료가 따로따로 만원가량. 시네마와 자전거샵만을 보고 말 작정이었다. 책을 읽었으므로, (입장료도 비싸고 해서) 탑동 모텔에 있는 실연 박물관을 굳이 가보고 싶지 않았다. 근데 실연 박물관을 전시중인 탑동 모텔은 입장료에 커피값이 포함되었다. 커피나 마시기로 했다. 커피는 극적으로 맛있었다. 그 지극히 개인적인 헤어짐의 사연들은 책으로도 충분했다. 어떤 가족의 아빠가 즐겨타던 오프로드 지프차가 하나 있었는데... 그걸 기증한 가족들은 아빠에게 남편에게 쓴 편지를 함께 기증했다. 그게 인쇄되었던 페이지가 생각났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로비의 커피샵에서 커피마시며 인적 없는 제주의 탑동 거리에 잡아먹을 듯 쏟아지는 뜨거운 햇볕의 열기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닫을 시간이 다가오길래 한칸씩 올라가서 대충 돌아보았다. 


이북으로 구매했던 책이라, 책을 펼쳐서, 오프로드 차에 관한 사연을 남편에게 읽어주었다. 늙어서 눈이 안보인다나 어쩐다나. 나는 뭐 젊은가. 몇줄 읽다가 목이 메어서.. 그냥 덮고 말았다. 개인의 실연이 박물관에 박제되다. 멋진가? 슬픈가? 개인의 실연이 인쇄된 책 속에 담기다. 슬픈가? 멋진가?



* 박대리가 나가서 탑동 모텔에서 하는 실연박물관은 사진에 담아내지 못했다. 사진들은 먼저 구경했던 바이크 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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